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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사람 서울 나들이 ①] 난생처음 국립극장에 옛 연극을 보러 가다

by 낮달2018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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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국립극장과 연극 <햄릿>(2022.8.10.)

▲ 내가 난생처음 가본 국립극장. 사진은 해오름극장으로 1221석 규모의 프로시니엄 무대를 갖춘 대극장이다.
▲ 연극 <햄릿> 포스터

난생처음 국립극장에 가다

 

지난 8월 10일 오후 3시, 나는 난생처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2층 B구역 4열 7번 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날 오전 9시 반에 나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진료받았고, 휴가를 내어 찾아온 아들애와 만나 대학로 부근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국립극장을 찾았다.

 

언젠가 박정자 배우의 연극을 보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꽤 오래됐지만, 나는 그걸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8월 4일에 어느 일간지에서 전무송, 박정자 등의 원로 배우들이 조연과 앙상블(주연과 조연 등을 제외한 여러 단역을 모두 소화하는 배우)로 참여하여 6년 만에 새로 올린 연극 <햄릿> 관련 기사를 읽고 나는 단박에 인터넷으로 표를 샀다.

 

다행히 공연은 내 병원 예약일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9만 원짜리 브이아이피(VIP)석은 매진이었고, 8만 원짜리 OP(Orchestra Pit)석은 몇 자리가 남았는데, 나는 부담스럽지 않은 R(로얄)석 두 장을 샀다. R석은 경로우대 30% 할인으로 동반 1인까지 49,000원에 살 수 있었다.

▲ 해오름극장 로비에 비치된 대형 병풍형 포스터

무려 수십 년 만에 연극을 보러 가면서 나는 얼마간은 설레고 있었다. 내가 관람한 정통 연극은 20대 초반의 <바다 풍경>,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 <아일랜드>, <세일즈맨의 죽음> 등 몇 편이 고작이다. 1970년대 중반에 대구에는 상설 극장도 하나 없었고, 서울 극단의 지방 공연이 연간 두어 차례 정도 펼쳐질 뿐이었다.

 

20대에 만난 연극의 감동

 

특히 나는 에드워드 올비 원작의 <바다 풍경>을 보면서 넋을 잃었다. 작고한 배우 추송웅(1941~1985)이 주연이었는데, 대구 시민회관 소극장의 맨 앞자리에서 연극을 본 나는 커튼콜이 끝나고도 반쯤은 혼이 나가서 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 이후, 앞에 든 몇 편의 연극을 보고 난 이후 수십 년을 나는 극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살았다. [관련 글 :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 돌아가다]

 

지금은 대구에도 소극장이 생기는 등 예전과 비길 수 없을 만큼 환경이 달라졌지만, 나는 극장에 돌아가지 못하고 시골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건 물론 시골 사람의 문제만은 아니다. 국가지표체계 문화예술관람률 중 ‘연극·마당극·뮤지컬 관람률’은 2019년까지 15%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지만, 우리가 누리는 문화는 여전히 어떤 계층에게는 제한적이라는 뜻이다.(아래 통계 참조)

▲ 통계청 '국가지표체계'의 '문화예술관람률' 중에서
▲ 국립극장의 중극장인 달오름극장. 휠체어석 6석 포함하여 510석을 갖춘 중규모의 공연장이다.
▲ 하늘극장(원형 건물)은 627석 규모의 돔형 공연장이다.
▲ 국립극장의 휴식 공간. 무지개 길에서 등나무벤치로 이어지는 무지개 쉼터.

 

<햄릿>을 ‘청춘의  감동’으로 만날 수 있을까

 

아이의 승용차를 타고 남산의 국립극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에 못 미쳐서였다. 거기가 남산이라고 하고, 오르막길을 올랐으니까 그런가 보다 할 뿐, 시골 사람에게는 처음 가는 곳은 거기가 거기다. 울울창창한 숲은 아니어도 숲속에 그런 극장이 웅장하게 서 있는 모습에서 무어랄까, ‘국립’의 무게 같은 게 느껴졌고, 국립극장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주차하고 해오름극장으로 이동하는데 달오름극장이 있었고, 나중에야 대, 중, 소극장의 이름이 각각 해오름, 달오름, 별오름이라는 걸 알았다. 극장 안 휴게 공간에서 좀 쉬다가 현장에서 표를 받았다. 미리 준비한 사진기를 쓸 수 없을지 모른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역시나’였다.

 

직원들이 입장을 안내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촬영은 할 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커튼콜 때도 안 되냐고 물었더니 마찬가지라고 했다. 내가 이 연극에 꽂힌 것은 쟁쟁한 원로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햄릿>을 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나는 내가 이름만 알고 있는 배우들이 무대에 선 모습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왼쪽은 거투르드 역의 김성녀, 오른쪽은 클로디어스로 분한 유인촌.

<햄릿>은 권성덕,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유인촌, 윤석화, 손봉숙, 길해연과 같은 원로·중견 배우들이 조연과 앙상블로 참여하고 햄릿, 오필리어, 레어티즈 등 주요 배역들은 강필석, 박지연, 박건형, 김수현, 김명기, 이호철 같은 젊은 배우들이 맡아서 열연했다. “한국 연극 역사와 함께해온 원로 배우들이 단역으로 출연해 후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다.”[관련 기사 : 명배우 총출동, 연극 햄릿의 귀환···“무대에 작은 배역은 없다]

 

원로와 젊은 배우들의 연극 <햄릿>

 

위에 든 배우들 가운데 내가 아는 이름은 사실 몇 되지 않는다. 주로 텔레비전에서도 활동했거나 워낙 유명해서 알게 된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유인촌, 윤석화 등이다. 그중 나는 개인적으로 박정자의 연극을 꼭 한번 보고 싶어 했으나 여러 해 전 그의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놓치고 말았다. 지방에 살면서 연극 한 편 보자고 상경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 탓이다.

 

나는 정작 극장 안에 들어서 놓고도 해오름극장이 대극장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장애인석 12석 포함하여 객석이 모두 1221석인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1970년대 중반 대구의 100석 미만의 소극장에서 관람한 연극의 감동을 기대하고 있었다.

▲ 해오름극장 L층의 고객지원센터. 여기서 예약한 표를 받았다.
▲ 해오름극장 2층의 휴게실.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하여 연극이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내 기대가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아이와 내가 앉은 2층의 R(로얄)석에서도 배우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준비한 안경까지 껴도 누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스레 귀에 익은 목소리로 나는 클로디어스로 분한 유인촌과 오필리어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 역을 맡은 정동환을 간신히 분간할 수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 광고에서 만난 카리스마 넘치는 박정자의 중성적 목소리를 분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박정자와 손숙, 윤석화는 유랑극단의 배우 1~3역을 맡았는데, 연극이 끝난 후에 다시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간신히 퍼즐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극 구경이라곤 손가락 꼽을 정도밖에 못 해 본 처지이긴 해도 나는 대극장에서의 연극 공연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멀리서 배우들의 표정 하나 살펴보지 못하면서 동작과 목소리만으로 그 극적 전개를 따라가는 연극 구경이 가당키나 하는가 싶어서 말이다.

▲ 해오름극장의 내부.
▲ 해오름극장의 내부.
▲ 해오름극장의 1, 2 층의 로비와 휴게 공간. 연극이 끝나고 쏟아져 나온 관객들이 보인다.

1970년대에 본 연극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도 대극장 공연이었다. 그러나 객석 앞자리에 앉아 있어서인지 나는 배우들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살펴볼 수 있었던 듯하다. 그때도 역시 무대에서 먼 객석의 관객들은 무대의 배우들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이 안 보여 목소리로 배우를 확인하며 본 연극

 

이런 상황이라면, 연극의 대극장 공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배우의 얼굴과 그 표정도 연기의 가장 내밀한 일부일 터인데, 그게 보이지 않을 때 관객은 배우의 연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이다.

 

어쨌든 아쉬움 속에 연극은 끝났다. 배우의 표정을 찾으려 골몰하다 보니, 극의 흐름에 별로 집중하지 못한 상태에서 막이 내린 것이다. 커튼콜에서 대극장을 꽉 채운 관객들은 배우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손뼉을 치면서도 나는 배우의 표정을 보면서 연극을 감상했던 이들은 얼마나 될지가 궁금했다.

 

비록 기대했던 배우들의 얼굴을 제대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사십몇 년 만에 극장을 찾고 연극 한 편을 감상하였으니 그거로도 만족할 일이다. 그것도 국립극장은 난생처음이니 더는 이를 게 없다. 오후 여섯 시, 우리는 정체가 시작되는 거리로 나와 거의 두 시간이 지나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언제쯤 박정자의 연극을 볼 수 있을까

 

나는 이 국립극장 나들이의 아쉬움을 벌충하고자 박정자와 오영수, 장현성과 배종옥이 번갈아 가며 출연하는 A.R. 거니 작 <러브레터>(예술의 전당 소극장)를 보려 했으나 때를 놓쳤다. 한글날 연휴 때 서울 갈 일이 있어 무대석으로 예약하려 했으나, 그 시기에는 매진이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관련 기사 : 연극 러브레터무대에박정자·오영수·배종옥·장현성]

 

그러나 다음 기회는 없을 가능성도 크다. 박정자 씨도 여든의 고령이지만, 나도 더는 미래를 손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이는 넘은 것이다. 시간이 인간을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일은…, 유감스럽게도 없다. 흔히 말하는 ‘버킷 리스트’로 박정자의 연극을 하나 쟁여두는 거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한다.

 

 

2022. 9.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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