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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상주 노악산 남장사, 8점의 ‘보물’을 품었다

by 낮달2018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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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문화재 순례] ③ 노악산(露嶽山) 남장사(南長寺) - 상주시 남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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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장사로 오르는 숲길. 무성한 숲과 흙길이 좋았다. 오른쪽에 캠핑 텐트 지붕이 보인다.
▲ 왼쪽으로 휘도는 산길을 막고 남장사 일주문이 우뚝 서 있다. 남장사 편액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서예가 해강 김규진이 썼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도 거기에 가 봤던지 어떤지가 아리송한 곳이 더러 있다. 그곳은 대체로 소싯적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장소거나 철든 뒤에 들렀어도 무심히 스쳐 간 곳 등이다. 노악산(露嶽山) 남장사가 그런 곳인데, 상주는 내 소싯적과 무관한 지역이니 아마 성년의 어느 때 무심히 들른 곳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잃어버린 기억 속의 남장사를 다시 찾다

 

아마 1990년대 초반 해직 시기에 상주에 머물때에 동료들과 거기 들렀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데도 거짓말처럼 기억이 비어 있는 것은 그때만 해도 명승고적을 무심히 지나치던 시기였고, 절집에서 마음에 남을 만한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정 선생의 차로 안 시인과 함께 남장사 앞 주차장에 닿은 게 8월 13일 오전 10시께다. 말라붙어 있다가 잦은 비로 물이 조금씩 흐르는 계곡 옆에 난 산길로 오르는데 숲, 계곡과 어우러진 흙길이 마음에 들었다. 편하자고 거기다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포장을 하는 순간, 이 풍경은 고스란히 달아나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지방문화재자료 일주문은 세워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서예가 해강 김규진이 쓴 편액에 ‘노악산 남장사’, ‘광서 8년’(1882)이라고 적혀 있어 그 이전으로 추정한다. 건물 양쪽에 둥근 기둥의 앞뒤에 모난 기둥을 붙여 세우고 이를 보조 기둥 삼아 중앙을 받치고 있다. 또 기둥 위에 용 모양으로 조각한 장식이 매우 사실적이다.

▲ 노악산 남장사 일주문. 건물 양쪽에 둥근 기둥의 앞뒤에 모난 기둥을 붙여 세우고 이를 보조 기둥 삼아 중앙을 받치고 있다 .
▲ 일주문의 기둥. 둥근 기둥 앞 뒤로 모난 기둥을 세워서 중앙을 떠받히는 형상이다. 위에는 용 모양 조각 장식이 있다.

갑장산(805.7m), 천봉산(435.8m)과 함께 ‘상주 삼악(三岳)’을 이루는 노악산(露岳山 728.5m)에 깃든 남장사는 ‘상주 4장사(長寺)’ 중 하나다. 내서면 천주산에 있는 북장사와 갑장산의 갑장사는 현존하나, 고려시대에 번성했다는 승장사(勝長寺)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장백사는 1186년(고려 명종 16) 각원 화상이 지금의 터로 옮겨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남장사’로 바꾸었다. [관련 글 : ‘갤러리 카페’ ‘포플러나무 아래’의 미래가 궁금하다]

 

범패를 배워온 진감국사가 창건한 절집, 그래서 최초 보급처?

 

남장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시대인 830년(흥덕왕 5) 진감국사 혜소(774~850)가 세운 사찰로 당시의 절 이름은 장백사(長栢寺)였다. 중국에 유학하여 범패(梵唄)를 배워 온 혜소는 장백사에 머물다가 지리산으로 가서 하동에 쌍계사를 중창하고 주석하다가 입적했다. 최치원이 짓고 쓴, 쌍계사의 국보 진감선사대공탑비문(887)에 혜소의 행적을 묘사한 기록이 있다.

 

“귀국한 처음에 상주 노악의 장백사에 주석하니 의원의 집에 병자가 많듯 찾아오는 이가 구름 같았다. 사찰[방장(方丈)]이 넓기는 하였지만, 대중들의 마음[물정(物情)]에는 좁게 느껴졌다. 이에 마침내 걸어서 강주(康州)의 지리산으로 갔다.”

 

“(진감선사는) 평소 범패를 잘하였는데, 그 소리가 금옥(金玉) 같았다. 구슬픈 듯한 곡조에서 나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구슬퍼 능히 천상의 사람들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멀고 먼 곳까지 전해져서 배우는 자가 승당에 가득 찼으니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 신라에서 어산(魚山= 범패)의 묘음(妙音)을 익히려는 자가 다투어 코를 막고 배우듯이 옥천(쌍계사의 옛 이름)에 남아 있는 범음(梵音)을 본받으려 하니, 어찌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범패는 사찰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불교의 의식 음악으로 판소리, 가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성악곡 중의 하나다. 위 비문에 따르면 혜소는 804년(애장왕 5) 당나라에 갔다가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한 뒤, 옥천사, 즉 쌍계사에서 수많은 제자에게 범패를 가르쳤다고 한다. 즉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범패가 보급된 곳이 쌍계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주시 누리집 ‘관광 상주’에서는 위 장백사 주석 관련 기록을 근거로 상주 장백사가 범패의 최초 보급지로 알려지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장백사 관련 기록에 범패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데도 남장사를 범패와 연결한 것이다. 이게 학계로부터 수용된 정설인지는 알 수 없다. 범패에 대한 해설을 검색해봐도 남장사를 최초 보급지로 이르고 있는 자료는 없기 때문이다.

▲ 천왕문, 금강문이 없는 남장사는 2층 누각 범종루의 아래층을 출입문으로 쓰고 있다. 범종루 앞에 조그만 홍예문이 걸려 있다.
▲ 남장사의 주불전인 극락보전. 뒤쪽의 보광전과는 영역을 나누어 이 앞마당은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 극락보전의 꽃살문
▲ 극락보전에는 1645년(인조 23)에 조성한 목조 아미타여래 삼존좌상(보물)을 봉안했다.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굽은 산길 아래로 돌로 지은 듯한 홍예교(아치형 다리)가 나타나고, 그 위로는 전각의 지붕이 보였다. 천왕문인가 싶었으나 남장사에는 천왕문과 금강문을 두고 있지 않다. 남장사는 범종루 아래층을 출입문으로 쓰고 있었다. 문을 지나 거친 돌계단을 오르면 잔디를 깐 마당 저편에 주불전인 극락보전이 나타났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씩인 맞배지붕집인 극락보전에는 1645년(인조 23)에 조성한 목조 아미타여래 삼존좌상(보물)을 봉안했다.

 

조그만 절집에 보물이 무려 8점이다

 

극락보전 앞에는 삼층석탑 하나와 석등 두 기가 서 있을 뿐 잔디를 깐 마당은 적막했다. 극락보전을 돌아 2층 누각인 설법전(說法殿)의 아래층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오르면 보광전(普光殿)이다. 보광전은 처음에는 무량전(無量殿)으로 불렀으며 내부에 아미타불을 안치했던 곳이다.

▲ 극락보전과 보광전을 경계짓고 있는 설법전. 2층 누각이지만 보광전 앞마당에선 단층이다.
▲ 보광전. 무량전으로 불리다가 철조비로자나불 좌상(보물)을 봉안했다. 중앙 계단 양옆에 파초잎이 무성하다. 왼쪽이 교남강당이다.
▲ 남장사의 요사채인 다향각. 단청하지 않아 마치 여염집처럼 보이는 검박한 건물이다. 오른쪽에 남장사 불이문이 보인다.

보광전으로 오르는 나지막한 계단 좌우에는 파초가 두어 그루씩 커다란 잎사귀를 드리우고 있었다. 법당 앞에 파초는 처음이다.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그리 크지 않은 전각으로 겹처마에 다포식 공포를 높게 올린데다 팔작지붕을 갖추다 보니 덩치에 비해 화려함이 과장돼 보인다.

 

극락보전이 본전이 되면서 무량전은 보광전으로 편액이 바뀌고 법당 안에는 금박을 입힌 철조 비로자나불좌상(보물)을 모셨다. 철불은 나말여초에 지방 호족의 발원으로 많이 조성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철불이 조성된 사례는 많지 않다.

▲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중앙)과 뒤쪽의 목각 아미타여래 설법상. 모두 금박을 입혔다. ⓒ 문화재청

비로자나불 뒤쪽 후불탱은 금박한 목각탱인데, 이게 보물 남장사 목각 아미타여래 설법상이다. 불상 뒤편에는 탱화가 걸리는 게 보통이나 남장사에는 탱화 대신 목각탱이다. 이런 형태는 전국적으로 6군데밖에 없다고 한다.

 

보광전 왼쪽의 전각은 교남강당(嶠南講堂)이다. 승려만이 아니라 상주 선비들의 시회 등이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한다. 그 뒤편에 금륜전(金輪殿), 산신각, 진영각(眞影閣) 등 전각과 그 안쪽으로 요사채가 이어졌다. 남장사의 전각들은 모두 그 내력이 깊지 않다.

▲ 보광전 뒤쪽의 금륜전. 오른쪽 문 위에는 산신각이란 현판이 걸렸다. 금륜전 왼쪽은 진영각이다.

남장사는 주불전인 극락보전 뒤로 높이를 달리하는 공간에 또 하나의 법당이 배치됨으로써 구획이 이루어졌다. 여느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사찰 구성 방식이다. 따라서 남장사는 극락보전이 있는 앞마당이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영역, 보광전이 있는 뒷마당은 비로자나불이 주재하는 영역인 셈이다.

 

남장사는 절집은 그리 크지 않지만,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가 만만치 않다.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목조 아미타여래 삼존좌상,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 등 불상이 셋, 감로왕도와 2점의 영산회 괘불도 등 불화가 셋, 보광전과 관음선원의 목각 아미타여래 설법상 둘 등 모두 8점 보물이다.

 

보광전 오른쪽에는 단청하지 않은 수더분한 여염집 같은 팔작집이 요사채 다향각이다. 저편에 남장사 후문이 보였다. 그 문으로 부근의 남장사의 부속 암자 관음선원으로 갈 수 있다는 건 돌아와서야 알았다. 거기 모신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목각 아미타여래 설법상(목각탱)도 보물이다.

 

후문으로 세 사내는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땀을 흘릴 정도는 아니지만, 습기가 축축했다. 안 시인은 교남강당 앞에서 소나기를 피하던 오래된 기억을 불러냈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여기 들렀던 때가 언젠가, 기억을 더듬었지만, 실패했다.

▲ 범종루 앞 홍예교는 '도안교(到岸橋)'다. 즉, '피안(彼岸)에 이르는 다리'다. 아래에 일주문이 보인다. 왼쪽 고목은 느티나무 보호수.
▲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 있는 석장승. 잡귀와 액운의 출입을 막고 사찰 내 재산과 경계를 표시하는 민간 신앙물인데 썩 익살스럽다.
▲ 남장사 저수지. 아래 곶감 마을과 함께 이 부근의 단풍이 아름답다고 했다. 가을에 다시 한번 찾아야 하는 이유다.

남장사 석장승과 곶감마을

 

내려오는 길의 풍경은 되짚는 길이지만 느낌이 다르다. 계곡도 숲과 나무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길 왼편에 농업용 저수지가 하나 있고, 오른쪽 길가에 경북 민속문화재인 남장사 석장승이 서 있었다. 이 돌장승은 원래 남장동에 있었는데, 1968년 저수지 공사로 현재의 자리로 옮겨놓은 것이다.

 

마을이나 사찰의 입구에 세워 잡귀와 액운의 출입을 막고 사찰 내 재산과 경계를 표시하는 민간 신앙물인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 기능을 겸하기도 한다. 높이 186㎝, 자연석을 살려서 다듬은 이 돌장승은 한쪽으로 치우친 비뚤어진 얼굴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왕방울 눈과 커다란 주먹코, 야무지게 다문 입술에 송곳니는 아래로 뻗어있다.

 

가슴에는 한 가닥의 수염, 그 밑에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성난 표정을 표현하려 했으나 그보다는 소박함과 천진스러움이 엿보여 오히려 지나가는 이들을 미소 짓게 한다. 제작 연도는 장승 앞면에 새긴 ‘임진 9월 입(立)’이라는 기록과 조선 철종 7년(1856)에 지은 남장사 극락보전 현판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순조 32년(1832)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또 남장사에는 사천왕이 없으므로 남장동을 지키기 위한 수호신으로서 이 장승을 세운 것으로도 본다.

 

남장사 아랫마을은 남장동 곶감 마을이다. 전국 곶감의 무려 60%를 상주가 생산하고, 상주 곶감의 26%를 생산하는 곶감 마을은 2005년에 곶감 생산특구로 지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정 선생은 온 마을이 발갛게 물드는 가을이면 감나무 단풍도 좋다고 말했다. 그렇다, 올해 가을 단풍놀이는 남장동으로 와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쟁여넣고 노악산을 떠난다.

 

 

2022. 9.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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