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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자락의 폐사지, 칠층석탑이 외롭다

by 낮달2018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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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문화재 순례] 보물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칠층석탑’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상오리 칠층석탑은 장각사, 또는 비천사라는 절터에 홀로 선 고려시대 전기의 석탑이다. 198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난 13일 오전, 일행과 함께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699번지 상오리 칠층석탑을 찾았다. 그 전날, 상주에서 옛 동료들과 만났었고, 하룻밤을 동료의 작업실에서 묵은 뒤, 다시 만난 일행 두 사람과 함께 상주 관내 문화재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상주의 석탑 두 기

 

시외버스로 상주로 가면서 나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여 상주의 문화재를 대충 훑어보았다. 하룻밤을 묵고 난 다음 날에 짬을 내서 그걸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해서였다. 상주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중 국보는 없고, 보물이 20점이나 있었는데 그중 불탑이 두 기였다.

 

하나는 사벌국면(나는 ‘사벌면’이 ‘사벌국면’으로 명칭을 변경했나 했는데, 1914년부터 ‘사벌국면’이었다)에 있는 화달리 삼층석탑이다. 사벌국(沙伐國)의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곳의 서쪽에 있는 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2015년 7월 경천대에 갔다오는 길에 들러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 다시 확인해 보니 “2020년 1월 1일 사벌면을 사벌국면(沙伐國面)으로 개칭하였다”고 되어 있다. 같은 <위키백과>에서도 이런 오류가 있다.

▲ 상주시 사벌국면 화달리 삼층석탑

다른 하나가 상오리 칠층석탑인데, 처음 듣는 탑이었다. 시내에서 40여 분 나가야 하는 화북면 있는 탑이라는 걸 알고, 시내 남장사(南長寺)만 들러도 좋다고 했는데, 운전하는 역사과의 정 선생이 뭐 잠깐 가면 되는데, 하면서 남장사를 거쳐 화북으로 내달린 것이다.

 

탑이 지켜온 '오래된 과거'를 찾아서

 

처음 탑을 찾아서 사진을 찍고 그걸 글로 쓰기 시작한 게 2007년이다. 신세동 칠층전탑을 비롯한 안동 시내의 전탑과 석탑 몇 기를 둘러본 이야기를 <오마이뉴스> 기사로 쓴 것이다. [관련 글:저 혼자 서 있는 탑들] 거기서 나는 그렇게 썼다.

 

“탑은 어쩌면 ‘부처님의 나라’를 꿈꾸었던 신라 시대 이래 이 땅의 겨레들이 부처님께 의탁한, 소망과 비원(悲願)의 결정체인지도 모른다.  낮은 산 좁은 골짜기 들머리에, 더러는 곡식이 익어가는 논밭 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탑이 안고 있는 천년의 침묵은 바로 이 땅의 겨레가 겪어온 즈믄해의 역사라 해도 무방하겠다.”

 

나는 불자가 아니어서 불탑을 바라보며 여밀 불심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탑을 공부하거나 그게 지닌 미학을 남달리 여기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전하는 불탑들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이라 모두 천년 안팎의 세월을 견뎌온 구조물이다.

 

나는 탑을 찾아 그 ‘오래된 과거’를 렌즈에 담고, 그걸 정리하면서 그 만남의 순간을 복기해보곤 한다. 그것은 잘 가늠되지 않는 ‘역사’나 ‘세월’, ‘시간’ 따위를, 어떤 실체로서 소박하게 확인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돌의 초상이 지닌 질감과 빛깔에서 한 켜 깊이 누적된 시간을 헤아리면서.

 

고려시대의 불탑 상오리 칠층석탑

 

국도를 달리다가 장각폭포로 가는 좁은 마을 길로 접어드니 상오리다. 상오리는 속리산 국립공원 정상인 천왕봉(1058m)에 오르는 최단 거리 코스여서 등산객들의 발길이 잦다고 한다. 탑은 폭포를 지나 마을 어귀의 산 중턱 밭 가운데 외롭게 서 있었다. 산비탈에 설치한 데크 계단 위로 탑의 윗부분이 보였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고추와 들깨, 가지 등속이 자라고 있는 밭 한가운데 철제 울타리를 두른 칠층탑이 나타났다.

 

나는 무심히 보아 넘겼는데, 정 선생이 고려시대에는 7층, 9층 탑 등 층수가 많아졌다고 말해주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로 3층 탑이 중심이었는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5층 탑, 7층 탑, 9층 탑이 세워졌다. 당시에 조성된 대표적인 탑으로 개성 불일사 오층석탑, 개성 현화사 칠층 석탑,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이 있다.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 양식인 대리석으로 높고 화려한 모양을 새긴 짝수 층의 탑도 세워졌다. 원나라의 영향으로 세워진 탑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던 이 탑은 되돌려 받아 1960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에 전시하고 있다.

▲ 상오리 칠층석탑은 마을 길 옆 비탈 위 경작지에 서 있다. 탑으로 가는 데크 계단길.
▲ 이 탑은 1층 몸돌이 상층 기단 중석보다도 높아서 균형을 잃고 있다.

상오리 칠층석탑도 절집 없이 빈터에 홀로 서 있다. 불탑이 저 혼자 서 있을 리는 없으니 주변이 폐사지라고 봐야 한다.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장각사(長角寺)라는 사찰에 있었다고도 하며, 또한 고려 때 창건한 비천사(備天寺)라는 사찰 안에 있었다고도 전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나 역사적 실증자료는 없다.

 

폐사지인데, 절 이름은 ‘장각사’와 ‘비천사’로 나뉘어 전한다

 

한일 강제 병합 당시 일본 헌병이 낭인을 동원하여 탑의 북쪽 기단을 허물고 무너뜨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1975년도에는 직지사에서 탑을 옮겨가려 했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77년에는 무너져 있는 탑을 복원하였다. 2004년부터 2005년 사이에 받침돌에 새로운 부재를 보충하고 깨진 부재는 다시 붙였다. 2007년에도 탑이 기울어지고 붕괴의 우려가 있어 전체를 해체하여 이끼류를 제거한 후 복원하였다.

▲ 상오리 칠층석탑. 지금은 토단과 하층기단 사이에 보호 울타리가 있다. ⓒ 문화재청

탑 서쪽에 주춧돌이 여섯 개 남은 터가 있는데 이는 5칸 정도의 법당 자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몸돌의 동쪽 면에 문비를 새겼고 탑은 동향(東向)이니, 이 가람은 동탑서전(東塔西殿)의 배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탑의 높이는 9.21m. 한 변이 8.4m에 이르는 석재로 테를 두른 얕은 토단(土壇)을 쌓고 그 위에 2층 기단과 7층 탑신을 세웠다. 

▲ 토단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보호 울타리 밖으로 토단이 보인다.

하층기단은 하대석 없이 중석(中石)과 갑석(甲石)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전형에서 벗어난 것이어서 원형이 아닐 수 있다고 추정한다. 하층기단의 중석은 크기가 다른 부재를 짜 맞춘 것으로, 남쪽 면에만 모서리 기둥이 있고 서쪽 면에는 가운데 기둥[탱주(撑柱)] 2개가 새겨져 있다.

 

또, 갑석 밑에 부연(副緣)이 있는 것도 하층기단 갑석으로는 이형태다. 하층기단의 갑석 위에는 다른 돌로 상층 기단 굄을 받쳤다. 상층 기단의 중석과 갑석은 각각 6개 또는 4개의 돌로 짜여 통상의 형식을 따랐다. 갑석에는 부연이 있으나 폭이 1층 옥개석(屋蓋石:지붕돌)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좁아져서 비례가 어긋나 버렸다.

 

*부연(副緣):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

*쇠시리:나무의 모서리나 표면을 도드라지거나 오목하게 깎아 모양을 내는 일. 또는 그런 것.

▲ 상오리탑의 1층 몸돌 남쪽에 난 문비(문짝의 형태) 조각. ⓒ 문화재청
▲ 상오리 칠층석탑의 하층기단. 하대석 없이 중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다. 갑석과 중석 사이에 부연이 있다. ⓒ 문화재청

부분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으나 전체적인 균형미는 뛰어나

 

탑신부 1층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3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우주(隅柱)]이 새겨지고 동쪽 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문비(門扉)]도 있다. 특히 몸돌은 상층 기단 중석보다도 높아져서 균형을 잃어버렸다. 얇은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지 않고,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반전(反轉)]이 뚜렷하며, 밑면의 받침은 5층까지는 5단을, 6·7층은 4단을 두었다.

 

2층 이상은 지붕돌과 몸돌을 하나의 돌로 구성했는데 몸돌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일정 비율로 줄어들고 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우주) 형태가 새겨졌고, 지붕돌 받침은 4단씩으로 줄어들었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상오리 칠층석탑은 기단의 짜임새나 몸돌과 지붕돌을 여러 매로 짜 맞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또 탑신이 날렵하여 경쾌한 느낌을 주면서도 탑의 크기가 장중하다. 부분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은 부분들이 있지만, 전체적인 균형미는 뛰어난 탑으로 평가된다.

 

탑의 철제 울타리 밖은 모두 경작하고 있는 밭이다. 사진을 찍으려고 움직여보니, 작물이 한창 자란 밭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원하는 화각(畫角)을 얻기 어렵다. 돌아와 사진을 살펴보니 화각도 비슷하고, 비슷한 장소에서 찍은 사진투성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봐도 비슷한 화각의 사진이 많았다. 다른 이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 주변도 밭이지만, 터를 사들였는지 탑 주변이 널찍한 공간으로 남아 있어 탑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탑도 훨씬 아름답고 당당해 보였다.  흔치 않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있는 공간이 경작지가 된 상황은 좀 거시기하다. 답사의 편의를 위해서든, 탑의 보호를 위해서든 이 환경은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주변에 장각폭포와  맥문동 솔숲

▲ 장각폭포와 금란정. 수량이 많았고, 물도 맑았다. 폭포 위에 그물을 쳐놓은 것은 위험한 다이빙을 막기 위해서다.
▲ 문장대 야영장 입구의 맥문동 솔숲. 전국의 생활사진가들이 모이는 명소라 하는데, 웬일인지 나는 별로 감흥이 일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 장각폭포에 들렀다. 폭포라고 해서 가 보면 실망하기 쉬운데, 장각폭포는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장각 계곡의 6m 높이의 절벽을 타고 떨어지는 폭포라 할 만한 물줄기였다. 폭포 위 기암에 선 정자는 금란정(金蘭亭)이다. 주위에 오래된 솔숲이 있고 근래 큰비가 잦아서 수량이 풍부한 용소의 깊이는 4m에 이른다.

 

외진 산골인데도 물에는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로 붐볐다. 폭포 바로 밑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경계를 지어 놓았고, 폭포 위에는 다이빙을 막으려고 그물을 쳤다. 장각폭포에서는 사극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낭만자객>등이 촬영되었다고 한다.

 

간선 도로변의 문장대 야영장 입구에 꽤 이름난 맥문동 솔숲이 있다. 전국의 사진 동호인 사이에서 8월에 가야 할 출사 명소에 꼽힌 곳이다. 장각폭포의 영향으로 안개까지 자주 끼어 안개와 빛, 소나무와 맥문동이 어우러진 풍경이 몽환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쩐지 별로 내키지 않아 사진 몇 장만 찍고 우리는 서둘러 우복동(牛腹洞)을 향해 화북을 떠났다.

 

 

2022. 8. 23. 낮달

 

[상주 문화재 순례] ② 국가민속문화재 우복 정경세 종가(상주 외서면 우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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