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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우복 정경세의 청빈, 초가 별서(別墅) ‘계정(溪亭)’으로 남았다

by 낮달2018 202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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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문화재 순례] ② 국가민속문화재 우복 정경세 종가(상주 외서면 우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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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복 정경세의 종가. 뒷날 5대손인 정주원이 영조의 사패지를 '우산동천'으로 이름 붙이면서 종가로 자리 잡았다. ⓒ 문화재청

상오리에서 곧장 외서면 우산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종가로 차를 몰았다. 나는 정작 우복이 상주 사람인 것도 몰랐지만, 동행한 안 시인이 거기가 지인의 본가라면서 들러 보자고 해서였다. 상주에서 18년째 산다는 운전자 역사과 정 선생도 지역에 밝아서 망설이지 않고 내처 차를 달렸다.

 

단지 조선조의 문신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우복 정경세는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나, 외서면 우산리에 살다가 사벌면 매호리에서 세상을 떠나 공검면 부곡리에 묻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몇몇 매체에 실린 우복의 생애를 가려 뽑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본관이 진주인 우복 정경세는 류성룡의 문인으로 선조 때 출사하여, 광해군과 인조 연간에 예조와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86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출사(出仕)한 이래 이조좌랑, 영남 어사, 홍문관 교리 등의 벼슬을 두루 맡았다.

 

정여립 옥사로 하옥되었다가 낙향해 있던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항전했으나 어머니와 동생이 왜적에게 화를 당해 목숨을 잃게 된다. 우복 자신도 화살을 맞아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이후에도 의병 활동을 계속했다.

▲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의 우복 정경세신도비. 지금은 비각으로 보후 중이다. ⓒ 문화재청

1598년 경상감사로 나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영남 일대에 백성의 힘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렸다. 백성을 너그럽게 포용하면서 알맞은 시기에 양곡을 잘 공급해 주고, 백성들의 풍습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 영해 부사로 나가 풍습을 교화하다가 그해 겨울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했다. 이후 몇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당쟁으로 시끄러운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02년에는 고향인 율리에서 자치적으로 질병을 퇴치하고자 김각, 성람, 이준과 함께 존애원(存愛院)이라는 사설의료기관을 설립했다.

 

존애원은 의료시설이 희소했던 당시 많은 약재와 시설을 갖추어 주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했다. 또 의료활동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화합을 꾀하고자 치른 행사 가운데 1607년부터 1894년까지 백수회(白首會)라는 경로잔치를 개최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 1602년에는 우복은 고향인 율리에서 자치적으로 질병을 퇴치하고자 존애원(存愛院)이라는 사설의료기관을 설립했다. ⓒ 영남일보

1607년 대구 부사에 부임한 우복은 향교와 서원을 통한 학문 진작에 힘썼고, 수성들의 가뭄을 해결하고자 지금의 수성구 지산동에 저수지를 쌓았다. 이후 그곳 주민들은 저수지 제방에 송덕비를 세우고 해마다 감사제를 지냈다고 한다.

 

예학에 정통한 영남학파의 거두 우복 정경세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여 교서를 내려 신하들의 바른말을 구하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이 1만여 자에 이르는 이 무신소(戊申疏)는 광해군의 실정을 조목조목 신랄하게 지적한 상소문이었다.

 

▲ 정경세의 문집 <우복집>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후 성균관 대사성과 나주 목사, 전라감사(1610) 등에 나아갔으나 1611년 정일홍의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홍문관 부제학이 제수됐다. 이후 10여 년 동안 우복은 홍문관·예문관(양관) 대제학과 이조판서 등 여러 청현직(淸顯職)을 거쳤다.

 

우복은 퇴계 문하인 서애 류성룡의 직계 제자인 서애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았다. 서애가 퇴계에게서 물려받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주자의 편지를 뽑은 책)>를 물려받은 우복은 <주자대전>의 좋은 글을 가려 뽑은 <주문작해(朱文酌海)>를 저술했다.

 

정경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정몽주에서 시작하여 이황에게서 집성된 도학은 김굉필·정여창·이언적 같은 현인들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상주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며 유생을 설득하여 도남서원을 창건하였으며, 이곳에 오현(五賢: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의 신주를 모셨다.

 

그는 퇴계학의 적통을 이은 학자였지만, 기호학파의 거두인 사계 김장생과 교유 소통했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남인과 서인은 경쟁과 대립한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당파를 넘는 소통은 남인과 서인의 화합을 끌어냈다. 그가 사계의 고제(高弟제자 중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인 동춘당 송준길을 사위를 맞은 것은 그러한 교류의 결과였다.

 

우복은 청빈하여 재물을 탐하지 않았던 우복을 일러 노론인 우암 송시열은 “선생은 재상 40년에 들에는 밭이 없고 서울에는 집이 없으며, 오직 우복 산중에 산수 하나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복은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조그만 정자와 살림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노년 보낸 별서, 5대손 영조의 사패지에 우산동천 명명해 종가로

 

우복은 1602년 초당을 지은 이래 이듬해 별서(別墅:교외에 따로 지은 집) 성격의 정자인 청간정(聽澗亭)을 세웠다. 그는 훗날 대산루가 된 초당에서 노년을 보냈다. 뒷날 5대손인 정주원(1686∼1756)이 영조가 하사한 토지인 사패지(賜牌地)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땅을 ‘우산동천(愚山洞天)’으로 이름 붙이면서 종가로 자리 잡았다.

▲ 우복종가의 솟을대문. 여느 종가의 솟을대문과는 달리 위압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 종가의 사랑채인 산수헌. 2단의 축대 위에 앉혀 솟을대문 너머 동네 들판을 내려다볼 수 있다.
▲ 종가의 안채. ㄱ자형 집인데, 대청에 서 있는 이가 종부다. 마당에 나무 모종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이 우리 일행이다.
▲ 종가의 안채 뒤뜰. 우복종가는 전체적으로 모든 건물을 축대 위에 높다랗게 앉혔다.

우리가 이안천(利安川)과 우산(愚山)을 앞뒤에 둔 배산임수 지형의 우복 종가에 닿은 것은 정오가 다 되어갈 때였다. 대문 앞이 드넓긴 해도, 솟을대문이 그리 높지 않아서였을까, 방문자를 위압하는 듯한 느낌이 없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가 ‘튼 입 구(口)’ 자를 이루고 있다. 그 뒤편 오른쪽에 우복을 모신 불천위(不遷位) 사당이 있다.

 

사랑채는 앞쪽에 석축을 쌓고, 뒤로 조금 물린 곳에 다시 기단을 쌓아 앉혀서 성큼 높다. 사랑채에서 대문채 너머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산수헌(山水軒)’ 현판을 달았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데 2칸 방과 마루 그리고 방으로 구성됐다. 대청에 앉아 마을 앞 들판을 바라보면 왜 사랑채가 2중의 석축 위에 앉았는지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산수헌이란 현판이 달린 연유도 같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부엌·안방·윗방·대청·상방으로 구성되었고, 지금도 종부가 거주하는 공간이다. 동행한 시인은 친구인 따님 안부를 물으며 종부와 인사를 건넸다. 좌우가 바뀐 ㄱ자형의 안채 오른쪽이 행랑채다. 그리고 그 오른쪽 뒤편이 사당이다.

▲ 계정 옆의 대산루. 정경세의 6대손 정종로(1738~1816)가 1782년(정조 6)에 지었다.
▲&nbsp;계정은 우복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한 1603년에 지은 2칸짜리 초당으로 한 칸은 마루이고, 한 칸은 온돌방이다.

종부에게서 열쇠를 받아 종가 북동쪽에 있는 계정(溪亭)과 대산루(對山樓)로 향했다. 호젓한 숲속에 조그만 초가 한 채와 그 뒤에 이층 누각이 나타났다. 계정은 우복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한 1603년에 지은 2칸짜리 초당으로 한 칸은 마루이고, 한 칸은 온돌방이다. 우복은 별장과 서실로 쓴 계정을 ‘산골 물소리를 듣는 정자’, 청간정(聽澗亭)이라고 불렀다.

 

초가로 이어진 계정, 청빈의 선비 정신

 

정경세는 대사헌 등 높은 벼슬을 지냈지만, 고향에 돌아와 소박한 계정에서 청렴하게 여생을 보냈다. 계정은 그의 이러한 선비 정신을 기려 지금까지 초가로 이어지고 있다. 나지막하게 정자를 두른 흙담이 소박하고 편안했다. 우복이 지은 <우곡잡영(愚谷雜詠)> 20수 중 ‘계정(溪亭)’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만 골짜기 바람과 물속에 홀로 살아가매[萬壑風泉獨掩扃]

긴긴 해에 계정에는 찾아오는 사람 없네[日長無客到溪亭]

늙어가매 뜻 나른해 책을 놓고 나가보니[晩來意倦抛書出]

눈 안 가득 신록이라 뜰 안 온통 푸르르네[潑眼新陰綠滿庭]

     - 문집 <우복집(愚伏集)>

 

▲ 대산루의 대문. 종가의 종부에게서 열쇠를 받아왔으나 맞는 열쇠를 못 찾아 들어가지 못했다.
▲ 대산루. 왼쪽의 단층 건물은 강학 공간, 오른쪽 2층 누각은 휴식과 접객, 독서와 장서 등을 위한 공간이다.
▲ 왼쪽 담 너머로 바라본 대산루. 누각 뒤편에 작은 계곡이 흐른다. 계정을 청간정이라 함은 그 물소리를 듣는다는 뜻이었다.

계정 옆에는 정경세의 6대손 정종로(1738~1816)가 1782년(정조 6)에 지은, 산을 마주하고 있는 누각 대산루(對山樓)가 있다. 대산루는 개천과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동향의 팔작 기와집으로 단층 건물에 2층 누각을 연결한 정(丁) 자형의 특이한 건물이다.

 

단층은 정면 4칸이며, 대청 2칸. 온돌방 2칸을 두었고 부엌이 딸린 정사(精舍)로 강학 공간이다. 온돌방 앞에 툇마루를 놓고 돌계단으로 누각에 오르게 되어 있다. 누각은 휴식과 접객, 독서와 장서 등을 위한 공간이다. 대산루 오른편에는 작은 계곡이 흐른다. 그 물소리를 듣는 정자가 계정이었다.

 

종부에게서 열쇠를 받아왔으나 꾸러미 열쇠를 다 넣어봐도 맞는 게 없다. 결국 문밖에서 대산루를 더듬어 보고 말았다. 종가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잎사귀가 커다랗고 열매에 가시에 숭숭 난 나무를 만났는데 안 시인은 그걸 마로니에라고 했다.

 

며칠 전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나무와 잎은 비슷한데, 열매가 좀 다른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마로니에가 맞다. 종가에 열쇠를 돌려드리고 우리는 우복종가를 떠나 시내 쪽으로 달렸다. 때를 넘겼는가, 시장기가 몰려왔다.

 

돌아와서 확인하니 우복종가 근처에 도존당(道存堂)이라는 서원이 있다. 처음에 향인들이 서당으로 세운 것을 점차 증축하여 뒤에 우산서원(愚山書院)으로 승격하고 정경세를 봉향하다가 대원군 때 훼철되어 현재 건물만 남았다고 한다.

▲ 우산리 우복 종가 근처에 있는 도존당. 서당으로 출발하여 우산서원이 되었다가 훼철된 뒤 건물만 남았다.

‘우산동천(愚山洞天)’ 10승지(勝地)로 불리는 ‘우복동천(牛腹洞天)’과 다르다

 

종가가 있는 사패지는 흔히 ‘우산동천(愚山洞天)’ 혹은 칠리강산(七里江山)으로 불린다. 일대가 우북산(于北山) 또는 우산(愚山)으로 불리는데 정경세의 자호 우복(愚伏)은 산 이름에서 음을 취해 겸양의 뜻을 담았다고 한다.

 

인근 화북면 용유리는 예부터 삼재(三災:전란, 질병, 기근)가 들지 않는 명당, 즉 이상향인 ‘우복동(牛腹洞)’으로 불린다. 말 그대로 ‘소의 배[우복(牛腹)] 안처럼 생긴 동네라는 뜻의 승지(勝地)인데, 우복동으로 들어가는 입구 시루봉 아래 큰 바위엔 ‘洞天(동천)’이라는 각자(刻字)가 있어, 속리산 산행객들은 그 부근을 ‘우복동천(牛腹洞天)’이라 부른다.

 

우복 정경세의 종가가 있는 ‘우산동천’이 이 ‘우복동천’과 섞갈리면서 사람들은 다소 혼란을 겪는 듯하다. 우산동천을 정경세의 자호를 따 ‘우복동천’이라 하면서 승지 ‘우복동천’과 헷갈리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우산동천을 우복동천이라 한다고 해도 글자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유념할 일이다.

 

 

2022. 8. 28. 낮달

 

[상주 문화재 순례] ① 보물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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