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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지주중류’와 ‘백세청풍’으로 기린 야은 길재

by 낮달2018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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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 성리학역사관 개관 2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야은 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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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역사관 개관 2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야은 길재, 지주중류에 실린 백세의 청풍>은 8월 9일부터 12월 4일까지 열린다.

<야은 길재, 지주중류(砥柱中流)에 실린 백세(百世)의 청풍(淸風)>(2022.8.9.~12.4.)

 

구미 성리학역사관이 지난 8월 9일부터 12월 4일까지 개관 2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 <야은 길재, 지주중류(砥柱中流)에 실린 백세(百世)의 청풍(淸風)>를 열고 있음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지난해 이맘때 <매학(梅鶴)을 벗 삼아 펼친 붓 나래>라는 제목으로 해동초성(海東草聖) 고산 황기로 특별전이 열렸음을 기억하고 역사관 누리집을 들렀다가 이 전시회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관련 글 : 금오산 둘레길 돌면서 해동초성의 초서를 만나는 법]

 

이번 전시는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살아생전 자취와 사후의 평가를 재조명하고 해평길씨 문중의 모습 등을 소개하고자 마련됐다. 그러나, 무려 600년 전에 이 고을에서 살다 간 인물의 자취를 찾는 일도 그의 삶에 대한 평가를 다시 돌아보는 일도 쉽지 않다. 그 시간은 유한자인 인간이 돌이켜보기엔 너무 멀고 아득하기 때문이다.

▲ 전시된 '야은 길선생 유상(遺像)'
▲ 선산 삼강정려에 걸려 있던 편액 '백세청풍 팔년고등'. '팔년고등'은 열녀 약가의 수절을 뜻한다.

길재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이른바 ‘역성혁명’ 시기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유학자다. 그는 여말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모순을 성리학적 이상으로 개혁해 민본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고려 말의 개혁적 지식인이었다. 이들 신흥 사대부들은 그러나, 현실을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건설할 것인가를 두고 첨예하게 갈라졌다.

 

여말의 신흥사대부 길재의 선택

 

여말 최고의 성리학자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의 문하로 개혁에 대한 열망을 공유하며 연대했던 정몽주(1337~1392)와 정도전(1342~1398)의 엇갈린 선택은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정도전과 함께 권근(1352~1409) 등이 새 왕조 건설에 참여하지만, 길재와 이숭인(1347~1392), 박상충(1332~1375) 등은 정몽주의 길을 갔다.

 

정몽주가 지키고자 한, 충(忠)과 의(義)는 바로 성리학적 질서의 핵심 가치였다. 그는 그것을 지키고자 하다가 목숨을 내놓아야 했지만, 남은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 고려 왕조를 지키는 대신 새 왕조에 대한 출사(出仕) 거부와 낙향을 선택했다.

 

나라가 점점 기울어가던 1390년 봄, 야은은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망국을 즈음하여 여러 차례 벼슬자리가 주어졌으나 물리치고 나아가지 않았다. 우왕의 부음(訃音)에 채소, 과일과 혜장(醯醬, 식초와 장) 따위를 먹지 않고 3년 상을 치렀다. 그것은 그가 고려 왕조에 대해 표시한, 신하로서의 마지막 의리였다.

▲ 야은은 67세에 세상을 떠나 구미시 오태동 산기슭에 묻혔다. 부근에 오산서원이 있었으나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했다.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다가 불에 타 죽거나 참살당한 ‘두문동 72현’ 등 선비에 비기면 벼슬을 물리치고 낙향해 은둔의 길을 택한 야은 같은 이들은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절조를 표현한 셈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충의와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왕조의 명운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야은, 온건한 방식으로 왕조의 교체를 추인

 

세종은 야은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서 그의 자손을 서용(敍用)하려 했고 야은은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왕조의 교체를 추인한 것이다. [관련 글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낙향 이래, 야은은 이욕(利慾)에 뜻을 두지 않고 흠모하는 학자들이 모여들면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는 등 그는 오직 도학을 밝히고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 1389∼1456)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그가 조선 성리학의 원류로 평가되는 이유다.

▲ 1587년(선조 20)에 겸암 류운룡 이 길재의 묘역을 정비한 뒤 세운 지주중류비.
▲ 1403년(태종 3)에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남재가 길재가 거처하던 곳에 가묘로 건립한 사당 '야은사'. 1972년 후손이 중수한 것이다.

야은은 67세에 세상을 떠나 구미시 오태동 산기슭에 묻혔다. 사후 1427년(세종 9)에 통정대부 사간원 좌사간 대부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으로 추증되었다. 이어 <삼강행실도>(1434)에 수록되고, <세종실록>에는 그의 ‘졸기(卒記 : 조선 시대에 어떤 인물이 사망했을 때,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경우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적은 공식적인 기록)’를 실어 효성과 절의를 기렸다.

 

조선 성리학의 원류로 추앙받다

 

야은은 조선 왕조 창건에 대한 부동의를 낙향하여 출사를 거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내내 그의 절의를 기린 것은 그가 지키고자 한 충의가 곧 조선조의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핵심 가치였기 때문이다. 세조에 맞서 죽음을 선택한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진 것도 같은 이유다.

 

이후 인조·현종·숙종·영조·정조·고종에 이르기까지 묘사와 사당, 제향 서원 등에 예관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고, 1741년(영조 17)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야은은 문집으로 <야은선생행록>·<야은집>·<야은속집>·<야은선생언행습유> 등을 남겼고, 선산의 금오서원, 인동의 오산서원, 성곡서원·청풍서원(금산) 등에 제향되었다.

▲ 금오산 어귀의 채미정. 1768(영조 44)년에 선산 부사 민백종이 선산 유림과 의논하여 세운 정자다. '채미'는 '고비를 뜯는다'는 뜻이다.
▲ 선산읍 봉한리의 삼강정려. 봉한리 출신의 충신, 효자, 열녀의 정려를 모아놓은 곳이다.
▲ 삼강정려각에 세운 야은의 정려비. '고려충신 길재지려'라 새겨졌다.

야은 길재에 대한 추모와 기림은 조선조 내내 그의 고향인 선산에서도 이어졌다. 1403년(태종 3)에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남재가 길재가 거처하던 곳에 가묘(家廟)로 사당 ‘야은사(冶隱祠)’을 건립하였다. 야은사는 임란 때 소실되었으나 1602년에 선산 부사 김용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2년 후손이 중수한 것이다.

 

구미엔 길재를 기리는 사적이 곳곳에 있다

 

1587년(선조 20)에 인동 현감으로 있던 겸암(謙唵) 류운룡(1539~1601)이 길재의 묘역을 정비한 뒤 주변에 사당과 오산서원을 창건하고 그 앞에 비석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웠다. ‘지주(砥柱)’란 중국의 황하 중류에 있는 산이다. 황하가 범람할 때도 흔들리지 않는 이 산은 중국 은나라 충신 백이·숙제의 곧은 절개의 비유로 흔히 쓰였는데, 길재의 충절을 이 산에 비긴 것이다. [관련 글 : 야은 길재, 삼은 가운데 우뚝한 절의의 상징]

 

1768(영조 44)년에는 선산 부사 민백종이 선산 유림과 의논하여 금오산 아래 정자 ‘채미정(採薇亭)’을 세웠다. 채미정은 금오산 공용주차장 앞 개울 건너편에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인 채미정과 강학 공간인 구인재(求人齋)가 있고 뒤편에는 유허각과 경모각이 있다.

 

1795년(정조 19년)에 선산 부사 이채가 선산읍 봉한리에 삼강정려(三綱旌閭)를 세웠다. 삼강정려는 봉한리 마을에서 난, 삼강의 충효열(忠孝烈)을 실천한 충신, 효자, 열부의 정려를 한데 모아놓은 건물이다. 정면 세 칸을 한 칸씩 충신, 효자, 열부의 정려를 각각 빗돌과 편액(扁額)으로 구분했는데, 여기 충신으로 야은의 정려비를 세운 것이다. [관련 글 : 충효는 무엇이며, ‘열부는 또 무엇이뇨]

 

이 밖에도 현대에 들어서 그에 대한 기림은 이어졌다. 시내 부곡동에서 신평동을 잇는 7.6km가량의 직선 도로의 이름이 ‘야은로’이고, 야은사가 있는 도량동에는 야은초등학교도 있다. 역사 인물을 기리는 길 이름으로 왕산 허위를 기린 ‘왕산로’, 박정희를 기린 ‘박정희 길’이 있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길이 이 야은로다.

 

지난해 개관한 구미 성리학역사관이 분관으로 야은역사체험관을 열었으나, 콘텐츠 부족과 운영프로그램 부실 등으로 찾는 이가 얼마 되지 않는다. 1천억 가까이 들인 새마을 테마공원이 개관 휴업 상태를 면치 못한 것과 비슷한 상황인데, 마땅한 해결책도 쉽지 않을 듯하다.

 

4부분으로 구성된 전시,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소구할까

▲ 전시된 <야은집) 상중하 권.

이번 전시는 ‘만나다[알(謁)]·기리다[찬(讚)]·그리다[모(慕)]·해평 길씨가의 사람들’이라는 4개 부분으로 구성됐다. 전시 공간인 기획전시관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실내로 들어가면 뜻밖에 공간이 넓어 보이지 않는다. 그 공간은 네 부분으로 구획하여 전시가 이루어지니, 그 규모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단출한 전시회다. ‘만나다’에는 선생의 초상, 유묵, 문집, 교지 등이, ‘기리다’엔 그의 충절이 수록된 <삼강행실도>, 영조와 정조가 내린 제문, 삼강정려와 청풍서원에 걸린 현판 등이 전시되었다. ‘그리다’엔 유허비 탁본, 지주중류비 음기 탁본, 백세청풍비 음기 탁본첩 등이 전시되었는데, 이들 전시물의 크기가 그만그만하다 보니 전시관에 단출하게 모아놓은 것이다.

 

마지막이 ‘해평 길씨가의 사람들’인데, 중국에서 온 성씨 해평 길씨의 계보를 소개했다. 당나라 때 귀화한 길당이 해평에 정착하면서 시조가 되었으나 이후의 계보와 사적은 실전되었다. 고려조 성균 생원 길시우를 1세조로 삼았는데, 길재는 4세라고 한다. 해평 길씨는 30여 개 지파로 번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 등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번 전시 관련한 인쇄물은 리플렛 한 장이 다다. 소책자가 있나 싶어 확인하니 없다. 그게 이 전시회가 단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야은이 6백 년 전의 인물이든 천 년 전의 인물이든, 다시 그를 소환하는 게 익숙한 ‘충절’만으로는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한가위 전날에 들렀더니 전시회를 찾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빈 전시관을 지키던 문화해설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20여 분쯤 머물다 나오는데 초등학생인 듯한 아들을 데리고 젊은 아버지가 역사관을 소개하며 지나갔다. 그나마 부모의가 아이의 손을 잡고 들르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여길 찾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전시관 마당에서 바라본 하늘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 이번 전시회의 리플릿.

 

2022. 9.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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