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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햅쌀, 밥

by 낮달2018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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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의 통일 모. 이 모는 지금 논에서 한창 여물어가고 있을 터이다.

그저께 지난 5월 약정했던 ‘통일 쌀’을 받았다. 약속한 대로 햅쌀 1.5kg이다.

 

그새 수확하고 도정까지 끝냈는가 싶으면서도 집에 가져가니 아내가 반색한다. 햅쌀이지요? 아무렴. 한가윗날 아침밥은 이걸로 지어야겠네. 아, 그거 좋지……. 여자는 역시 세상의 모든 사물이 들어갈 자리와 나올 자리를 정확히 어림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통일 햅쌀 1.5kg

농민회에서 주관하는 ‘통일 쌀 짓기’ 사업에 따라 안동시 농민회가 ‘통일 모내기’를 한 게 지난 5월 18일이다. 안동시 송하동 ‘솔밤다리’(송야교)에서 봉정사로 들어가는 네거리 어귀의 이수갑 안동농민회장이 경작하는 논에서였다.

 

정작 나는 모를 내러 논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숯불 화덕에서 구워내는 돼지고기를 맛보며 기사를 쓴답시고 사진기만 들고 설레발을 쳤던 것 같다. 

 

참가자 2만 명을 목표로, 1회 1계좌 1만 원 모금사업 형식으로 꾸려가는 ‘통일 쌀 짓기’에 나는 약소하게 1계좌를 들었다. 수확한 쌀은 반은 신청자에게 햅쌀(1계좌 1.5kg)로 나눠주고, 나머지 반은 북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내 몫이 한가위를 앞두고 전달된 것이다. [관련 기사 : [기사] ‘통일 쌀’ 지어 북녘 동포·우리 집 밥상 함께 살리세]

 

벌써 추수하고 도정까지? 도심만 벗어나면 누렇게 펼쳐진 들판인데, 벼 베기조차 본 기억이 없는데……. 미심쩍어서 농민회에 알아봤더니 역시 그렇다. 한가위가 이른 데다가 수확이 늦어져서 일반벼를 수매·도정해서 신청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의 논에서 수확하는 것은 나중에 북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단다.

 

그러니 내가 받은 쌀은 우리가 심은 그 벼에서 나온 쌀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햅쌀의 뜻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 쌀은 조금 이르게 나오긴 했지만, ‘절반은 내 밥상을 지키고 절반은 북녘 동포와 나누는 소중한’ 쌀, 통일 햅쌀인 까닭이다.

▲ 통일 모내기(2008. 5. 18, 안동시 서후면) 사진은 백업과정에서 사라졌다. 사진은 2020년 통일쌀 경작지에서의 모내기 ⓒ한국농정신문

▲지금 익어가고 있는 벼 (2008. 9. 12)

시절이 하 수상하니 그런가. 한동안 관심을 모았던 북의 식량난과 대북 식량 지원 소식이 뜸하다. 최근 소식을 검색해 보니 통일부 김하중 장관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밝힌 게 고작이다. 김 장관은 대북 식량 지원 문제와 관련해 “북한에 틀림없이 식량 지원을 할 것”이라며 “그럴 준비도 하고 있다”고 했다고. 생뚱맞게 아직도 원칙을 천명하는 수준인 듯한 인상이 짙다.

 

정작 북한에 대한 긴급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는 WFP(세계식량계획)은 북한이 식량문제로 절박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조속한 지원을 약속해 줄 것을 각국에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한가윗날 아침의 햅쌀밥

세계식량계획은 한국 정부의 어정쩡한 행보가 딱했던지 한국이 WFP를 통해 북한을 지원할 경우 한국의 지원품임을 포장에 명기하고 지원한 때로부터 빠르면 수주일 안에 북한에 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WFP가 딱해 보일 정도라면 우리 입장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딱하다 못해 울화가 터질 노릇이다. WFP가 지난달 우리 정부에 요청한 대북 지원 규모는 최대 6,000만 달러인데 아직도 정부는 ‘검토’를 계속하고 있다니 더 할 말이 없다. WFP의 경고대로 아사자가 나오기 시작해서 지원을 결정하는 건 꼼짝없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지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참여정부의 통일부 장관을 지냈던 정세현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은 우리의 대북 식량 지원이 ‘북미 관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모멘텀(momentum: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거나 바꾸는 장면) 조성’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미국이 북한의 금년 식량난을 작년부터 예견해왔고 금년 초여름부터 내년까지 1년 동안 50만 톤 지원하기로 했고, 그 식량은 지금 약속대로 잘 가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북한이 불능화 중단 등 대미 압박 전술을 쓰는 상황에서도 식량 지원이 계속되고 있다”는 걸 주목하라고도 했다.[관련 기사 : 통미봉남 부담 줄었으니 뒷짐 지고 있자?”

 

▲통일 쌀에 붙은 스티커

그는 WFP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결국 북한의 식량 사정이 급박해졌다는 것이니 이를 국민에게 알리고 바삐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사자가 생기는 걸 막으려고 국제기구까지 발 벗고 나서는 판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원을 미루는 것은 자칫 사후약방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후약방문’ 격이 되어 버리는 것은 최악이다. 그건 지원은 지원대로 하고 비난은 비난대로 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념과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권과 이어진 이러한 인도적 문제를 외면하게 되면 국제적으로 우리 정부의 도덕성까지 치명타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정 전 장관의 생각이다.

 

지금 논에서 익어가고 있는 통일 쌀이 북으로 가는 11월 이전에, 가능하면 빨리 대북 지원은 시작되어야 한다. 최선, 혹은 차선의 선택으로 최악의 상황을 막는 슬기로운 선택이 정부가 추구해 마지않는 ‘실용’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인 것이다.

 

 

2008. 9. 12. 낮달

 

* 이 통일 쌀은 결과적으로 북으로 가지 못했다. [관련 글 : 길 잃은’ ‘통일쌀’, 길 찾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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