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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9월, 한가위 ‘달빛도 평등하게’

by 낮달2018 2022.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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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엔 가을 절기, 백로(8일)와 추분(23일)이 들어 있다. 백로(白露)는 말 그대로 ‘흰 이슬’이다. 더위가 물러난다는 처서(處暑) 다음 절기인 백로엔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등, 가을 기운이 뚜렷해진다.

 

이 무렵은 고된 여름 농사를 얼추 마치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여서 근친(覲親)을 가기도 한다. 시집간 딸이 시부모로부터 말미를 얻어 친정에 가서 어버이를 뵙는 근친은 봉건시대엔 명절, 부모의 생신, 제일(祭日)에만 허락되는 일이었다.

 

친정 어버이를 만나 뵙고 안부를 여쭙는 일로 가슴을 끓였을 며느리들에게 근친은 얼마나 가슴 벅찬 여정이었을까. ‘근친 길이 으뜸이고 화전길이 버금이다’라는 속담에는 며느리들의 눈물과 한숨이 흥건할 듯하다. 친가보다 처가 쪽과 내왕이 더 많은 요즘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겠지만.

 

마땅히 근친의 말미를 얻지 못한 경우엔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도 한다. 반나절쯤 회포를 풀고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 중로상봉(中路相逢), 즉 ‘반보기’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전근대의 풍경이다.

 

한가위(25일) 연휴는 토요일도 쉬는 이에게는 닷새가 넉넉하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다 비가 내리면서 한풀 꺾이긴 했는데, 아직 추수 소식은 이르다. 햇곡으로 천신(薦新)하는 이 전통적 명절에 햅쌀로 지은 밥과 떡을 차례상에 올리는 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의 과수원 . 2005 년 가을 .

이 핵가족 시대의 명절은 일가(一家)의 성쇠나 그 혈연적 연대를 가늠하게 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노마드(nomad)들도 이 명일에는 유목을 멈추고 그 ‘피의 둥지’로 귀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절은 소찬으로 이루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제의)’이면서 한편으론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여서 ‘피의 유대’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  보름달 .  지난  7 월 보름날 밤의 사진이다 .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는 고달픈 삶에 지친 이들의 소박한 소망이다. 생존에 골몰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왕조 시대나 이 밀레미엄의 세기나 다르지 않다. 한가위가 가까워지는데 여전히 이랜드의 노동자들은 투쟁을 계속하고 있고, KTX 여승무원들의 싸움도 끝나지 않았다.

 

오는 한가위가 보름달처럼 넉넉하게 묵은 갈등과 상처가 말끔하게 아무는 시간의 실마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가위의 만월과 그 넉넉한 달빛은 재벌그룹 회장의 저택뿐만 아니라 이랜드 여성 노동자의 가난한 식탁에도, 1년도 넘게 싸워 온 KTX 여승무원들의 지친 어깨 위에도 평등하게 비칠 터이니 말이다.

 

쇠귀 선생이 나직하게 뇌는 9월의 말씀은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아픔과 그 그림자까지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받아들이는 게 용기고 지혜라는 것이다. 아픔과 기쁨의 날줄과 씨줄, 그 교직(交織)이 삶일진대 무엇이 두려워서 우리는 눈을 감는 것일까.

 

고단한 삶의 장면 장면마다 팬 맨살의 아린 상처 위에서도 삶은 깊고 곧게 자라고, 늘 ‘모자람’과 ‘공백’ 위에서 우리의 사랑도 채워져 가는 것. 밤낮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계절의 분기점, 추분(秋分)을 기다리며 이 긴 여름의 문을 닫을 채비를 한다.

 

 

2007. 8. 3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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