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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멈출 수 없는 관습’이라고?

by 낮달2018 2022.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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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날 기시다 총리와 일본 각료들, 신사 참배와 공물 봉헌

▲ 일본 신도(神道)의 사원(寺院)인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 위키백과

77돌 광복절에 일본 기시다 총리는 야스쿠니에 공물을 바쳤다

 

다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가 언론에 소환되었다. 하필이면 광복절 77돌에 일본 신도(神道)의 사원(寺院)인 야스쿠니가 뉴스에 불려 나온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과의 협력을 말한 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차대전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바쳤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이에 대해 “일본 정부와 의회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또다시 공물료를 봉납하거나 참배를 되풀이한 데 대해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통령실의 입장은 좀 결이 달랐다. 대통령실은 야스쿠니 ‘공물 봉납’에 대해 일본 측이 사전 설명을 해왔다고 밝히고, 총리가 직접 가지는 않는 선에서 고민한 듯하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광복과 독립을 맞은 날이지만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날이라는 의미에서 일본 지도부가 매년 8·15마다 야스쿠니 신사에 어떤 식으로든 예를 표하는 게 멈출 수 없는 관습이 됐다”라고 밝혔다. 이에 일본의 우익 일간 <산케이>는 기시다 총리 공물 납부에 대해 “한국 고관도 일정한 이해를 보였다”고 보도했다.

 

‘깊은 실망과 유감’과 ‘일정한 이해’ 사이의 간극은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야스쿠니 신사가 “천황을 위해 전사한 군인을 ‘호국의 영령’으로 모시고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모범으로 삼아 최고의 영예를 부여하는 동시에 국민을 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개항(1854) 이후 봉건 권력인 막부파(幕府派)와 이에 천황을 앞세우고 이에 맞선 토막파(討幕派)의 대립 끝에 1869년 토막파가 내전에서 승리했다. 토막파는 내전에서 죽은 자기 세력을 위령하기 위해선 도쿄 초혼사(招魂社)를 세웠다. 1879년 군의 요청으로 도쿄 초혼사는 야스쿠니 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아시아 각지를 침략했고, 이 전쟁에서 죽은 일본 군인들을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며 신으로 추앙하며 야스쿠니 신사에서 제사를 지냈다.

 

국민을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이데올로기 장치, 천황제 파시즘을 강요한 군사시설

 

1945년까지 일본은 천황을 ‘살아 있는 신[현인신(現人神)]’으로 받들었다. 따라서 천황이 일으킨 전쟁은 ‘성전(聖戰)’이고, 성전에서 죽는 것도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는 명예로운 일이라고 교육하여 그런 죽음을 정당화했다. 전사자들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천황이 직접 참배하는 신사에 신으로 모셔진 것이다. 결국 야스쿠니 신사는 국민을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이데올로기 장치이며, 천황제 파시즘을 강요한 군사시설이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의 내전과 침략전쟁에서 죽은 246만 명이 ‘영령’으로 합사(合祀:둘 이상의 혼령을 한곳에 모아 제사를 지냄)돼 있지만, 이들에게 학살된 아시아 민중은 2천만 명이 넘는다.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 신도(神道)로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와 함께하면서 이를 정신적으로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

 

2차대전 뒤,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관은 천황제를 타파하여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천황을 ‘신’이 아닌 ‘인간’으로 선언하게 하고 국가종교시설인 야스쿠니 신사를 폐지하는 대신 민간종교시설로 만들었다. 그리고 평화헌법을 제정하여 전쟁을 금지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다.

 

이전의 지위를 잃고 종교법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독립을 지키고 아시아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고 미화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근현대사를 “전쟁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일본의 독립을 굳건히 지키고 평화로운 나라로 주변의 아시아 나라들과 함께 번영하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사의 전시관인 유슈칸(遊就館)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 독립’이라는 제목의 큰 지도가 걸려 있고 여기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일왕 히로히토(1934년) ⓒ 위키백과
▲ 야스쿠니 신사 앞에 도열해 있는 출정 군인들. 이들은 죽어도 여기로 돌아와 신이 된다고 교육받았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세계, 특히 아시아 사람들에게 독립의 꿈을 안겨주었고 많은 선각자가 독립, 근대화의 모범으로서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아시아 민족에게 독립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아시아의 독립이 실현된 것은 대동아전쟁 초반에 일본군에 의해 식민지 권력이 타도된 뒤였다. 일본군 점령하에서 한 번 타오른 불길은 일본이 패배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어 독립전쟁 등을 거쳐 민족국가가 차례로 탄생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침략전쟁이 아니라 식민지 해방을 위한 싸움, 즉 성전이라 주장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의 이러한 역사 인식은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반성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 견해인 1995년 무라야마 담화는 물론 평화헌법의 이념마저 부정하는 것이다. [관련 글:1993년 오늘, 고노담화 - ‘정의의 기억’, 그 행방을 묻는다]

 

이러한 야스쿠니 신사의 반역사적 인식은 일본의 재무장을 꿈꾸는 일본의 우경화에 경도된 아베 신조 등 일본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함께 세계적인 비판을 불러왔다.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일본 침략의 희생자인 주변국에 대한 무감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독일 총리가 히틀러 무덤(존재한다고 가정)을 참배한 후 네덜란드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네덜란드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 네덜란드 유력일간지 폴크스크란트(2014.1.29.), 이기철 주네덜란드 대사의 말을 인용하며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화해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독일이 국제사회에 다시 받아들여진 것은 과거를 똑바로 마주 봤기 때문이다. 일본도 주변국과 화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일본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2015.3.), 아베 정부에 대한 충고

 

야스쿠니 신사가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와 다른 점

▲ 야스쿠니 신사의 전시관인 유슈칸(遊就館) 내부. 전쟁 때 쓰인 각종 무기, 항공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위키백과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당시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전몰자를 추모하기 위한 방문이었다고 정당화하면서 야스쿠니 신사가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같은 시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거짓이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종교시설인 야스쿠니 신사와 달리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시설이 아니며, 더구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지 않다. 또, 알링턴 묘지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희생자의 안장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족 의사를 존중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유족의 의견을 전혀 묻지 않는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985년 5월, 나치 55친위대 대원도 매장된 독일 비트부르크 묘지를 참배했다가 미국 의회는 물론 유럽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국가 지도자가 전범이 포함된 시설을 방문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국제사회의 상식은 일본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야스쿠니 신사 합사자 246만 명 가운데 99%는 중일전쟁 이후 침략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과 군속(軍屬군무원)이다. 그리고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을 주도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거나 판결 전에 사망한 A급 전범 14명과 BC급 전범, 그리고 네덜란드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민간인 업자까지 포함되어 있다.

 

전사한 한국인 2만1천 명도 야스쿠니에 합사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제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희생된 한국인 21,000명과 대만인 28,000명도 합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1937년 중일전쟁 이래 일제는 지원병제(1938), 징병제(1944)를 시행하여 모두 40만이 넘는 조선 청년을 군과 군속으로 침략전쟁에 동원했다. 이 중 일본 정부가 사망을 인정한 한국인 21,000여 명이 합사된 것이다.

▲ 야스쿠니 신사 무단 합사 철폐 2차 소송 원고단 신사 항의 방문(2013년) ⓒ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해방 뒤, 이 사망자들은 한국 국적을 회복하였으나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는 1959년 4, 7, 10월 한국 정부나 한국인 유족에게 알리거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이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임의로 합사하였다. ‘전사 시엔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를 내세웠는데, 생존해 있는 이를 확인하지 않고 합사해 버려 산 사람을 죽은 사람 취급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강제로 일제에 끌려가 총알받이로 개죽음을 당한 것도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다. 그런데 죽은 후에도 천황과 일본의 충신이었다며 기려지는 것이니, 유족들로서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기독교인이라면 부모 형제를 신으로 모신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죽음은 물론 야스쿠니 신사 합사 사실도 전혀 알리지 않았다.

 

유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대에 전후 보상 운동을 하면서였다. 가족의 생사도 모르고 있다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제공한 강제 동원 명부에서 합사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분노한 유족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가족의 이름을 당장 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는 한 번 이름을 올리면 신이 되어 뺄 수 없다는 비상식적인 교리를 내세워 유족의 요구를 거부했다.

 

유족에게 알리지 않고 합사, 일본 사법부는 유족의 합사 취소 소송 패소

▲ 2021년 10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했다.
▲ 과거 일본군 군복을 입은 이들이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종전(패전) 기념일인 2019년 8월15일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고 있다.

이에 유족들은 2001년, 2007년, 2013년 세 번이나 일본 법원에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묻고 이름을 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한국인 유족들의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추도시설이 유족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기 교리를 내세워 합사자는 물론, 유족의 권리와 인격을 침해하는 처사다. 국제사회의 상식적인 규범조차 부정하는 이러한 일본 사법부의 판결은 일본이 전후 80년이 가까워지는데도 여전히 동아시아의 이웃 나라로부터 지탄받는 이유다.

 

한일관계뿐 아니라,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은 아시아 여러 나라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야스쿠니 신사의 이러한 역사적 원죄 탓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단순히 일본이라는 국가의 단순 추도시설이 아니라, 침략전쟁에 참여한 전쟁범죄자를 저들 고유의 신도로 추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일본 정부와 일본 사회가 과거 일본의 침략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하려 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제기하면서, 굳이 전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환기하는 것은 비참한 전쟁을 다시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인데, 우리나라가 식민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광복 77돌 기념일에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바쳤다. 이에 대해서 ‘일본 지도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어떤 식으로든 예를 표하는 게 멈출 수 없는 관습이 되고 있다’며 ‘일정한 이해를 보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이 관습? 그건 “나치를 이해하자”와 같은 이야기

 

대통령은 일본에 진심 어린 반성이나 사과 요구 없이 일본을 힘을 합쳐나갈 이웃이라고 말했고, 대통령실은 일본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2차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 입장에서 멈출 수 없는 관습이라고 말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광복절 경축사인데도 강제징용, 위안부 등 과거사 현안에 대한 언급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고 비판했고, 귀화 한국인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이 친일로 선회하고 있다고 인식될 것이라고 했다.  호사카 교수는 ‘야스쿠니 참배는 관습’ 발언을 두고 “나치를 이해하자. 그거하고 똑같은 이야기”라며 “이해하면 안 된다. 일본 국민들 중에서도 이해 안 하는 사람이 거의 70%, 80%인데, 그런 식으로 하면 절대 안 되는 그 발언을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관련 기사 : 야스쿠니 참배 관습이라 한 대통령실 입장에 나치 이해하자는 얘기

 

취임 백일을 맞는 윤석열 정부의 국민 눈높이와 동떨어진 한일관계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주권자들이 의심을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사과라는 전제 없이 어떤 방식으로 한일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백일 만에 ‘부동산을 안정시켰다’는 ‘마법’이 일본에도 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2022. 8. 19. 낮달

 

* 이 글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에서 발행한 소책자 <야스쿠니 신사 무엇이 문제인가>를 참고하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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