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두 차례만 야구장에 가본 유사 팬이 바라본 프로야구
월요일이다. 한 주일이 시작되는 날이지만 월요일을 ‘프로야구 경기가 없는 날’로 기억하는 이들도 적잖을 터다. 특별한 계획이 없는 한, 주중에도 야구 중계의 ‘본방을 사수’해 온 내게도 월요일은 그렇게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월요일은 그래서 아내에게 채널의 선택권이 온전히 귀속되는 날이 된다.
프로야구 시즌의 ‘본방 사수’
퇴근하기 바쁘게 내가 TV 채널을 선점해 버리는 프로야구 시즌이 오면 아내와 딸애는 이구동성으로 ‘저놈의 징한 야구……’를 되뇌면서 선선히 건넌방으로 옮겨간다. 한 주일 내내 채널을 독점하는 것은 가장으로서 할 짓이 아닌지라 한 사나흘쯤은 내가 건넌방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채널 선택권의 향방이 가정에서의 권력 판도를 시사해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 시즌 중에 채널을 고정하는 ‘간 큰 남편’은 드물지 않은 모양이다. 채널 선택권을 다투지 않고 가족들이 함께 야구 경기를 시청할 수 있다면 그건 최상의 그림이다. 그러나 여자들에게 야구 경기를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
월드컵이나 한국시리즈 같은 큰 경기는 군소리 없이 중계를 시청하곤 했지만, 여자들에게 페넌트레이스를 지켜보자고 하는 건 과욕이다. 그나마 대중화된 축구에 비기면 훨씬 경기규칙이 복잡한 야구를 이해시키는 건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의 프로야구 경기는 집에 다니러 온 아들 녀석과 함께 중계방송을 시청했다. 혼자서 맥없이 중얼대기만 하면서 중계방송을 보는 것보단 경기의 전망이나 야구 일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보는 게 훨씬 맛깔스럽다. 사내아이의 유용성(?)은 기실 이런 데 있다고 해도 좋겠다.
우리는 타석에 선 선수들의 경기력이나 개인적 이력, 출신 학교나 이적 사항 등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수들의 이름도 번번이 까먹곤 하는 내게 비기면 아직 기억력이 생생한 아이는 어디서 읽었는지 흥미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메이저 리그 통산 타율 1위인 타이 콥이 인종차별주의자였다던가, 해설자들이 흔히 말하는 투구의 초속·종속이라는 개념이 실체가 없는, 단지 공이 빠르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것 등이 녀석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야구를 아이보다 훨씬 오래 봐 왔다는 게 아이와의 차이일 뿐, 야구를 보는 내 눈이 아이보다 높은 것 같지는 않은 것이다.
아이는 축구광이었다. 유럽 축구의 중요 경기를 새벽에 일어나 볼 만큼 축구에 빠져 있던 아이는 요즘은 좀 시들해진 듯하다. 그러나 육상경기 중계도 챙겨 보는 아이니, 스포츠에 대한 녀석의 선호는 알아줄 만하다. 어릴 적에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내 어깨 너머로 야구에 입문한 녀석은 스스로 룰을 깨치고 이젠 야구를 즐기고 있는 듯 보인다.
프로야구 붐이 예사롭지 않다. 8월 14일 열린 네 경기에 총 6만여 명이 관객이 입장함으로써 382경기 만에 올 시즌 총 관객이 5백만 명을 넘겼다 한다. 이는 지난해 446경기 만에 5백만 관객 돌파 기록을 무려 64경기나 앞당긴 것이다. 2008년 이후 4년 연속 500만 관객 달성 기록도 세웠으니 사상 첫 6백만 관객도 멀지 않아 보인다.
<한겨레 21> 873호(8.15.)에는 “초보 ‘야빠’의 야구 입문기”가 실렸다. 야구에 무관심했던 안인용 기자(나는 30대 후반쯤의 남기자로 짐작했는데 웬걸 여기자다.)가 ‘본방 사수’ 팬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기사는 현재의 프로야구 붐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뒤 자신이 야구광인 남자친구 덕분에 ‘야빠’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시골 소년의 야구 입문기
야구 중계를 보면 관중들 가운데 여성들이 꽤 는 것은 사실이다. 개중에는 응원하는 구단의 유니폼까지 맞춰 입고 원정경기까지 따라온 광팬들도 있으니 격세지감이 있다. 예전에도 남자친구나 남편을 따라 야구장에 온 여성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온전히 야구를 즐기러 온 이들로 보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요즘은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나 싶다. ‘거름 지고 친구 따라 장에 따라갈’ 만큼 실속 없는 여성들이 어디 있기나 할까 싶기 때문이다.
내가 야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진학하고 나서였다. 대구는 이른바 ‘구도(球都)’라 불릴 만큼 야구가 성한 곳이었다. 전기 입시에 실패한 내가 입학한 후기 중학교의 교기가 야구였다. 그 학교는 크고 작은 경기를 석권한 끝에 전국을 제패하기까지 했던 이른바 야구 명문교였다.
그러나 시골에서 자란 나는 야구를 잘 알지 못했다. TV는커녕 라디오조차 귀했던 시절이라 시골아이들이 간접적으로라도 야구를 접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때였으니 말이다. 내가 아는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쯤에 아이들과 즐긴 ‘야구산이’라는 이름의, 야구공과 배트 대신 물렁 공과 주먹을 이용한 간이야구뿐이었다.
도회의 똑똑한 아이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나는 야구를 혼자서 깨쳤다. 참고할 자료도 변변치 않았다. 이름이 ‘칠성’인 체육 교사가 펴낸 체육 교재의 ‘소프트볼’ 항목에서 대충 야구를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 시간마다 아이들을 불러내 책 사기를 강권하던 그 교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 책을 산 건 그런 필요 때문이었다.
정규수업을 마치고 하교할 때쯤이면 오전 수업을 마친 야구부 선수(그 시절만 해도 운동선수들은 오전 수업에 참여했다.)들이 운동장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운동장 한쪽에 있던 이른바 ‘빠구넷(backnet)’ 주변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그들 가운데 나중에 삼성 라이온즈의 간판 투수가 된 황규봉 선수도 있었다. 그는 우리 2년 선배, 내가 1학년일 때 3학년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야구선수가 내 짝꿍이었다. 동기 가운데는 ‘이동수’라는 투수가 있었는데 그는 중학교 야구 최초로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선수였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 짝꿍은 물론이거니와 이동수의 이름을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 그들은 뒤에 야구로 성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고등학교도 야구가 교기인 학교로 진학했다. 야구 명문 근처에는 이르지 못한 늘 그만그만한 성적에 그치는 학교였다. 당시 선수들 가운데 나중에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권영호, 박승호, 허규옥, 장태수 등이 있었다. 권영호는 선배, 박승호는 동기, 허규옥과 장태수는 후배였다.
고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야구와 멀어졌다. 고교야구란 게 고작 청룡기니 봉황기니 하는 대회 위주로 반짝, 매체를 타던 시절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의 출범을 나는 복학생들과 함께 삐딱하게 흘겨보면서 맞았다. 프로야구 출범은 신군부 집권 후 편 일련의 선심성 정책이었던 까닭이었다. 뒤에 이들의 ‘우민화 정책’은 이른바 ‘3S정책’으로 정리되었다.
적어도 거의 날마다 야구 경기가 열린다는 것은 고교야구에 목을 매고 있던 야구 매니아들에겐 분명 단비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신군부의 음흉한 의도를 비난하는 척했지만, 기실은 날마다 들려오는 야구 경기 소식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공중파밖에 없던 시절이라 경기장을 찾지 못하는 야구 광(狂)팬들은 주말의 TV 중계방송에 매달려야 했다. 그나마 주중 경기는 TV가 아닌 라디오 중계에 의존해야 했다. 광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는 이태 뒤 한 여학교에 부임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일제 전자시계에 딸린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곤 했던 걸 기억한다.
1980년대 초반은 신군부 집권기, 정치 사회적 억압이 일상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공포정치가 자행되던 어두운 시대, 프로야구는 젊은이들의 절망과 출구 없는 분노를 일정하게 녹여내지 않았나 싶다. 호남사람들이 가슴 깊이 담고 있던 80년 광주항쟁의 한과 상처도 광주를 연고지로 삼은 해태 타이거즈팀의 선전으로 얼마간 달랠 수 있었던 듯하다.
80년대의 프로야구 붐은 이현세의 성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1983)으로 압축되거니와 나는 정작 이현세의 만화보다는 그보다 앞선 이상무의 청소년 만화 <아홉 개의 빨간 모자>(1980)에 더 이끌린다. 이상무가 그려내는 독고탁의 저항과 처절한 승부를 다룬 이 만화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만화로서는 드물게 이 작품이 비극적 결말로 맺는 것도 그 극적 성격을 더해 주는 데 과부족이 없었다.
야구팬을 자처했지만 나는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리던 프로야구 경기를 딱 두 번밖에 관람하지 못했다. 한번은 졸업을 앞둔 어느 가을날 친구와 함께였고, 한번은 어린 딸애를 데리고서였다. 이미 25년도 전의 일이다. 이후 나는 언제나 TV 중계로만 야구를 즐기는 어정쩡한 팬으로 남았다.
프로야구의 ‘연고지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지역 사람들을 프로야구팀에 묶어버린다. 프로야구 출범 때만 해도 삼성은 오늘날의 공룡 기업은 아니었다. 대구 경북을 연고지로 창단된 삼성 라이온즈는 프로야구사에 남을 만한 쟁쟁한 선수들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지역민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즐기는 야구와 ‘우민화 정책’ 사이
2000년대 들면서 삼성은 몇 차례 우승하며 지역민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해태 타이거즈 출신의 김응용, 선동렬 감독 체제를 거쳐 지역 스타 플레이어였던 류중일 감독이 이끌게 된 2011년의 삼성은 꽤 단단해 보인다. 삼성 라이온즈가 올 한국시리즈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라는 걸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80년대에 프로야구란 결국 군부 독재정권이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는 당근에 불과한 지나지 않느냐는 주변의 힐난에 대해 나는 입맛을 다셨을 뿐이다. “그래, 그건 동의해. 그래서 그걸 즐기는 것도 안 돼?”하고 말이다. 그 시절, 내 주변에는 무심히 프로야구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2011년 현재, 원년부터 습관적으로 응원해 온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의 모기업 ‘삼성’은 예전의 그 삼성이 아니다. 어느새 이 재벌 기업집단은 우리 사회의 유일무이한 ‘권력’으로 자랐다. 1등 기업 삼성은 휴먼테크를 표방하면서 노동조합을 용인하지 않는 시대착오적 노동조합관의 성채요, 교묘하고 비인간적인 노동자 탄압을 자행하는 가장 ‘나쁜 기업’의 표본이 되었다.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면서 때때로 이르는 불편한 감정의 진원지는 바로 여기다. 어떤 이론으로도 재벌 이건희와 기업집단 삼성과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프로야구를 즐기면서 프로야구단과 그 모기업의 연관성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긴 그게 어찌 삼성만의 문제이겠는가만.)
<한겨레>의 안인용 기자는 프로야구에 입문하면서 느낀 ‘스트레스’를 이야기한다. 프로야구를 30년 동안 지켜보아 온 그녀의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계속 보다 보면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라고 말이다.
한때 내게도 경기를 지켜보는 게 스트레스였던 적이 아주 많았다. 턱도 없이 지거나 어이없이 점수를 내 줄 때 흥분하고 욕지거리를 내지르는 형식으로 반응하던.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나는 이기면 이기는 대로 즐거워하고, 지면 지는 대로 조금 아쉬워하고 이내 잊어버릴 뿐이다.
그것은 안 기자의 남편처럼 포기하거나 체념해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즉 내가 응원하는 팀의 승패가 스트레스의 형식으로 다가오기 전에 나는 그 연결선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숱한 시간이 필요했다.
프로야구의 ‘드라마’와 인생
지난 여름방학 동안에는 거의 빼먹지 않고 중계방송을 보았다. 경기의 승패도 재미있지만, 야구는 다른 구기에서 찾을 수 없는 ‘잔재미’를 제공해 준다. 선수 주변의 후일담을 다루는 뉴스도 흥미롭다. 트레이드를 전후한 선수들의 인간적 반응도 꽤 울림이 깊다. 최근 엘지에서 넥센으로 트레이드된 투수 심수창과 타자 박병호의 변신을 매우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트레이드 후 삼성과의 첫 경기에서 심수창이 3점을 내 주고 18게임 연패 기록을 달성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나는 심수창의 연패를 끊을 수 있다면 삼성이 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흔들렸고 삼성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나는 그가 다음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심수창은 그다음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잣대로 다른 구단의 경기를 바라본다. 나는 한화나 넥센을 응원한다. 단지 그 팀들이 승수보다 패수가 더 많은 하위 팀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 끔찍한 패전을 일상으로 견뎌야 하는 감독과 선수들에게 나는 경의를 보낸다.
패배를 견뎌내는 것은 인간의 자존을 할퀴는 패배를 넘는 일이기 때문이다. 패배를 승리보다 더 많이 먹고 자라는 하위 팀들의 일상은 그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수행이며 그걸 통해서 그들은 인간적으로 성숙해가는 것이다.
안인용 기자는 ‘어제는 인간승리 드라마, 오늘은 납량특집’인데 어찌 야구를 매일 보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 야구는 인간승리의 드라마고, 한여름 밤을 서늘하게 만들어주는 납량특집이다. 숱한 드라마를 써내며 프로야구는 서른 살 장년에 들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구장 문제, 선수 노조 문제, 적자 극복 문제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한 얼치기 팬을 20대 청년에서 50대의 중년으로 자라게 한 프로야구 30년은 그것 자체로도 따뜻한 한 편의 드라마다. 승리와 패배는 늘 삶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고, 선수들뿐 아니라 팬도 그것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하긴 인생에서 드라마가 아닌 것들이 어디 있으랴.
2011. 8. 21. 낮달
덧붙임 : 오늘 온라인에서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읽었다. 그는 1956년생, 나와 동갑이다. 글쎄, 학연은 없지만, 갑장(甲長)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묘한 동류의식을 느낀다.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에 삼성에 입단한 그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프로야구계의 전설이다. 그가 하루바삐 병마를 이기고 팬들에게 돌아오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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