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시국선언, ‘여럿이 입을 모아 외치는 말’의 힘

by 낮달2018 2022. 8. 22.
728x90

국어사전은 ‘시국(時局)’을 ‘현재 당면한 국내 및 국제 정세나 대세’라 풀이한다. 그러면 ‘시국선언’은 그런 정세나 대세에 대해서 사람들이 ‘자기의 방침, 의견, 주장 따위를 외부에 정식으로 표명’하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시국선언’이 잇따른 사회는 건강한가

 

‘함포고복’하고 ‘격양가’를 부르는 태평성대라면 굳이 ‘시국’이나 ‘선언’이 필요하지 않을 터이니 이 ‘시국에 관한 의견과 주장’이 조직되고 선언되는 사회는 그리 안정적인 세상이라고 보긴 어렵겠다. 가까운 우리 현대사에 명멸했던 ‘시국선언’ 열풍은 우리 사회가 거쳐야 했던 역동적 변화의 흔적이었으니 말이다.

 

현 정부 들면서 한동안 잠자던 ‘시국선언’이 줄을 이었던 것은 이명박 정부가 표방, 시행한 국가 운영의 방향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멀리는 ‘촛불 정국’을 달구었던 시국선언이, 가까이는 ‘4대강’과 관련된 시민사회단체와 지식인들의 의견 표명을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일 봉은사에서 ‘생명의 강 살리기 문화예술인 1550인 시국선언 및 기자회견’(이하 ‘선언’)이 열렸다. 이 선언은 건축, 만화, 무용, 어린이책, 문학, 음악, 전통예술, 출판계의 문화예술인들의 자발적 서명과 참여로 이루어진, ‘4대강 사업’에 대한 적극적 입장 표명이었다.

 

한국작가회의는 4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지는 강줄기의 길이 1550km를 상징하는 의미로 1550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여기에 적극 호응,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김명곤, 영화감독 정지영·임순례, 만화가 박재동, 시인 도종환·안도현 등 1882명이 서명에 참여한 것이다.

 

문화예술인, ‘세상과 삶을 노래하는’ 이들

 

문화예술인을 ‘딴따라’라 부르는 전근대적 인식은 이 ‘개명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듯하다. 문화예술을 ‘가외’의 영역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뜻밖에 뿌리 깊다. 그것은 문화예술을 ‘삶의 표현’이 아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삶의 여흥’으로만 인식해 온 까닭인 듯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인간의 고단한 삶의 긴장을 풀어주는 ‘여흥’으로 기능했다고 하더라도 ‘삶의 표현’으로서의 문화예술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음악·미술·만화든 연극·영화·무용이든 세상과 삶을 그렸다는 점에선 그것은 한 시대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의견 표명인 까닭이다.

 

따라서 문화예술인들의 시국선언은 자신들이 작품을 통해서 언명해 온 것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며 적극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의 표명이다. ‘딴따라들이 무슨……’이라는 세간의 반응은 앞서 말한 것처럼 뿌리 깊은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다.

 

 

생각보다 짧은 이들의 시국선언문 ‘강은 강처럼 흐르게 하라’를 읽으며 나는 ‘4대강 사업’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길이 여느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리 매우 섬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들은 ‘풀잎의 조그만 움직임에서 우주의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생명의 강 살리기 문화예술인 1550인 시국선언’

 

이들의 눈길에 잡힌 ‘단양쑥부쟁이, 꾸구리, 맹꽁이, 청둥오리, 쇠오리, 고니, 원앙, 수리부엉이’는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이고 생명 그 자체다. 그것은 풀꽃인지 물고기인지 새인지를 구분하지 않는, ‘온 강산’에 깃든 생명일 뿐이다. 그리고 포클레인의 삽날이 그 자연과 생명을 ‘파괴와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종국에는 인간들조차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이들은 진단한다.

 

‘녹색성장’도 ‘4대강 살리기’도 ‘생태공원’이라는 구호는 ‘화려한 수사’일 뿐, 그것은 ‘죽음의 현장’이라고 이들은 규정한다. ‘무지한 기교는 끔찍한 무기보다 위험하다’. 이들은 ‘생명의 강’을 ‘살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죽음의 현장’을 ‘생명의 약동 공간’으로 만들고, ‘파괴적 개발’에 맞서 ‘생명 공존의 질서’를 유지하며, ‘고여서 썩기를 거부하고 구불구불 강과 함께 흐르는 정신’이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강은 강처럼 흐르게 하라. 우리도 강을 따라 상생의 바다로 나아갈 것’이라고 천명한다. 파괴하고 개발할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합일과 공존의 동반자’로서의 자연에 대한 예술가들의 고백인 셈이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가녀린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킬 ‘태풍’을 경고한다. 한반도 남녘에 불어올 이 반생명의 사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좌시할 수 없다며 정부에 ‘4대강 사업의 중지’를 촉구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이름자를 거기에 깨알같이 적었다. 그것은 문화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지위와 전인격을 거는 행위일 것이다.

 

‘반생명’에 대해 저항하고 ‘생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선언은 신의 주재하는 창조의 질서를 고백하는 사제의 그것과 닮았다. 인간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두 시선은 신에 대한 신앙의 문제에서 갈릴 뿐 그 궁극의 지향점은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양수리  4 대강 시국미사의 나무 십자가

‘여럿이 입 모아 외치는 말’의 힘

 

‘시국선언’은 위력적인 다중의 힘을 빌려 의사를 표명하는 집회나 시위와는 다르다. 그것은 참여 과정에서 일정한 행동을 요구하는 집회·시위와 달리 어떤 태도에 대한 적극적 동감을 표현함으로써 성립하는 행위다. 그것은 대상에 대해 어떤 물리적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단지 ‘말’일 뿐이다.

 

그러나 ‘말’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어떤 문제에 대한 태도나 주장을 강하게 담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의 어떤 행동을 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에 신민과 임금 사이의 의사소통 방식의 하나였던 ‘상소(上疏)’가 그랬듯 그것은 소수의 사람이 권력과 사회에 대해 던지는 ‘요구’다.

 

시국선언의 말은 ‘혼잣말’과는 달리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외치는 말이다. 집회와 시위에서 말하는 ‘다중의 위력’과는 다르지만 역시 ‘여럿의 힘’은 시국선언에서도 요긴해 보인다. ‘여럿이 외치는 말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옛 노래가 있다. 수로왕 강림 설화에 보이는 ‘구지가(龜旨歌)’가 그렇고 그 아류작인 ‘해가(海歌)’가 그렇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록이다.

 

신라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할 때, 바닷가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었다. 문득 바다의 용왕이 나타나 순정공의 부인인 수로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가 버렸다. 공은 땅에 넘어져 아무런 계책이 없었는데, 한 노인이 있어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의 말에 뭇입은 무쇠도 녹인다 했으니, 이제 속의 짐승이 어찌 많은 사람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인근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써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은 이렇게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 얼마나 크냐.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헌)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이 설화 속의 노래가 발휘하는 주술적 힘은 ‘뭇 입은 무쇠도 녹인다’는 믿음에서 비롯한다. ‘구지가’가 구간이 땅을 파면서 불리었듯 이 노래도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서 불린다. ‘뭇입’은 ‘집단의 소망’이며 ‘여론’의 뜻을 지닌다. 그리고 그 여럿이 부르는 노래의 힘은 초월적 힘인 ‘해룡’조차 굴복시키는 것이다.

 

물론 시방은 주술적 무가가 불리던 고대가 아니다. 그러나 ‘뭇입이 무쇠도 녹인다’는 진실은 이 21세기에도 다르지 않다. 아니 다르지 않아야 한다. 저 주술의 시대에도 진실의 힘을 지녔듯 오늘날 이 ‘집단적 소망’과 여론은 마땅히 ‘말길’을 찾아서 돌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순리’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 1882명이 참여한 ‘생명의 강 살리기 문화예술인 1550인 시국선언’ ‘강은 강처럼 흘러야 한다’는 그런 순리의 표현이다. 동시대인들의 ‘생명’과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절박한 ‘호소’다. 그것은 개인의 이해가 아니라 한 사회의 존속과 미래에 대한 ‘집단의 우려’다.

 

이 21세기가 ‘구지가’와 ‘해가’의 시대보다 훨씬 더 문명한 사회라면 저 ‘뭇입’의 외침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지금 4대강에서 속도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의 강’에 대한 ‘살해의 위협’은 멈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강은 강처럼 흘러야 한다.’

 

 

2010. 8. 22.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