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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도시락 배달길

by 낮달2018 202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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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복지관에서의 자원 봉사 이야기

▲서후면 성곡리 입구의 도라지꽃. 작년에 찍은 사진이다.

점심을 먹고 한 시간 남짓, 도시락을 배달하고 돌아왔다.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반주일치 반찬이 든 찬합이 셋. 그게 내가 배달해야 할 도시락이다. 함께 든 쪽지에는 그동안 죽 맡아 도시락을 가져다준 여자아이 이름 밑에 낯선 이름 둘이 더 있다. 새로 도시락을 받을 아인데 자매인 모양이다. 이번 방학은 거저 같다. 해마다 4∼5주가량 활동하는데 이번엔 2주만 수고해 달라는 복지관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 오늘 배달한 도시락 바구니 . 하나는 회수한 빈 통이다 .

시 복지관에서 시행하는 결식 학생 도시락 배달에 참여하게 된 건 2004년 여름방학 때부터였으니, 햇수로는 4년째, 어느새 일곱 번째 방학을 맞은 것이다. 그때는 1년간의 조합 전임활동을 마치고 복직한 뒤, 처음 맞는 여름방학이었다.

 

십수 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었고, 나는 엔간히 지쳐 있었다. 모처럼 넘치는 시간 속에 던져진 셈이었는데 그때, 한겨레에 묻어 들어온 자원봉사자 모집 전단을 보고 주저하지 않고 나는 신청서를 썼었다.

 

첫해는 버겁게 두 개 지역을 맡았다가 땀을 좋이 흘려야 했다. 주 2회씩, 열 명 정도의 학생 집에다 반주일치 밑반찬을 배달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시 외곽의 시골길을 제대로 익히긴 했지만, 그건 사실 만만찮은 일거리였다. 그 해 연말에, 복지관의 청탁을 받고 고사 끝에 쓴 글에서 나는 내가 한 일의 의미를 그렇게 짚었던 것 같다.

▲ 첫해 ,복지관 소식지에 실린 글이다 . 힘을 빼고 쓴다고 쓴 글인데 어떨지는 모르겠다 .

그리고 세 해를 넘겼건만, 이 일을 바라보는 내 생각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봉사’라고 이름 붙이는 데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시간과 여유(이를테면 자기 차량이 있다는 정도의)를 유용하게 쓴다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무슨 ‘사명감’ 따위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이 일이 주는 ‘보람’이나 ‘성취감’에 대한 자각도 따로 없다. 나는 ‘기쁨이나 보람’ 때문이 아니라, 이 조그만 도시에는 이 일에 동참하는 자원봉사 자원이 많지 않다는 사실과 집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기보다는 저들의 일손을 덜어주는 것이 훨씬 ‘쓸모 있다’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위의 글에도 썼듯, 도시락을 받는 아이들도 자신이 ‘수혜자’라는 걸 크게 의식하지 않을뿐더러(내가 가장 안심하고 기꺼워하는 부분이다.) 배달꾼에게 의례적인 인사 이외의 정도를 넘는 감사를 표시하는 일도 없다.

▲ 오며 가며 길가의 들꽃들을 만나는 것도 계산이 안 되는 즐거움이다 .

처음에는 아이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닐 뿐 아니라, 일에 쫓겨 그럴 만한 짬도 없었다. 이내 나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배달꾼의 역할에 만족하기로 했고 거기에 최선을 다했다.

 

4년이라면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고, 더러는 졸업도 하게 되는 시간이다. 이듬해부터 한 지역만 맡아 다섯 아이의 집을 다녔는데, 그중 셋은 고교를 졸업해, 이태 동안은 두 아이 집만 다녀도 되었다. 매주 화요일, 이른 점심을 먹고 복지관에 들러 도시락을 싣고 가 아이들 집에 배달하고 빈 찬통을 받아 복지관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두세 시간쯤인데, 오늘은 그보다 훨씬 덜 걸렸다. 두 마을이 이웃이었던 게다.

 

한 단과대학 부근의 외진 동네에 사는 여자아이는 모처럼 집에 있었다. 그새 키가 훌쩍 컸는데 내가 “가만있어 봐, 몇 학년이지?”하고 물었더니 아주 의젓하게 ‘고1’이라고 답하며 쌩긋 웃었다. 넓적다리 아래를 절단한 장애인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첫해부터 만난 아이지만, 나는 구태여 담당 복지사에게 그 애의 상황을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물론 없다. 시골에 다니면 어머니나 양친 모두 없는 아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새로 만난 아이는 집을 몰라 전화를 걸었더니, 마을 회관 앞의 구석진 낡은 기와집에서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여자애의 새카맣게 탄 얼굴은 건강해 보였다. 언니는 보이지 않았고, 늙수그레한 할머니가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집을 나갔다.

 

나는 따로 아이들의 사정을 묻지 않았다. 빈 찬통 세 개를 받아 나오면서 다음 주에 오마고 말했을 뿐이다. 정 궁금하면 담당 복지사에게 알아보면 되는 일. 자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게고,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며 곧 새카맣게 탄 얼굴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조금씩 모양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 성곡리의 봉림사지 삼층석탑 . (경북 문화재자료 69 호) 높이 3.35m 로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탑이다 .

걸리는 시간과 거리를 짚어 보리라고 생각했지만 잊어버렸다. 내가 쓰는 시간과 휘발유는 배달을 돌면서 꽃과 나무, 숲과 마을을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이 충분히 상쇄해 주고도 남는다. 구역이 달라져 가 보지 못하는 서후면 성곡리 어귀의 도라지밭에는 지금쯤 도라지꽃이 한창이겠다. 지난겨울에 들렀던 봉림사지(鳳林寺址) 삼층석탑을 다시 만나려면 일부러 짬을 내야 할 것 같고…….

 

 

2007. 8. 7. 낮달

 


이 글을 올리고 나서 담당 복지사와 통화를 했다. 예상대로다. 두 집 아이들 모두 어머니는 가출했고, 장애인 아버지와 살고 있다고 한다. 자매는 아직 초등학교 5, 6학년. 아버지는 최근 지병으로 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 처음 수급 대상이 된 것이다. 고맙다며 집을 나서던 할머니는 이웃집에 사는데 아이들을 늘 챙겨 주시는 분이라고 한다. 세상엔 그래도 선한 이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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