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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비 갠 오후, 고추밭에서

by 낮달2018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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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의 고추밭에서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박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 여물어 가는 농작물이 주는 기쁨만큼 순수한 것은 없다 .

올 장마는 끈질기다. 6월 중순께부터 시작한 이 우기는 7월 말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아퀴를 지으려는 듯하다.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를 강타한 수해는 이 땅과 사람들에게 유례없이 깊은 상처를 남겼다. 뻘 속에 잠겨 있거나 지붕 언저리만 흔적으로 남은 참혹한 삶터에서 담배를 태우거나 소주잔을 들이켜고 있는 촌로들의 스산한 표정 앞에서 수해와 무관한 도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스럽기 짝이 없다.

 

그예 장마가 끝날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집을 나섰고, 모처럼 펼쳐지는 파랗게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딸애는 탄성을 질렀다. 입대 후, 이제 갓 1년을 남긴 아들 녀석의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웬걸, 끝났다던 장마의 마무린지 무서운 기세로 폭우가 쏟아졌다.

 

처가에 들어가는 길에 장모님의 고추밭에 들렀다. 비가 그치고 나자 후텁지근한 더위가 연무처럼 밭 주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들깻잎과 삭혀서 쌈으로 먹기 위해 연한 콩잎을 실하게 따고 있는데, 장모님이 나오셨다.

 

일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일손을 놓을 수 없는 안노인은 더위에 잔뜩 지쳐 보였다. 달리 도울 방도도 없으면서도 들를 때마다 채소며 곡식 등을 가득 싣고 떠나는 딸과 사위는 그저 땅의 과실들을 노략질하는 ‘도적’일 뿐이다.

▲ 비닐하우스 바깥쪽에서 호박 한 덩이가 익어가고 있다 .

지난해와 같이 두 동의 하우스 지붕에 호박과 박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올핸 다른 집과 달리, 호박이 아주 실하게 잘 달렸다며 안노인은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뿌린 씨앗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실하게 그 열매를 맺는 때가 농사꾼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시간이리라.

 

폭우가 지나간 밭 주위는 발이 빠지긴 했지만, 비를 맞은 갖가지 작물들이 시나브로 싱싱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모녀가 고추를 따는 동안, 나는 한량처럼 하우스 안팎을 어슬렁거리면서 사진을 찍었다. 새삼 땅을 향해 수줍게 고개를 떨군 하얀 참깨꽃과 고추꽃을 여러 장 담았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다고 생각한다. 벌과 나비가 꾀지 않는 꽃은 없으니, 풀꽃들이 개체를 유지해 가는 저 자연의 순환은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김준태 시인은, 모든 일은 밟아야 할 순서가 있으며, 인내와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할머니에게서 배우고 있음을 시 ‘참깨를 털면서’에서 노래했다.

 

▲ 토란 . 흙난초 [ 토란 土蘭 ] 이 아니라 , 흙알 [ 토란 土卵 ] 이다 .

밭 가녁엔 토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긴 타원형의 잎자루에 상기도 아까 내린 빗물이 구슬처럼 남아 있었다. 토란은 흙난초[토란土蘭]이 아니라, 흙알[토란土卵]이니, 곧 식용하는 ‘알줄기’를 이름이다. 조리하여 알탕으로 끓이면 각별한 맛을 내는데, 뜻밖에도 딸애가 그걸 별식으로 매우 즐긴다. 그러나 나는 알줄기보다는 다듬어 말려 놓았다가 걸쭉하게 끓이는 개장 따위에 들어가는 나물로 쓰는 줄기가 훨씬 좋다.

▲ 깨꽃 ( 왼쪽 ) 과 고추꽃 .

고추꽃은 오늘에야 새롭게 보인다. 꽃잎이 자그마한 데다 대부분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어 꽃잎의 모양을 살피기 어렵긴 하지만, 단순하면서도 시원한 넓이를 가진 푸른 잎사귀와 함께 어울려 무어라 할까, 매우 검박(儉朴)한 느낌을 준다.

 

뜻밖에 고추는 가짓과에 속하며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이 땅에 전해지기는 임진왜란 이후인데, 당초(唐椒)로 불리기도 했으며, 고초(苦椒)에서 고추가 되었다. 매운맛 때문에 흔히들 시집살이에 비유되기도 했지만, 고추는 이제 우리 음식에서는 빠질 수 없는 양념이 되었다.

 

집에 들러 저녁을 드는데, 일과 더위에 지친 노인은 밥이 넘어가지 않는지, 찬물에 밥을 만다. 그 앞에서 내 왕성한 식욕이 부끄럽다. 장모님께선 길을 나서는 딸에게 미리 사 놓은 마른오징어 꾸러미를 건넨다. 어떤 상황이든, 사위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반드시 챙기려는 장모님 앞에서 다시 백년지객은 부끄럽고 황송한 것이다.

 

 

2006. 7. 29. 낮달

 

 

방학이 거의 끝나가지만, 올해는 어떻게 아직 장모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작년처럼 두 동의 하우스에 고추 농사를 지으시는데, 고추를 따내느라 70 노인이 더위에 진을 빼시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주변에 온갖 채소 농사를 지으셔 들르는 딸네에게 한 보퉁이씩 안겨주신다. 조만간 날을 잡아 처가에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만 굴리고 있다.

 

2007.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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