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잔인하지 않게’ 맞이하자
15년 전에 처음 블로그를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대던 시절의 글이다. 그 당시 신영복 선생의 그림으로 된 탁상용 ‘참교육 달력’을 넘기면서 달마다 쓰던 글이다. 한참 철 지난 글이라 싶어서 제쳐둔 글인데, 새로 읽으니 그 울림이 새삼스러웠다. 우정 새 글인 것처럼 읽어보기로 한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어쩌다 사월은 한 백인 시인의 시 한 편으로 떠올리는 시간이 되었다. 사월을 노래한 시인이 어찌 그 이뿐이었겠냐만 엘리엇의 서사시 ‘황무지(荒蕪地) The Wasteland’가 노래한 사월의 이미지는 전후 10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이 땅에선 화석으로 살아 있다.
황무지가 1차 세계대전 뒤 전쟁을 낳은 현대문명을 비판한 작품이고, 사월을 ‘잔인한 달’로 노래한 까닭은 ‘아무도 싹을 틔우길 원치 않는데 자연은 재생을 강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 따위야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잔인한 달’은 젊은이들의 연애편지에서, 여학생의 일기에서 박제가 되어 살아 있는 것이다.
이틀간 협상 시한이 연장된 한미 FTA 탓에 ‘4월은 잔인한 계절’이 되리라 말할지 모르지만, 이 ‘매국의 거래’가 성공하여 협상이 타결된다고 해도 그것 따위로는 ‘감자 한 알 적시지 못할 것’이다. 누차 말했듯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민중의 생존권과 건강권, 국가의 자주권 따위를 담보로 얻은 ‘그들만의 협정’ 타결이 권력과 자본을 고무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에게 갈길은 멀다. 협상 타결에 취한 ‘그들’의 건배가 채 마르기 전에 민중들은 저 계약의 기만성과 허구성을 꿰뚫어 볼 터이고, 그들은 스스로가 저지른 매국의 거래에 따른 준엄한 책임을 피해 가지 못할 것이다.
4·3, 잠들지 않는 남도
4월 달력을 들여다보자니 역사적 기념일이 꽤 많다. 제주항쟁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4·19 혁명 기념일 따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역사의 격랑을 환기해 준다. 청명(5일)과 한식(6일)도 있다.
3일은 제주 4.3항쟁 59돌을 맞는 날이다. 항쟁의 기점이 되었던 1947년부터 따지면 60돌, 한 갑자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 무려 3만여 명이 희생된 이 항쟁의 원인 가운데 미군정의 강압이 있었다는 사실은 자못 시사적이다. 그로부터 60년, 그들은 자유무역의 이름으로 민중들의 생존권을 겨누고 있다. (10일부터 수학여행을 떠나는데, 공교롭게도 올해 우리의 목적지는 제주도다. 꼭 10년 만의 수학여행이다. 설악산이 고작이었던 예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달력의 글귀를 통하여 쇠귀 선생은 말한다.
사상의 완성은 실천입니다.
멀고 먼 길을 걸어야 합니다.
지붕에서 띄우는 종이비행기는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주절대거나 주워섬기는 건 쉬운 일인데, 실천이란 그게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몸과 마음을 고단하게 하는 일이니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요즘 들어서 그간 ‘주절대는 것’을 역할로 착각하며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현실에 발 딛지 않은 한, 어떤 생각도 종이비행기에 그칠 뿐이고, 그것은 한갓진 ‘말의 성찬(盛饌)’일 뿐이라는 일갈이다. 스무 해 넘게 징역살이를 통해 삶과 세상을 성찰해 온 이 경제학자의 낮은 목소리의 울림이 새롭게 다가오는 4월이다.
2007. 4.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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