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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정해(丁亥) 설날, 성묫길

by 낮달2018 2022.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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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정해년 설날

 

얼마 전에는 ‘젊은 여자’가 밟힌다고 야살을 떨었지만, 늙은 안노인들이 눈에 밟히기는 훨씬 오래된 일이다. 노인들의 모습에는 딱히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소 구부정한 허리, 조심스런 걸음걸이, 육탈(肉脫)이 진행되는 듯한 깡마른 몸피, 불그레한 홍조가 가시지 않는 눈자위 등은 그 황혼의 가슴 아픈 징표들이다.

▲ 부모님 산소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마을은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강가 신작로 옆에 내 옛집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가신 지 벌써 네 해가 흘렀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일상에 일찌감치 익숙해졌는데도 주변에서 만나는 안노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가끔 시간이 되돌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혼란에 빠지기도 하는 건 순전히 회한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공중파 방송을 보다가 혼자서 눈물을 쏟기도 했다. 길러 준 조모를 버리고 오래 소식을 끊었던 한 청년이 할머니를 찾아 용서를 비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남도의 섬에서 홀로 살고 있다는 그 80줄의 안노인은 “아가, 울지 마라.”며 오히려 손자를 달래고 있었다.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 그것이 곧 어버이 사랑의 본질이다.

 

어머니 3주기를 앞두고 쓴 글을 다시 읽었다. 산소의 봉분을 뒤덮은 잡풀들을 캐내자고 한 아내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한식날이었던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빠져 버렸던 탓이 아니다. 그리 오래 마음에 담을 만큼 그걸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던 탓이라고 하는 게 훨씬 정직하다.

 

설날 오후에 고향 뒷산에 모신 부모님 산소를 찾아 성묘했다. 부모님의 유택은 이웃 산소에 견주어 몹시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다. 병풍석까지 두른 선친의 친구분 묘소는 정갈했고 널찍한 묘역 아래쪽 비탈에 심긴 몇 그루의 진달래와 함께 그 자손들의 정성과 손길이 빛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산소 앞에서 한참 동안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마을을 굽어보며 나란히 유택에 누워 유난히 다정다감하셨던 아버지께선 아마도 늘 하루의 일과를 시시콜콜 어머님과 도란도란 나누고 계실 거였다. 기와집을 허물고 미끈한 양옥에다 염소 갈빗집이 들어선 옛 집터를 내려다보며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 내 어버이께서 잠들어 계시는 곳. 이웃한 잘 꾸민 묘소(아래 사진)에 비하면 옹색하고 외롭다 .

얼마간의 돈을 들여 묘역을 정비하고 넓히라는 이웃 형님의 충고를 감사히 받기는 했지만, 애당초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와 아내는 무덤 따위를 남기지 않을 작정이고 이 산소를 모시고 보살피는 것은 우리 세대의 일로 마감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떠나신 후 한갓지게 산소를 꾸미고 보살피지 못해서가 아니라, 살아생전 제대로, 마음으로 어머니 아버지의 외로움과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음이 나는 가슴 아프다. 우리는 언제나 너무 늦게, 그리고 아프게 자신의 무딘 가슴을 헤아리는 것이다.

 

“나무가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는 <공자가어(孔子家語)>의 글귀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진실이다.

 

 

2007. 2. 20. 낮달

 

 

 

어머니 3주기를 맞으며

 

 

내일은 어머니의 기일이다. 2002년에 돌아가셨으니 3주기인 셈이다. 아내가 어머니가 좋아하셨다며 홍시 몇 개를 사 왔다. 불현듯 봉분 꼭지 부분에 쑥이 잔뜩 자라 있던 산소가 떠올라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년 한식날쯤에 호미를 들고 와서 저 잡풀들을 캐내자고 아내와 약속했듯, 우리 산소는 주변의 잘 정돈된 봉분들과 유난히 대조되어 보여서였다.

 

어머니는 선친께서 잠든 고향 뒷산에 모셨다. 합장이었다. 삼우(三虞) 날에는 생전에 어머니께서 늘 몸에 지니셨던 지갑과 안경을 사르고 돌아왔는데, 현관문을 열자, 문득 당신께서 거처하시던 방문이 열리며 어머니께서 내다보시는 듯한 착각에 북받치는 설움을 가누기 어려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돌아가시기 4, 5년 전부터 조금씩 진행해 오던 치매는 그해 3월께부터 드디어 어머니에게서 정신마저 거두어 가 버렸다. 몸은 뼈만 남았고, 눈빛은 공허하고, 하루 세끼 며느리가 손수 떠 넣어주는 미량의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게 유일한 자기 의지였다.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악화한 어머니의 병환에 무감각해져서 마치 집안의 집기처럼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나는 혼란을 느꼈었다. 정신이 떠나, 뼈와 가죽만 남은 어머니의 몸은 마치 속이 빈 구조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온 식구들이 연민을 가누지 못하지만, 정작 가족들이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모두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오직 평안히 눈을 감는 것만이 당신에게나, 우리 가족들 모두의 구원이 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 산소에 벌초와 성묘를 하면서 나는 진심으로 빌었다. 아버지께, 이제 어머니를 모셔 가실 것을, 오직 그것만이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2002년 10월 17일 정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7년 만에 어머니께서도 영욕의 88년간의 삶을 마감하셨다. 1914년생, 경술국치 네 해 뒤에 구미 상모동에서 나셔서(독재자 박정희의 어린 시절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고 계셨다.) 열여덟에, 열여섯 나던 아버지의 지어미가 되셨다.

 

어머니는 무남의 여형제 다섯 중 막내셨고, 나는 당신께서 마흔셋에 낳아, 젖조차 변변히 먹이지 못한 막내였다. 내가 마흔두 살일 때, 어머니께선 “내 나이가 네 나이의 꼭 곱절이구나!”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나는 비로소 당신께서 감내한 세월이 곧 내 삶이었다는 깨달음에 망연자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우리가 '남티' 라고 불렀던 고향마을의 재

제도 교육은 한 시간도 받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독서광이셨던 어머니께서는 삼국지나 초한지의 주요 대목을 줄줄 외시기도 했고(그 중 ‘우미인가(虞美人歌)’는 절창이었다.) ‘유세차’로 시작하여 ‘오호 통재라’가 빈번하게 섞이는 한글 제문을 줄잡아 수백 편은 쓰셨을 것이다. 1994년 복직하면서 내가 모시게 된 이래, 내 서가에 꽂힌 어지간한 대하소설 모두를 읽으셨다. 그러나 남다른 지적 능력도 치매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아버지와 맏형님을 임종했지만, 사실은 혼자서 낯선 땅에서 어머니를 잃는다는 걸 몹시 두렵게 여겼다. 그러나 온 가족이 달려와 지켜보는 가운데서 어머니는 아주 평안하게 ‘짚불 사위듯’ 그렇게 눈을 감았다. 임종의 순간에 아무 고통 없이 임종하셨다는 게 가족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어머니를 여읜 지 3년. 일상에서는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아파트 주변에서 쇠약해진 안노인들을 만나면 마치 어머니인 듯한 착각에 걸음을 멈추고 새삼스러운 연민과 설움에 젖어 그들의 위태한 걸음걸이를 오래 지켜보곤 한다. 죽음은 일체를 무력화해 버리지만,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 죽음은 한갓진 추억으로만 남다.

▲ 이웃한 선친 친구분의 묘소

자식이 제대로 자식 노릇을 하려면 어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 진실이다. 이제 장성한 아이들의 어버이가 되면서 우리 내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삶과 우리의 삶이 하나의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못다 한 세월을 뉘우치고 있다. 비록 진부하지만, 그 동심원의 내용은 ‘사랑’이고 ‘희생’이다.

 

어머니, 아버지의 산소 오른편 위쪽에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 내외분이 잠들어 있다. 정작 어머니를 합장할 때만 해도 그 산소는 가묘였는데, 불과 3년 만에 양주분이 차례로 세상을 버린 것이다. 젊은 시절에 그분은 그야말로 ‘적빈(赤貧)’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우리 집 앞의 공터를 거저 내 주어 흙집을 지어 살게 하셨다.

 

그분은 지난 8월에 세상을 떠났고, 나는 짬을 내어 문상을 다녀왔다. 벌초를 해야 할 시기에 형님뻘의 상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네 어른 산소 벌초는 내가 했네. 떼(잔디)가 제대로 없던데, 언제 굴삭기와 인부 사서 떼도 새로 입히고 묘역 왼편으로 조금 넓히고 하게나. 굴삭기 사는데 35만 원, 떼하고 인부하고 하면 100만 원 안쪽이면 될 걸세. 우리는 한 삼백만 원 들였네. 전화를 받으며 나는 건성으로 “아, 예. 그러지요. 고맙습니다.”를 되풀이했지만, 곤혹스럽기만 했다.

 

벌초하러 가서 그 댁의 산소를 확인하고 나는 그 형님의 충고를 이해했다. 그의 양친을 모신 봉분의 크기는 우리 산소의 갑절처럼 보였고, 봉분의 아랫부분에 가지런한 병풍석까지 둘러쳐져 있었다. 나는 그 형님이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살아서 남루했던 누옥, 죽어서 뉠 유택을 번듯하게 해 놓은 자식들은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그러나 나는 그 형님의 충고 대신 내년 한식날, 호미를 들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산소를 찾을 것이다. 다행히 두 분은 낙동강을 굽어보는 양지바른 자리에 나란히 잠들어 계신다. 부근에 옛 동무도 계시니 한결 덜 외로우실 터이다. 우리가 캐낼 쑥 자리에 짙푸른 잔디가, 두 분이 남긴 따뜻한 사랑처럼 살아 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의 3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2005. 10.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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