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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글쓰기’의 괴로움

by 낮달2018 202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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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괴롭다

 

심심파적 삼아 글을 끼적댄 지 예닐곱 해가 지났다. 그런저런 이야기에 그치지만 블로그에 쓴 글이 천 편을 넘기면서 글쓰기가 주는 기쁨이나 성취감만큼이나 그게 주는 스트레스와 괴로움도 커진다. 뭔가라도 써서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얼마만큼 해방되었지만, 글을 쓰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괴로움은 여전하다.

 

글쓰기의 기쁨과 괴로움

 

글 한 편을 쓰는 데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들이는 편이다. 생각의 갈피를 잡고 그 숙성을 기다리며 궁싯거리는 시간을 빼도 그렇다. 초를 잡아놓고도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고, 다 쓴 글도 퇴고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글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가장 쉽게 쓰이는 글은 두서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펼 때나 어떤 특정한 주제에 관한 입장이 일찌감치 정리되어 있을 때 쓰는 글이다. 이런 글은 생각의 물길을 따라 감정의 과장이나 격앙을 경계하면서 담담하게 서술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글은 두어 차례의 퇴고만으로도 만족스러운 탈고가 이루어진다.

 

나는 이렇게 쓴 글은 주로 블로그에 올리곤 한다. 비록 공개되어 있다 하더라도 블로그란 개인의 성격이나 태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공간이므로 자기 의견을 펴는 걸 굳이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제가 공적, 사회적 성격인 글을 쓸 때는 좀 달라진다. 이때는 의견을 개진하는 것도 조심스럽고 주관적 태도를 드러내더라도 최소한 객관성을 담보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글은 시작하는 것 자체가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나는 이런 형식과 태도로 기사를 쓰는 편이다.

 

요즘 <오마이뉴스>에 지난 1월에 다녀온 ‘임정의 노정 답사기’를 쓰고 있다. 다녀온 지 좋이 두 달이 다 됐는데, 이제 겨우 세 편의 기사를 썼다. 첫 기사를 송고한 것은 일주일만이었지만, 두 번째 기사는 한 달을 훨씬 넘겨서 간신히 냈다. 그리고 열흘쯤이 지난 뒤에 세 번째 기사를 보냈다. 네 번째 기사는 어젯밤에 송고했다. 꼭 일주일만이다.

 

같은 답사기라도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명승지와 역사 유적지의 그것은 다르다. 역사적 공간과 관련한 서술에는 고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 확인이라는 만만찮은 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외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제 발로 가서 제 눈으로 보고와도 거의 한 세기를 전후한 현대사를 더듬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실과 사건 사이, 인물과 인물 관계 따위를 기술하면서 맥락을 제대로 짚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사단을 이끌면서 매우 구체적인 해설을 해 준 홍 선생을 여러 차례, 문자 메시지와 전화로 성가시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래서다.

 

더 큰 문제는 그 장면들에 담긴 뜻을 해석하는 안목이다. 한가하게 과거의 역사적 공간을 구경하러 간 게 아니니 거기 담긴 의미를 재구성하는 게 긴요한데, 얕은 지식과 어설픈 관점으로 그걸 세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궁싯대다 보면 일주일이 속절없이 흐른다.

 

쉬면서도 글만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니니 일이 바쁘면 하루나 이틀쯤은 공치기 일쑤다. 수업이 없는 시간도 교재연구나 다른 업무가 만만찮고, 토막 난 자투리 시간은 생각이나 느낌도 잘라 먹으니 글을 이어 쓰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가장 힘든 게 초벌 원고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에 신경을 꽤 많이 쓰는 편이다. 문장 하나라도 맘에 차지 않으면 진도를 나가지 않는 것이다. 다 써 놓고 나중에 고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게 어디 하루아침에 밴 버릇인가 말이다.

 

나는 낱말의 선택과 그 배치, 문장의 길이, 어휘의 중복 따위에 골몰한다. 무엇보다 애당초 처음 상정한 글의 흐름에 어긋나지 않게 쓴답시고 굳이 골머리 앓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키지 않은 짓을 구태여 하는 것은 모두 고교 시절 이래의 버릇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한량없이 가고 나중에는 책상 앞에 앉는 것조차 엄두를 못 내기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내 글쓰기는 늘 지지부진하다 . 글 쓰는 간격은 일주일에서 한 달을 넘나든다 .

그러나 일단 초벌 원고가 완성되면 일은 한결 쉬워진다. 여러 차례, 여유가 있을 때는 시간을 두고 퇴고를 거듭한다. 꼼꼼히 퇴고를 거칠수록 글이 좋아진다는 것은 변치 않는 진리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그 결과가 어떻든 미련 없이 글을 내보낼 수 있게 된다.

 

안도든 부끄러움이든 평가는 ‘나의 몫’이다

 

나는 물론 내 골몰의 자취가 독자들에게도 느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독자들이 그걸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서운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억지로 쥐어짜 만든 글이든 온갖 노력을 다해 이룬 글이든 그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지, 독자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몸에 붙이고 여러 차례 퇴고를 거듭하는 것은 인내력이 필요하지만, 퇴고가 괴롭지만은 않다. 이미 식상해 버린 뻔한 글을 여러 차례 들여다보는 게 지겨워도 그것이 글의 실수와 무리를 줄이는 일인 까닭이다. 퇴고를 통한 변화는 비록 독자가 눈치채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글쓴이에겐 적지 않은 위로가 되는 것이다.

 

손에서 떠나보낸 글을 새로 읽는 것도 편하지만은 않다. 자기 이름으로 공개된 글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읽어 내는 게 어려운 만큼, 그걸 스스로 평가하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개된 글을 읽고 안도하든, 부끄러워하든 그게 자신이 감당할 몫이라는 걸 무심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처럼 고심해 쓴 글이라면 마땅히 ‘천하’를 들먹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명문(名文)’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지 않게 마음 썩이며 쓴 글인데도 그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글쓰기의 한계지만, 언제부턴가 그걸 무심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의 하얀 공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새삼 아무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게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면서. 그러나 때로 이런 괴로움 따위와는 아예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또 어느 순간엔가 다시 모니터를 켜고 있을 것이다.

 

 

2015. 3. 21. 낮달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그 ‘괴로움’에 대하여 엄살을 떤 듯하여 좀 민망하다. 특히 창작의 과정에서 이른바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시인, 작가들의 산고(産苦)를 생각하면 이 글은 그들을 모독한 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문 글쟁이가 아니더라도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돌아본 글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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