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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배우들, 그 ‘부침(浮沈)’과 ‘노화’

by 낮달2018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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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가는 길>을 가르치며 그 삶의 대역, 배우를 생각한다

▲ 한국방송 <TV 문학관>에서 방영한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안병경과 차화연, 문오장이 출연했다.

가끔 소설 작품을 공부하고 나서 아이들에게 ‘작품을 각색해 영화로 만들 때 주인공 역을 맡을 배우’를 ‘캐스팅(casting)’해 보자고 이야기하곤 한다. 잠깐 우리가 제작자나 감독이 되어 봄으로써 인물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게 쉽지는 않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알고 있는 배우가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연급 연기자들에 대한 관점이 아직 성숙해 있지 않아서다. 즉 아이들은 주연급 배우들을 중심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조연을 흘낏대기보다는 빛나는 주인공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보는 건 사춘기 아이들에게 주어진 특권일지도 모른다.

 

‘삼포 가는 길’의 배우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배울 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기는 했다. 역시 아이들 반응은 미지근하기만 했다. 전임교에서의 여학생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었다. 태어나기도 전인 거의 40년 전의 영화이니 영화 ‘삼포 가는 길’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들을 상상하게 하는 건 어차피 무리다. 새로 백지에서 현역 배우들 가운데서 한번 꼽아보자고 얘기해도 아이들은 여전히 머리를 갸웃거릴 뿐이다.

 

영화 <삼포 가는 길>(1975)의 주연은 알다시피 백일섭(영달 역)과 문숙(백화 역), 그리고 김진규(정씨 역)이다. 나는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었다. 원작과는 달리 가끔 드러나는 생뚱맞은 감정의 과잉 따위가 거슬리긴 했지만, 영화는 이른바 ‘로드무비’로서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관련 글: ‘문숙’, <삼포 가는 길>, 길 위의 사람들]

 

수준 높은 단막극의 산실이었던 <한국방송(KBS)>의 ‘KBS무대’를 이은 ‘TV문학관’이 ‘삼포 가는 길’을 방영한 것은 1981년이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덕분에 나는 이 드라마를 천연색 화면으로 보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기억 속의 드라마는 흑백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TV문학관’의 ‘삼포 가는 길’에서 영달 역은 맡은 탤런트는 안병경(1947~ )이다. 나는 늘 나이보다 어려 보이던 이 배우의 연기력을 확인한 것은 70년대에 <KBS>에서 방영하던 ‘스타 무엇’이라는 이름의 신인 연기자 선발을 위한, 요샛말로 하면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여기에 조연급 연기자 가운데 안병경이 출전한 연기자의 대역으로 나왔다. 당시에도 비중 있는 배역을 맡지 못했던 배우였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그런 연기력을 갖추고 있다는 데 나는 놀랐던 것 같다. 당시 ‘TV문학관’은 바로 이 같은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에 의해 명맥을 이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영화 ‘서편제’(1993)에서 주인공인 유봉(김명곤 분)의 친구인 ‘낙산거사’, 장바닥에 앉아 혁필화(革筆畵)를 그리던 중늙은이를 인상 깊게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로 안병경은 제14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때 마흔여섯이었던 안병경은 올해 우리 나이로 67세가 되었다. 하기야 비디오 ‘서편제’를 빌려 보면서 눈물 바람을 하던 30대 초반의 젊은 부부는 이제 예순을 앞둔 초로가 되었으니…….

 

정씨 역을 맡은 배우는 문오장(1940~1999)이다. 70년대 초중반, 유신 독재 시기에 <KBS>에서 연속 편성해 방영했던 ‘조총련’이나 ‘노동당’ 같은 반공 드라마에서 북한 요인 역을 열연했던 배우 문오장은 악역 전문 배우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자기 책임이라 할 수 없는 용모 때문에 특정한 연기, 이를테면 단역이나 악역만 맡게 되는 배우는 불운하다. 그러나 우리 영화의 폭이 넓어지면서 이른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성격 배우’가 자신의 역할과 연기력에 걸맞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악역이나 부정적 역할만 맡는 데 이골이 났던 변희봉이 영화 ‘괴물’을 통해서 거듭 원숙한 연기자로 재평가된 이후, 우리 영화가 발굴해 낸 ‘주연 못잖은 조연’은 좀 많은가. 나는 그들 덕분에 주연이 살고, 작품이 살고, 우리 영화의 수준이 한 단계 뛰어올랐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계를 떠나 목회에 종사하다 1999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문오장은 불운한 배우다. 그의 작품 목록에 있는 숱한 작품 중에서 그의 비중은 모두 얼마쯤이었을까. 그의 수상 이력은 짧다. 가장 큰 상이 1975년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남자연기상 같다. 눈 밝은 관객들에 의해 성격 배우들이 새롭게 발견되기 이전에 세상을 떠난 것도 또 다른 불운의 하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봐도 문오장은 제대로 된 이미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삼포 가는 길’의 해상도 떨어지는 스틸 컷 한두 개가 고작인데 역시 인터넷의 대중화 이전에 그가 작품 활동을 한 탓으로 보면 되겠다. 불운은 그의 필모그라피도 피해 가지 않은 셈이다.

 

이른바 ‘성격 배우’들의 불운과 행운

 

TV 드라마 ‘삼포 가는 길’에선 단역으로 등장한 배우들의 면면도 있다. 백화가 일했던 주점 ‘갈매기집’의 주모는 2000년 이후에 뜨게 되는 전원주가, 정씨의 감옥행을 설명하는 영상 속에 등장하는 정씨의 아내와 통정하는 간부(姦夫)는 백윤식이 맡은 것이다.

 

오랜 감옥살이를 마치고 고향인 ‘삼포(森浦)’로 가는 뜨내기 노동자 정씨를 연기한 김진규와 문오장은 다소 색깔은 다르지만, 원작자가 부여한 성격을 제대로 작품에 잘 녹여냈다. 김진규가 훨씬 자연스럽게 정씨를 연기했다면 문오장의 그것은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역시 용모에서 풍기는 인상 탓일 뿐, 그게 연기력 때문은 아니리라.

 

영화 ‘삼포 가는 길’에서 갓 데뷔한 문숙이 다소 이국적인 마스크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외눈 쌍꺼풀’을 녹여냈다면 TV 드라마에선 데뷔 3년 차의 탤런트 차화연(1960~ )이 꽤 까칠한 연기로 백화를 표현했다. 나이야 스물두 살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작부 백화를 스물한 살의 미녀 탤런트는 천연덕스럽게 해냈다.

▲ 차화연. 젊은 시절과 현재

차화연은 80년대 중후반에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미자 역을 맡아 열연한, 1987년 <문화방송(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사랑과 야망’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김수현 극본의 이 드라마는 무려 75%의 시청률을 올렸었다. 차화연의 상대역으로 열연했던 배우 남성훈(1945~2002)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차화연이 1980년대에 공전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특별히 연예인에 열광하는 편이 아니어서 그저 그 배우 좋다고만 여길 뿐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문희를 꽤 좋아해서 누군가가 건네준 그녀의 흑백 사진을 교모 창에다 끼워 다닌 게 고작이다.

 

차화연에 당기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이미지가 워낙 당돌하고 영악해 보여서다. 기본적으로 나는 다부져 보이는 여자보다는 좀 순해 보이는 인상을 선호하는 것이다. 1970년대 문희, 윤정희, 남정임의 트로이카 가운데서 남정임의 인상이 다소 차화연의 그것과 겹치지 않나 싶다.

 

‘노화’를 받아들이는 것

 

‘사랑과 야망’을 끝으로 브라운관을 떠났던 차화연은 2008년에 돌아온 모양이다. 워낙 드라마를 잘 보지 않으니 잘 모르고 있다가 올해 아내가 보고 있던 ‘백 년의 유산’이라는 드라마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나는 실눈을 뜨고 쉰을 넘긴 초로의 여배우의 모습을 오랫동안 뜯어보았다.

 

“저 이가 차화연이라고? ‘삼포 가는 길’의 백화였는데……. 아, 차화연은 나이가 드니까 훨씬 낫네!”

“젊을 때가 예쁘지, 늙어가고 있는 모습이 뭐가 좋다고 그러우?”

 

아내에게 은근히 쥐어박혔지만, 나는 우정 그렇게 생각했다. 세월이 그녀의 눈매와 안면에 드리웠던 암팡지고 다부진 결기 같은 것을 무화해 버렸다. 얼굴선은 부드러워지고 눈매도 노화의 기미와 함께 온화해졌다. 나는 20대의 차화연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50대의 그녀에게서 찾아냈다.

 

그리고 그게 다다. 나는 그 드라마를 다시 보지 않았다. 배우도 늙는다. 늙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현명하게 깊어지면서 늙는 것은 축복이다. 주어진 노화를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흔쾌히 받아들인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어떤 신뢰감을 느끼곤 한다.

 

반대로 잠시라도 노화를 늦추려고 얼굴에 손을 대어서 그 흔적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여배우들도 적지 않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안타까움을 이해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게 사람들에게는 추함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저어한다.

▲ 이 프로그램이 호응받은 것은 노화를 받아들인 배우들 덕분이다.

‘꽃보다 할배’(<TvN>)에서 노배우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지 않고 무심히 드러내 주었다. 늙고 짜부라져 활기를 잃은 피부와 노쇠한 신체 기능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늙다리 할배 배우들에게 사람들이 환호한 것은 바로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정직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퇴직하면 박정자(1942~ )의 연극을 반드시 한 편 볼 작정이다. 나는 그녀의 중성적이면서 엄청난 카리스마가 담긴 목소리를 좋아하고 늙어가도 온화함을 잃지 않는 얼굴과 표정을 좋아한다. 그녀는 노화를 자기 연기의 일부로 완벽하게 확장한 배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영화계는 그들만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중후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젊은 연기자들을 숱하게 얻었다. 송강호나 최민식, 설경구 같은 중견 연기자에서부터 하정우 같은 젊은 연기자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성격 배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배우들이 우리 영화의 수준을 한껏 올리고 있다.

 

요즘 유일하게 보는 드라마가 <TvN>의 ‘응답하라 1994’다. 거기서 뛰어난 연기로 극에 활기를 더하는 중견배우 성동일이나 14년이나 어린 역을 맡아서 훌륭하고 소화하고 있는 젊은 배우 김성균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곤 한다. 이들은 다행히 ‘명품 조연’이 인정받는 시대에 태어난 행운아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미 고인이 된 문오장을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안병경을 드라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50대 원숙한 부인으로 돌아온 차화연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지상파 3사에서 ‘드라마 스페셜 2013’(KBS)과 ‘드라마 페스티벌’(MBC), 그리고 ‘시네 드라마’ (SBS) 등으로 다시 단막극 무대를 연 것은 고무적이다. 그 단막극 무대에서 연륜 지긋한 좋은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면 팬들에게도 적지 않은 행운이 되리라.

 

 

2013. 12.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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