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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페스티발>, 그러나 그리 흥겹지 않은

by 낮달2018 2021.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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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쌍의 남녀와 한 남자 이야기

▲ 음전한 과부인 한복점 여주인 역의 심혜진은 가학의 강렬한 욕망을 드러낸다.

요즘 나는 통 영화를 보지 않는다. 2009년 벽두에 대구의 동성아트홀에서 <워낭소리>와 <낮술>을 본 게 고작이다. 올해는 얼마 전에 안동의 중앙시네마에서 본 <서해로 흐른다>가 다다. 시골이지만 복합상영관이 두 군데나 들어서고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극장에 가는 일이 드물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영화 <페스티발> 포스터

영화를 챙길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게 이유일 수 있겠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역시 나이 들면서 영화에 관한 관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에 있다. 전교조 활동에 묻혀 지내면서도 비디오로나마 주당 한두 편의 영화를 꾸준히 즐길 정도였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나는 비디오 가게에 발을 끊었다.

 

영화를 즐긴다는 것은 소설을 즐긴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화든 소설이든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삶과 운명이다. 사람들은 소설과 영화를 읽고 보면서 타인의 삶을 곁눈질하면서 지금 자기 삶을 되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요즘 소설도 잘 읽지 않는다. 소설적 상황을 압도하는 현실 탓일까.

 

요컨대 나는 인간에 대해서, 또는 그 삶에 대해서 심드렁해진 게다. 소설도 읽다 보면 지겨워졌고, 영화가 다루는 삶도 마찬가지라고 느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내려받아서 구워 둔 영화를 나는 일별할 뿐 거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한편으로 게으름 탓이기도 했다. 작정하고 영화 한 편을 보겠다고 시작했다가 절반을 보지 못해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 게 여러 번이었다.

 

어제 왜 난데없이 영화를 보겠다고 나섰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는 ‘중앙시네마 기사’를 쓰면서 촉발된 어떤 충동임이 분명하다. 며칠 전 읽었던 <씨네 21>의 관련 기사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영화관에서 유쾌하게 영화 한 편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복합상영관 ㅍ시네마에서 눈에 들어오는 영화는 두 편, 유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와 <페스티발>이었다. 굳이 <페스티발>로 고른 것은 앞서 밝혔듯 나는 일단 좀 ‘유쾌’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섹시 코미디라는 것 말고 <씨네 21>에서 읽은 작품 리뷰를 통해서 나는 영화 <페스티발>의 대강을 꿰고 있었다.

 

페스티발, 세 쌍의 남녀와 한 남자 이야기

 

아내와 함께 표를 사서 ㅍ시네마의 3관에 들어섰을 때 관객은 우리 둘뿐이었다. 둘이서만 영화를 봐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 2·여 1의 일행 두 팀이 우리 앞자리에 앉았다. 타이틀이 뜰 때서야 나는 제목이 ‘페스티벌’이 아니라 ‘페스티발’인 것을 알았다. (외래어 한글 표기법을 어긴 이 제목은 물론 ‘의도적’이겠다.)

▲ 영화의 남녀 주인공들 ⓒ 공식 누리집에서 갈무리

영화는 지극히 단순한 구도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세 쌍의 남녀와 한 남자다. 풍기 문란 단속반 경찰 장배(신하균 분)와 그와 동거하고 있는 영어 강사 지수(엄지원 분), 한복점 여주인 순심(심혜진 분)과 철물점 주인 기봉(성동일 분),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팔고 있는 청년 상두(류승범 분)와 순심의 외딸인 여고생 자혜(백진희 분)이 커플이라면 여학교 국어 교사 광록(오달수 분)은 아내가 있지만, 작품의 구도상으로 보면 솔로다. 그가 추구하는 성적 취향은 오로지 그의 것이므로.

 

오로지 ‘물건의 크기’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남성성’으로 애인에게 군림하고 싶은 장배의 욕망은 어느 날 애인에게 배달되어온 ‘바이브레이터’로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그뿐만 아니다. ‘안전하고 살기 좋은 동네 만들기’ 운동이 한창인 동네에 사는 평범하지 않은 이웃들도 그의 평화를 깨는 존재들이다.

 

한복집을 꾸려가고 있는 요조한 과수댁 순심과 이웃한 철물점의 홀아비 기봉은 어느 날 서로의 성적 취향을 알아채고 단짝이 되는데 이들의 성적 코드는 ‘에스엠(SM)’이다. 에스엠(SM)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머리글자를 딴 말이라는 건 이제 상식이 되었지만, 주변에서 그런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순심의 딸이자 발랑 까진 여고생 자혜의 대시를 받고도 심상하기만 한 포장마차 청년 상두는 ‘인형놀이’에만 빠져 있다. 사람 모양을 한 인형, 이른바 ‘리얼돌(real doll)’에 대한 집착이다. 점잖은 여학교 교사인 광록은 시나브로 여성 속옷에 대한 페티시(fetish)에 빠지고 있다.

 

이쯤 되면 ‘이제껏 상상하지 못한 도발적인 섹시 코미디’라는 영화사의 작품소개가 과장은 아닌 셈이다. 외화를 통해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익숙해서일까. 이런 상상을 뛰어넘는 성적 취향이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그게 이 영화가 다다른 지점인데 그게 성과인지 한계인지는 애매해 보인다.

 

영화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봤을 법한 성적 판타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건 일부분만 진실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독특한 성적 환상을 지니고 살고, 영화는 기본적으로 과장에 기초한다고 하더라도 영화가 그려내는 방식의 판타지가 일반적, 보편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겠기 때문이다.

 

흔히들 ‘변태’라고 부르는 이런 다양한 성적 취향에 대해서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만큼 다양한 종류의 섹스가 있으며, 그 모든 욕망은 각 개인의 인권처럼 소중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메시지는 코미디의 형식에 버무려져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기까지다. 코미디라는 외피에 감추어진 은밀한 욕망은 그것만으로도 일반의 이해와 수용으로 이어지기에는 버거워 보인다. 오히려 이 평범하지 않은 일탈을 전달하는 코미디라는 형식이 그런 성적 취향의 정체성을 무화해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느낌조차 있다.

▲ 여학교 교사 역의 오달수는 란제리 페티시를 감추고 살아간다.
▲ 류승범과 백진희. 류는 사람 모양의 인형, 이른바 리얼돌'에 집착하는 청년이다 .

상상을 넘는 성적 코드이니 아주 정색하고 들이밀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걸 코미디의 형식에 지나치게 녹여버림으로써 그 사실성을 까먹고 있다는 느낌도 버릴 수 없다. 등장인물 가운데 일반에 가장 가까운 성적 취향을 대표하는 장배와 지수의 모습이 훨씬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배우들은 분투했다. 장배 역의 신하균은 다소 오버 한다 싶을 만큼 배역에 깊숙이 빠졌고, 순심 역의 심혜진은 그 만만찮은 경력만큼의 노련한 연기와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단아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가학의 강렬한 욕망을 그녀는 매우 빼어나게 드러내 준 것이다.

 

오달수, 혹은 고독과 슬픔의 ‘공감’

 

류승범과 오달수의 연기는 좀 오랜 여운을 남겨준다. 영화에서 류승범을 만나기는 처음이다. 배역에 빠져 넘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매우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달수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달수가 맡았던 배역의 성적 취향과 무관하게 그가 보여주는 모습에서 한 인간의 고독과 슬픔을 느꼈다.

 

란제리를 입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묘한 페이소스로 다가온다. 사건으로 자기 성적 취향이 밝혀지고 난 뒤, ‘정말 여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라는 것’을 아내에게 확인해 주자 그들 부부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언제나처럼.

 

"꽃게 넣어서 해물탕 끓일게. 된장 풀어? 고추장 풀어?"

"된장."

 

뭔가 할 말을 깊숙이 감추고 있는 듯한 얼굴과 방심한 시선, 말없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우리 시대 모든 가장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연기와 그가 연기하는 광록의 삶이 주는 공감일 수 있겠다.

 

당찬 여고생 역할을 썩 훌륭하게 해낸 백진희의 모습도 기억해 둘 만하다. 아주 맹랑하고 도발적인, 그러면서도 소녀적 감성을 미묘하게 표현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잘 익은 음식물 위에 얹힌 새콤한 고명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희극적인 장면이 계속되면서 관객들을 웃기긴 했지만, 영화는 조금 지루했다. 속도감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아내는 영화 막바지에 잠깐 졸았다고 했다. 나는 그만하면 됐지 않느냐고, 아내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유쾌해졌으면 좋겠다고 본 영화였는데, 나는 좀 쓸쓸한 기분으로 귀갓길에 올랐다.

 

 

 

2010. 11.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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