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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황해>의 ‘극사실주의’와 ‘폭력’

by 낮달2018 2022.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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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흥진 감독의 <황해>(2010)

▲ 서울로 잠입한 연변 조선족 동포 구남. 이 영화는 그의 이야기다.

도시 저편에 새로 생긴 복합상영관에서 집의 아이들과 함께 영화 <황해>를 보았다. 영화에 관한 한 충분히 까다로운 아이들이 서슴없이 따라나선 것은 같은 감독의 2008년 작품 <추격자>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태 전,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를 본 것은 도시 이편의 복합상영관에서였다. 온 가족이 함께였는데 정작 아내는 끔찍하다며 진저리를 쳤다. ‘끔찍하다’는데 동의하면서도 나는 영화의 완성도에 끌렸던 것 같다. 영화 전편에 ‘폭력’이 낭자했지만, 그것은 관객들을 설득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추격자>의 감독과 배우들, 다시 만나다

 

<황해>는 같은 감독이 <추격자>의 두 배우(김윤석과 하정우)와 함께 만든 영화다. <추격자>의 계보를 훌륭하게 잇는 스릴러 액션 영화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아내는 동행을 거절했다. 끔찍한 영화지? 난 싫어. 피가 튀는 잔혹 영화는 나 역시 쉽사리 즐기지 못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날이 갈수록 끔찍한 장면을 바라보는 게 거북하다. 의료건강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에 간혹 나오는 수술 장면 따위에서도 나는 한참 고개를 돌려 버리곤 한다. 나이 들면서 눈물이 흔해진 것과 잔인한 폭력을 예사롭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평일이라서 영화관은 좀 썰렁했다. 모두 10여 명쯤의 관객이 객석 여기저기 흩어져 영화를 보았다. 영화관 아래층의 커피 전문점에서 산 커피를 홀짝이며 숨을 죽인 두 시간 반이 흘렀다. 화면에서 낭자하게 튀는 피 때문에 나는 여러 번 의식적으로 화면을 외면하여야 했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은 입을 다물고 극장을 빠져나갔다. 승강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도 아이들은 말을 아끼는 듯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서 나는 아들 녀석과 잠깐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무슨……, ‘사람 백정’도 아니고 참…….”

“글쎄, 말이에요. 괜한 오버만 잔뜩…….”

▲ 영화 <황해>의 포스터. ⓒ (주)팝콘필름

영화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서울에 온 한 연변 사내와 그에게 살인을 청부한 또 다른 사내의 이야기다. 연변에서 택시를 모는 구남(하정우)의 아내는 한국에 돈을 벌러 떠났지만 몇 달째 소식이 없다. 아내를 한국에 보내기 위해 빌린 돈 6만 원은 그의 삶을 짓이기는 질곡이다.

 

결국 그는 빚도 갚고 아내를 만나기 위해 살인청부업자 면가(김윤석)의 제의에 따라 황해를 건넌다. 아내의 행방을 찾으면서 살인의 기회를 노리던 구남은 눈앞에서 목표물이 살해당하는 것은 목격한다. 피살자의 살인을 청부한 자는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살인자의 누명을 쓴 채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리얼리티와 디테일’, 그리고 ‘명연기’의 조합

 

살인을 청부한 또 다른 인물은 조폭 김태원(조성하)이다. 그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구남을 쫓고, 연변의 면가 역시 구남을 뒤쫓는다. 이 쫓고 쫒기는 과정에서의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 <추격자>보다 더 독한, 엄청난 액션과 폭력, 그리고 ‘잔혹’이 연출된다.

 

이 추격 장면 곳곳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그것에 비길 만한 엄청난 스케일과 리얼리티가 돋보인다. 할리우드를 재현하려는 노력이 늘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한국 영화로서는 ‘괄목상대’해야 할 장면이다. 역시 ‘<추격자>의 나홍진’이라는 평가가 절로 나오는 부분이다.

 

제작사에서 자랑하는 대로 영화가 ‘리얼리티와 디테일이 살아 있는 뛰어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연변과 서울을 오가면서 카메라는 고단한 서민들의 삶과 현실을 여과 없이 드러내 주는데 그것을 ‘극사실주의’라 규정하는 게 그리 무리로 보이지는 않는다. 구남의 밀항 장면과 도주 장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리얼리티는 영화에 만만찮은 무게를 더해 준다.

 

일찍이 <추격자>에서 보여준 바 있는 하정우와 김윤석의 연기에 대해서는 더 이를 말이 없다. 돈과 아내를 위하여 킬러가 된 연변 조선족 청년의 절망과 분노를 하정우는 완벽하게 재현해 낸다. 옹색한 검정 잠바에 손을 찌른 그의 무표정하거나 우울한 얼굴, 겁에 질린 듯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경계를 넘나드는 미묘한 표정 속에 숨은 에너지는 그것 자체로 보석처럼 빛난다.

 

관객은 자연스레 그의 캐릭터에 몰입해 시종 그의 편이 되어간다. 불심검문에서 경찰을 때려뉘고 총상을 입은 채 도주한 구남이 산을 오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이른바 ‘동일시’의 감정을 분명하게 경험한다. 배우가 느끼는 절망과 분노가 날것 그대로 관객에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 생활고와 빚에 찌든 구남에게 접근하는 면가(위). 구남은 황해를 건너 서울로 잠입한다.

‘택시 운전사, 살인자, 조선족, 황해’ 등 4개의 소제목으로 나누어져 전개되는 영화는 세 번째 단락인 ‘조선족’에서부터 슬슬 비약한다. 이는 두 번째 단락 ‘살인자’의 추격 장면에서부터 그 조짐을 드러내던 ‘액션’으로 넘어가는 경계 부분이다. 차분하게 구남의 삶과 선택을 조곤조곤 보여주던 화면은 이어지는 가공할 폭력을 통해서 ‘사실’과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넘치는 ‘폭력’, ‘리얼리티’를 허물다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라고 자처하는 영화에게 새삼 영화가 지녀야 할 사실적 품성을 요구할 일이야 없겠다. 그러나 이어지는 끔찍한 폭력과 피비린내는 지금까지 탄탄하게 구축된 리얼리티를 시나브로 허물어 버리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살인청부업자 ‘면가’(김윤석)가 있다.

 

물론 이는 배우의 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맡은 캐릭터 탓이다. 그는 자신이 도끼로 살해한 조폭의 시신을 개먹이로 주라고 태연하게 지껄이는 포악무도한 살인청부업자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다. 글쎄다. 죽었던 인물이 다시 살아나 돌아다녀도 관객은 이를 눈치채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마치 기관총 대신 도끼를 든 람보 같아 보인다. 그는 숫자로는 대적하기 어려운 다수의 적을 단신으로 일거에 잠재우고 피비린내 속에 의연하게 걸어 나온다. 그가 다루는 원시적 흉기는 그 원시성만큼 잔인하고 즉물적이다. 그러나 화면과 장면 곳곳에서 튀거나 적시거나 흥건하게 고인 피는 ‘살인’의 설득력을 반감해 버린다.

 

살인과 폭력이 갖는 사실성이란 그 묘사의 정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폭력이 저질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의 합리성으로 확보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상황과 거기 대응하는 인간의 행동 방식이 갖는 설득력이 리얼리티의 요체라는 뜻이다. 합리적이고 설득적인 방식이라면 어떤 형식이든 살인과 폭력의 강도나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극적 전개와 인물의 제시를 위해서 용인되는 폭력도 ‘정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이 더 많은 관객과 더 많은 수익을 보장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는 영화에서 표현되는 섹스도 마찬가지다. 단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물과 상황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을 인위적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 자본주의 한국에서의 구남. 그는 초라한 틈입자에 불과하다.
▲ 불심검문에서 도주한 구남. 이 산속에서의 그의 분노와 절망은 관객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이상이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내가 중얼댄 ‘사람 백정’ 이야기의 까닭이다. 면가의 도끼날에 쓰러지는 사람의 수는 너무 많다.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무용(武勇)이 아닐진대 그 넘치는 폭력을 쉽사리 소화하는 관객을 찾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영화를 반만 봤다’라고 중얼거린 어떤 여성 관객의 지적도 같은 맥락일 터이다.

 

이런 줄거리를 따라오다 보면 ‘뛰어난 시나리오’라는 찬사가 목젖에 슬슬 걸리기 시작한다. 결말의 반전도 마찬가지다. 반전이 반전답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설득력인데 글쎄, 결말을 보고 재구성하는 관객의 추리는 매끄럽지 못해 여기저기서 걸린다.

 

‘극사실’과 낭자한 ‘폭력’

 

영화가 자랑하는 ‘극사실’은 영화의 중간쯤에서 이미 꼬이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그때까지 견지해 온 리얼리티는 이내 넘치는 액션과 스릴로 대체되면서 점점 ‘덜 사실적인 이야기’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영화는 관객들이 그걸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을 만큼의 속도감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둔한 관객에 불과한 내 눈에 밟힌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극적 완성도는 별로 나무랄 데가 없어 보인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들에게 잡념을 허용하지 않는 속도감 있는 전개도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영화의 목표가 ‘재미’였다면 성공이다. 그러나 그 재미가 ‘현실적 삶’과의 틈새가 벌어지는 가운데 새록새록 쌓인 것이었다면 그것은 ‘절반’에 그칠 듯하다.

 

구남이 처음부터 끝까지 비교적 일관되게 지켜온 인간적 성격으로 이야기를 밀고 갔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재미’는 덜했을지 모르지만, 영화 들머리에서 보여준 구남의 내레이션의 의미가 훨씬 더 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을까.

 

“내 열한 살 때 동네에 개 병이 돌았다. 우리 집 개도 개 병이 걸렸는데 젤 먼저 제 에미를 물어 죽이더니만 후에는 제 아가리로 물어 죽일 수 있는 것들은 몽땅 물어 죽였다. 며칠 뒤 삐쩍 마른 꼴로 나타난 그 개는 천천히 드러누워 죽었고, 나는 개를 묻어줬다. 어른들은 그날 밤 묻힌 개를 꺼내 잡아먹었다. 다시 개 병이 돌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새삼 다시 영화의 인과 관계를 재구성하는 등 영화를 천천히 복기(復碁)해 본다. 복기를 통해서 하나씩 떼어내 확인하는 영화는 내가 본 그것과는 달라진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복기를 통해서도 그 견실한 짜임이 달라지지 않는 영화가 모름지기 ‘좋은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2011. 1. 6. 낮달

 

**이 글을 쓰는데 계속 ‘황해’에 밑줄이 그어졌다. 확인해 보니 ‘황해’는 주로 중국에서 일컫는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서해’로 쓴다고 한다.(한겨레신문 자료) 글쎄, 동해를 ‘일본해’라고 쓰지 않는 것처럼 서해로 쓰는 게 맞겠다. 이 영화에서는 구남의 입장에서 보면 황해가 맞다. 그런데, 인천에서 간행되는 유명한 계간지 이름은 <황해문화>다. 이는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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