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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문숙’, <삼포 가는 길>, 길 위의 사람들

by 낮달2018 2019.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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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과 영화 <삼포 가는 길> 그리고…

▲ 이만희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된 로드무비 삼포 가는 길(1975). 문숙이 백화 역을 맡았다.

<한겨레>자연치유라는 책을 냈다는 기사가 언뜻 보이더니 <씨네 21>에서는 배우 문숙의 인터뷰가 실렸다. 무심하게 기사를 읽는데, 문득 그녀가 나와 거의 동년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서른몇 해 전 싱그러운 스무 살 처녀였던 이 배우는 이제 쉰여섯 초로의 여인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야위었지만 풍성해진 표정 뒤편으로 나는 삼십오 년 전, 대구 만경관 극장에서 만났던 스물한 살의 문숙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몸을 낫게 하는 건 취함아닌 비움’”이라며 그녀는 미국 생활 30년 만에 자연치유 전문가가 되어 돌아왔다고 기사는 전한다.

 

 이만희 영화 <삼포 가는 길>의 백화 돌아오다

 

다른 기사는 뒤늦게 그녀가 2007년에 펴낸 책 마지막 한해-이만희 감독과 함께한 시간들을 중심으로 배우 문숙과 이만희 감독, 그리고 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영화를 더듬고 있다. 나는 기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그녀가 이만희 감독의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만희 감독이 세상을 떠난 것은 영화 삼포 가는 길이 개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문숙은 이만희의 그 마지막 1년을 함께 했다는 것이다.

 

스무 살 무렵이라면 연예계의 가십에도 그리 어둡지 않았던 때였을 텐데 글쎄, 이만희와 문숙의 23살 차이의 사랑에 대해서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야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도 특별한 감상은 없다. 쉰이 넘은 초로의 여인이 떠올리는 20대의 사랑이 무어 그리 흥미롭겠는가.

 

그때야 사람들은 둘의 염문을 찧고 까불었겠지만, 숱한 사람들처럼 그들은 사랑해 함께 살았고, 그리고 죽음으로 헤어져야 했다. 감독과 배우라는 특수 신분을 걷어내면 그들이 나눈 인연도 뭇 사랑과 다르지 않으리라. 나는 잠깐 이만희 감독의 딸인 배우 이혜영을 떠올렸다. 둘의 나이차가 어떤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때 이혜영은 중학교에 갓 입학하던 때였다고 한다. 내 궁금증은 고작 거기까지였다.

▲ 문숙의 최근 모습과 펴낸 책들. 미국 생활 30년에 그는 자유치유전문가가 되어 돌아왔다.

문숙의 삶과 사랑에 대해서 나는 별 흥미가 없다. 그녀가 썼다는 자연치유 체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흥미가 없다는 것일 뿐,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틱한 사랑과 삶이 한갓진 가십이 아니라 쇳내 나는 사실적 삶이듯 그녀가 이른 자연치유에 대한 깨달음도 만만치 않은 체험의 결과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숙이 내게 떠올려 준 것은 그녀가 출연한 영화 <삼포 가는 길>이고 그 삼십몇 년 전의 아득한 기억들이다. 그녀는 나와 일면식도 없을뿐더러 내 삶과는 아주 먼 은막의 스타였지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내 삶의 어떤 장면에선 아주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문숙이 떠올려 준 30년 세월

 

▲ 황석영 <객지>초판본

 

문학 교과서에 실린 황석영의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을 거푸 세 해째 가르쳤다. 발표된 지 30년이 넘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 받았던 감동도 아련하지만 이전에는 무심코 지났던 소설의 행간에 서린 곡절 많은 삶을 읽게 되는 것은 순전히 나이의 힘덕분이다.

 

아이들에게 교과서에 생략된 부분을 인쇄해 나누어주고 전편을 살피는데 어떤 장면을 읽다가 나는 목이 메기도 했다. 시치미를 뗐지만 아이들은 문학교사의 목소리가 젖어 있는 걸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 가끔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소설 삼포 가는 길을 나는 어디서 읽었을까. 창비(당시 창작과비평사)에서 <객지(客地)> 초판이 나온 게 1974년이니 그해에 형이 사온 그 책에서 삼포 가는 길을 읽었다고 추리하는 게 사실에 제일 가까울 듯하다. 이만희가 만든 영화 <삼포 가는 길>이 개봉된 것은 이듬해 5월이었다. 나는 그해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었다.

▲ 영화 '삼포 가는 길'의 배우들. 김진규(정씨)와 문숙(백화), 백일섭(노영달). 떠돌이 노동자와 도망친 작부다.

나는 대구 만경관 극장(지금은 멀티플렉스 극장 ‘MMC 만경관’)에서 영화를 개봉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개봉 첫 날, 동갑내기 애인과 함께 만경관을 찾았다. 몇 회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객석은 한산했다. 우리는 지정 좌석이 아닌 적당한 데 자리를 잡았다. 애인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원작의 감동을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맛보겠다는 기대로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여주인공 백화역이 신인 여배우 문숙이었고, ‘영달은 백일섭, ‘정씨역은 김진규였다. 나는 영달 역으로 백일섭은 맞춤하다고 생각했고, 정씨 역의 김진규도 무난한 배역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문숙의 덩그런 큰 눈동자와 외눈 쌍꺼풀의 백화를 잇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서 캐스팅에 대해서도 논평할 준비를 잔뜩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정시에 불이 나가고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고 난 뒤 영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원작의 장면과 장면을, 영화의 그것으로 일일이 비교하면서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장편의 원작은 영화화하면서 중요한 이야기의 맥락을 취사선택해야 하지만, ‘삼포 가는 길은 단편이었다. 원작을 충실히 살리되, 필요하면 가외의 이야기를 덧붙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 <삼포 가는 길>은 1975년 작품이라 변변한 스틸 컷도 인터넷에서 구하기 어렵다. 드문 칼라 스틸이다.

영화가 원작에다 얼마만큼의 이야기를 덧붙였는지는 기억에 희미하다. 정씨가 10여 년 징역을 살았던 이유가 얼핏 밝혀진 듯도 한데 확실하지 않다. 나중에 KBS문학관에서 이 작품을 단막극으로 만들었을 때 정씨는 아내의 간통을 목격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걸로 처리했는데 영화도 같은 방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TV극에서는 탤런트 백윤식이 간부로 나왔다.)

 

감천을 향해 가던 세 사람은 우연히 어떤 상갓집에 들러 거기서 요기를 하게 된다. 술잔을 낫게 마신 일행이 노래와 춤으로 질탕하게 놀다가 주인과 동네사람으로부터 쫓겨나는 대목이 기억에 아련하다. 글쎄, 그런 대목이 이야기의 흐름을 좀 생뚱맞게 끌고 가지 않았나 싶었던 것 같다.

 

일행이 한 폐가의 봉당에서 불을 피우고 신을 말리는 장면은 꽤 애잔하게 가슴에 남아 있다. 영화의 스틸 사진 속에서는 비스듬히 누운 정씨 옆에 기대고 있는 백화의 모습이 애처롭다. 모닥불 위에 걸어놓은 낡은 작업화, 양말, 장갑 따위가 그들의 고단한 삶처럼 초라했다. 소설 속, 예의 장면은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

▲ 감천으로 가는 도중 일행은 폐가의 봉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잠깐 쉬어간다. 백화와 정씨.

백화가 먼저 그 집의 눈 쌓인 마당으로 절뚝이며 들어섰다. 안방과 건넌방의 구들장은 모두 주저앉았으나 봉당은 매끈하고 딴딴한 흙바닥이 그런 대로 쉬어 가기에 알맞았다. 정씨도 그들을 따라 처마 밑에 가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영달이는 흙벽 틈에 삐죽이 솟은 나무 막대나 문짝, 선반 등속의 땔 만한 것들을 끌어 모아다가 봉당 가운데 쌓았다. 불을 지피자 오랫동안 말라 있던 나무라 노란 불꽃으로 타올랐다. 불길과 연기가 차츰 커졌다. 정씨마저도 불가로 다가앉아 젖은 신과 바짓가랑이를 불길 위에 갖다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이 생기니까 세 사람 모두가 먼 곳에서 지금 막 집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고, 잠이 왔다. 영달이가 긴 나무를 무릎으로 꺾어 불 위에 얹고, 눈물을 흘려 가며 입김을 불어 대는 모양을 백화는 이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원작과 영화 사이에서 더러는 머리를 끄덕이고 더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우리는 숨을 죽이고 이야기를 따라갔다. 나는 애인이 실망할까 봐 잔뜩 맘을 졸였는데 정작 본인은 차분하기만 했다. 나는 내 선택이 괜찮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영화에다 후하게 점수를 줄 요량이었다.

 

 원작은 우연히 길 위에서 동행이 되었던 두 사람의 뜨내기 노동자와 작부의 동선을 따라가다 그들이 나누는 내밀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인연은 현실을 넘지 못하고 작별에 이른다. 소설에서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이 무심하게 서술된다.

 

어쨌든…….”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빵 두 개와 찐 달걀을 샀다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뒤차를 탈 텐데…… 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 여자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무도…… 안 가나요.”

우린 삼포루 갑니다. 거긴 내 고향이오.”

영달이 대신 정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 있었다. 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이점례예요.”

여자는 개찰구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에 기차가 떠났다. 

 

 대체로 소설은 오버하지 않는다. 더구나 본격문학에서는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 시절만 해도 영화는 늘 오버했다. 감정의 과잉을 여과 없이 그리는 게 대중적 방식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배우들의 슬픔과 눈물이 관객에게 바로 감정이입되리라는 건, 그러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도대체 쟤들, 왜 저래? ……, 왜 우는데?

 

영화의 해당 부분에서 나는 그예 참지 못하고 애인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정씨와 영달이 백화를 보내는 대목, 즉 작별 장면에서 백화와 영달이 마구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저 눈물을 찍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펑펑 대놓고 배우들은 울어댔다.

▲ <삼포 가는 길>(이만희, 1975) 포스터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야기의 맥락을 아무리 과하게 해석한다 해도 두 남녀가 눈물을 흘릴 이유를 찾는 건 무리였다. 그것은 관객은 물론이고, 배우들조차 설득하기 어려운 눈물로 보였다.

 

애인은 내 의견에 동조한다고 머리를 끄덕였지만 내게도 오버하지 말라는 눈치를 보였다. 나는 얌전히 영화의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35년 전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어디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셨을 것이다. 나는 영화 <삼포 가는 길>을 그렇게 맞이하고 감상했다.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마지막 장면의 오버를 빼면 무난하고 안정적이었던 것 같다. 문숙은 신인치고는 아주 영악해 보였다. 그녀의 개성적인 용모는 내가 그린 백화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녀의 만만치 않은 연기가 그 간극을 메워버린 듯했다. 무엇보다 김진규가 자칫 들뜰 것 같은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균형을 잡아 주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훨씬 쿨하게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감정의 과잉이나 오버액션의 배제가 요즘 한국영화가 가진, 전 시대와는 다른 미덕일 테니 말이다. 작품에서 작별은 붉게 충혈된백화의 눈으로도 충분했다. ‘잊어버리지 않겠다며 자신의 본 이름을 밝히고 떠나는 것만으로도 읽는 이를 적셨을 것이다.

 

그리고 35. 이만희 감독은 그해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린 연인이었던 문숙은 조국을 떠났다. 그 여자는 30여 년의 미국 생활 끝에 자연치유 전문가가 되어 돌아왔다. 단 두 문장으로 정리했지만 떠남돌아옴사이에 아롱진 삶의 곡절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모두가 길 위의 사람들

 

세월은 공평한 것이다. 갓 스무 살, 만경관에서 이만희의 영화 <삼포 가는 길>을 함께 보았던 젊은 연인들은 그 후 부부가 되었다.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스무 살이 훨씬 넘은 성인이 되었고, 이제 이 초로의 시간에 35년 전을 무심히 떠올린다.

 

문숙에게 흐른 시간과 우리들에게 흐른 시간이 어찌 다르랴. 모두가 길 위의 사람들이었다. 감천으로 가는 눈길을 걸었던 1975년의 노영달과 정씨, 이점례의 삶이나 그들의 동행을 로드무비로 만들었던 영화감독 이만희와 배우 문숙도 모두 길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여보우리 <삼포 가는 길>같이 본 거 기억나?

기억하고말고만경관이었지?

 

 일요일 저녁,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 말고 돌아서서 그렇게 되받는다. 그렇다. 문숙이 이만희와 사별하고 혼자서 살아온 것과 달리 우리는 지난 스물몇 해를 같은 길 위를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왔다. 문숙의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남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2010. 6.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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