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일왕을 만난 이명박 대통령의 자세
21일 오후, 일본을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일본 왕궁에서 아키히토(明仁) 일왕 내외를 면담했다고 한다. 오늘 아침 <한겨레>에는 대통령이 일왕의 영접을 받는 사진이 실렸다. 첫 번째 사진은 영접을 나온 일왕 일행과 대통령 일행을 같이 잡은 사진인데 인터넷 <한겨레>에 실린 것이다. 두 번째 사진은 첫 사진을 잘라 대통령과 일왕을 클로즈업한 사진으로 지면에 실린 것이다.
3면에 실린 두 번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잠깐 멈칫거렸다. 일왕 아키히토가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부동의 자세로 손만을 내밀고 있는데도 우리 국가 원수는 15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인 채로 웃고 있는지, 인사말을 하고 있는지 그는 입을 벌리고 있다.
무심히 지나갈 수 있는 풍경이다. 정작 <한겨레>도 이와 관련해 어떤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어쩐지 개운한 느낌은 아니다. 일왕은 일본의 국사에만 관여하는 상징적인 지위만 가졌으니 이 대통령과 같은 국가 원수일 뿐이다. 따로 악수 외에 고개를 숙여 별도의 예를 표시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 땅의 예절 장유유서, 경로의 예인가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아키히토는 1933년생, 이 대통령은 1941년생이니 8년쯤 차이가 나긴 나지만, 국가 원수 간에 나이를 가지고 다툴 일은 없다. 개운하지 않은 것은 결국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한 까닭이었던가.
이 대통령은 앞서 후쿠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일왕 방한과 관련하여 ‘일왕’이라고 하지 않고 ‘천황’이라고 표현하면서 “일본 천황이 굳이 한국을 방문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또 일왕 부처와의 면담에서도 이 대통령은 아키히토에게 ‘아시아 순방’을 권유했다가 답을 받지 못했다 한다.
일본의 전후 책임과 관련해 쏟아낸 그의 위태로운 발언들을 굳이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그의 언행은 사려 깊지 못하다. 일본의 전후 책임과 관련하여 피해자들이 여전히 가슴앓이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가 사과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일본의 망발은 현재형으로 계속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의 자세로 미래 지향적이고 성숙한 파트너 관계’를 되뇌고 있을 때도 일본 외무성은 홈페이지를 통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호혜 평등이란 일방의 아량이나 공치사가 아니라 과거사에 대한 인식의 공유에서부터 비롯한다는 것 상식에 속하는 일이 아닌가.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누리꾼들이 2003년 일왕을 만날 때 꼿꼿이 악수만 나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 등을 올려 비교하면서 ‘굴욕 인사’라는 입방아를 찧고 있는 모양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때 고개를 숙이지 않은 전 국방부 장관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던 보수 언론은 대통령의 ‘과공(過恭)’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외교 과정에서 일어난 한 편의 소화(笑話)로 넘겨 버리기에는 이 한 장의 사진이 주는 느낌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이는 호사가들이 다투어 만들어 낸 뉴스가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과 철학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까닭인 듯하다.
2008. 4.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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