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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너희가 ‘실용 본색’을 아느냐

by 낮달2018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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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당착’? 몰랐지, World Wide가 있다는 걸

 

현 정권의 통치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찬탄을 금치 못하는 바가 하나둘이 아니다. 상식(물론 여기서 말하는 상식은 ‘나의 상식’이다. 2009년의 대한민국에선 상식도 두 가지로 확연히 갈린다.)을 뛰어넘는 정책과 그 집행(때로는 지리멸렬한!) 앞에서 정권의 표정은 넉넉하기 짝이 없다.

 

여론이나 국민의 요구와는 좀 멀게 이루어지는 정책이나 제도라면 다소 민망스럽거나 난처한 표정이라도 지을 만한데, 집권당 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관료인 주무 장관의 표정은 늠름하기만 하다. 정책 혼선에다 문제의 핵심에 대한 이해도 섣부르기 짝이 없는데도, 이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심상함 그 자체이다.

 

국민의 정부를 포함하여, 참여정부까지만 해도 여론이나 국민의 요구와는 거리가 있는 정책을 펴거나 여론의 반발에 부닥치면 다소 계면쩍어하는 낯빛을 감추지 않았다. 권력에도 최소한도 거기에 일정한 문제가 있을 수 있겠다는, 여론의 향배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풍경은 죄 사라져 버렸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인식 앞에서 모든 정책과 제도는 한 바퀴씩 곡예를 부린다. 예의 구호는 모든 정책 전환의 ‘면죄부’로 무소불위의 아우라를 내뿜는다. 여당 의원에게조차 면박을 당하는 주무 장관들의 수준도 거기 한 몫을 더하는 것 같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이들이 딱지 붙인 ‘과거의 좌파(!)’들은 이들에 비기면 꼼짝없는 하룻강아지들일 뿐이다. 그들은 결과와 무관하게 도덕성이나 명분 따위에 집착한 것이다. 긴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얻은 오래된 관습이다. 실제의 손익과 무관하게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중요했던 게다.

▲ 유튜브 동영상 업로드 초기 화면. 동영상 / 댓글 업로드를 제한한다는 안내가 떠 있다.

그러나 경제 대통령을 자임하며 여러 가지 도덕적 흠결의 사(赦)함을 받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뒤 그런 풍속도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어떤 철학적 기초와도 무관하게 거두절미, 현 정부는 모든 정책과 이념의 기초로서 ‘실용(實用)’을 소리 높여 외친다.

 

 '인터넷 실명제' 거부한 구글, 유튜브의 한국 지역 이용자 동영상 업로드 제한

 

정작 그게 실용의 의미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앞서의 정책이나 제도와의 연관성 따위도 변수가 될 수 없다. 아주 당당하게, 어떤 회의도 침범할 수 없는 완고한 태도로 ‘실용!’을 외치면 되는 것이다. 이 논리의 연장선에 오리무중의 대북정책, PSI 참여 문제 등이 뜨악한 표정으로 줄을 서 있다.

 

세계 최대 UCC 사이트 유튜브가 한국의 실명제 도입을 거부했을 때, 야권과 진보 매체들은 한국 정부가 꼼짝없이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썼다. 구글은 인터넷 실명제를 거부하며 한국 유튜브 사이트의 서비스를 제한하기로 했는데, 이 결정이 “이명박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겠다”는 청와대의 방침과 부딪친다고 본 것이다.

 

구글은 유튜브에서 지역을 ‘한국’으로 설정한 이용자는 동영상을 올릴 수 없고 댓글을 달 수 없도록 했다. 이 조치로 한국의 일반 이용자들은 지역 설정에서 ‘한국’만 피하면 동영상 올리기는 제한받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인이 아닌 청와대가 국적까지 바꿔가며 라디오 연설 동영상을 올리기는 ‘난감’하리라고 본 것이다.

 

민주당은 “청와대가 자가당착에 빠졌다”라고 조롱하면서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대한민국이 세계적 망신을 자초한 셈이며, 인터넷 실명제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반증하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또 “(청와대가 유튜브 동영상을 올리기 위해) ‘한국 외 나라’로 설정해 연설 동영상을 올려 국가적 망신을 살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내걸었던 ‘동영상 업로드’ 약속을 슬그머니 접을 것인지 답해야 한다.”라고 비꼬았다.

 

야당의 '자가당착' 조롱을 현 정부의 실용 정신으로 돌파하다

 

그러나 야권은 잘못 짚었다. 유연하기 짝이 없는 현 정부의 실용 정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야권은 자충수로 진퇴양난, 그야말로 ‘대략 난감’에 빠져버린 정부 여당을 상상하며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이른바 ‘좌파의 도그마’에 불과했다. 청와대는 예의 동영상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올리는 것이므로 업로드 시의 국적 따위는 상관없다고 정리했고, 지역을 ‘World Wide’로 설정하여 앞으로도 동영상 업로드는 계속된다고 발표한 것이다.

 

야권은 뒤통수를 맞은 셈인가. 아니다, 야권은 아직도 구시대의 문법을 벗지 못했을 뿐이다. 설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부 기관 청와대가 해외 동영상 서비스를 홍보 목적으로 이용하면서 국가를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로 설정할 수야 있으랴?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 유튜브에 올라 있는 이명박 대통령 연설. 지난 4월 6일 연설이다.

청와대는 일반의 우려를 단번에 불식해 버렸다. 청와대는 “유튜브의 청와대 채널은 처음부터 국내가 대상이 아니라 해외 홍보를 목적으로 개설했기 때문에 청와대 유튜브 채널 설정은 처음부터 ‘한국’이 아닌 ‘전 세계(world wide)’로 되어 있”어서 “대통령 라디오-인터넷 연설은 유튜브의 이번 조치와 관계없이 유튜브를 통해 평상시와 같이 업로드하여 전 세계에 배포”된다고 밝힌 것이다.

 

청와대라고 '한국 외 지역' 설정 못 할 이유 없다! 

 

애당초 국가 통치의 핵심 기관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180도에 가까운 정부의 유연성은 문제를 간단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해외 홍보’ 목적이기 때문에 ‘전 세계’를 설정했다는 해명에 대해 “유튜브의 ‘국가 콘텐츠 기본설정’ 메뉴는 ‘타깃 층’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아니다. ‘한국’을 선택하든, ‘일본’을 선택하든 업로드한 동영상은 전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동등한 조건에서 볼 수 있는데 굳이 불편한 설정을 감수할 까닭이 없다.”라는 반론이 문제가 아니다.

 

청와대의 유연성은 민망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정부와 국가(!)를 구했다. 이 나라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은 해외 누리꾼들에게 대한민국을 홍보하기 위해 ‘전 세계(world wide)’로 퍼져나갈 것이다. 구글은 자사가 정한 표현의 자유 수호 원칙을 지켜낼 수 있고, 청와대는 ‘자가당착’ 아닌, 글로벌한 세계적 홍보를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일련의 소극은 국회 문방위 소속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을 통해 화룡점정을 이룬다. 나 의원은 “(구글이) 표현의 자유와 권리가 우선됐으면 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본인확인 절차를 거쳐서라도 올리고 싶다는 이용자의 표현 자유를 제한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법 제도를 강제하면서 외려 표현의 자유를 거론하는 이 ‘유연성’의 이름은 물론 ‘실용’이다.

 

한때 참여정부 안에서도 실용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금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득의만면, 그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실용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게 아니다. ‘선진화’를 위해 불철주야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이 ‘실용 본색’을 보라.”고 말이다.

 

 

2009. 4.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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