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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그래도 투표는 해야 할 낀데…….”

by 낮달2018 2021.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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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 표가 선거 결과를 바꾸지 못하는 지방선거

▶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정책 경쟁’을 장려한다. ⓒ 중앙선관위 누리집

지방선거가 한 달 반 앞으로 다가왔지만, 우리의 일상은 무심하기만 하다. 거리 곳곳에 대형 간판을 내건 예비후보의 선거사무소가 눈에 띄지만 거기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거의 없다. 내가 이곳 토박이가 아니라서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정작 지역 토박이들도 무관심하기는 매일반이다.

 

도지사 후보는 더러 보도되곤 하니 그런가 짐작하지만, 시장 후보나 도의원·시의원에 이르면 거의 오리무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까닭이야 뻔하다. 이른바 ‘작대기를 꽂아놔도 당선’되는 특정 정당의 본거지라 그 정당의 독주로 여닫는 시장이니 더 말할 게 없다. 어쩌면 선거는 우리의 삶과 무관한 ‘무엇’이 되어 버린 것일까.

 

죽으나 사나 ‘정권 안정’의 고장 경북

 

지난 89년 이후 역대 대통령선거의 투표율(%)이 무려 25% 이상이 떨어졌다는 뉴스가 놀랍지 않은 까닭도 마찬가지다. 제18대 총선의 투표율은 아예 50% 이하로 내려갔고 지방선거 투표율도 이제 50%에 턱걸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투표율 하락은 주로 2·30대 젊은 층의 투표 기피 때문이란다. 이들 2·30대의 투표율은 50·60대 투표율의 대략 절반에 그친다니 유구무언이다.

 

정작 향후 4년을 살아갈 실질적 주역은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관한 판단을 기성세대에 미루어 버린 것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이러한 ‘권리의 포기’는 일종의 ‘역할 유기’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어떤 형식으로든 미래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야 할 젊은이들이 그 정치적 미래를 결정 짓는 권리를 깡그리 5·60대에게 유보해 버린 것은 자못 안타까운 일이다.

 

전체적으로 젊은이들이 투표장에 가지 않는 이유가 정치문화에 대한 실망에서 연유한 것이라면 내가 사는 곳에 투표율이 낮은 이유는 좀 다르다. 앞에서 말했듯, 우리 지역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의 ‘싹쓸이’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총선은 물론이고 지방선거 역시 여당 후보들끼리 각축을 벌이는 게 고작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한 표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아는 것이다. 무소속이 당선되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당선인은 얼마간 말미를 두었다가 다시 여당이 되는 것이다. 이런 패턴의 선거 결과는 호남도 비슷할 듯하다.

 

오늘 자 뉴스에선 유권자 절반이 “야권 단일후보 지지하겠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전한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 만만치 않은 견제론 가운데서도 경북 지역은 ‘60대 이상’과 함께 정권 안정을 지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역에선 야당이 최소한의 인지도를 갖춘 후보조차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니 이 ‘정권 안정론’은 좀 ‘생뚱맞을’ 뿐이다.

 

결국 우리 지역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인 후보에게 표를 주느니 차라리 어디 교외로 소풍이라도 떠나겠다.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도지사, 시장, 도의원, 시의원까지 한나라당 일색을 뽑는 데 들러리 설 이유가 없다는 유권자의 항변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는 셈이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상차림이 멋쩍었던가, 선택의 기준으로 등장하는 개념이 ‘인물론’이다. 성향이 비슷하니 비교 우위에 있는 ‘인물’을 고르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 이론은 견제 세력으로 야당 지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여당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이들의 단골 변이다. 집권 여당의 인재 풀은 야당에 비길 바가 아니니 ‘인물론’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인물? ‘소신’은 ‘당론’을 넘을 수 없다

 

이 나라 정치는 ‘인물’이 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탁월한 개인적 역량을 갖춘 이라도 그는 정당, 정확히 말하면 ‘당론’의 벽을 넘지 못한다. 여기는 집권당 의원이 당의 핵심 공약 집행을 위한 입법에 반대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미국이 아니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당론’을 어기는 정치인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한 몸에 기대를 모으던 이른바 ‘소장파’들도 시간만 지나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걸로 얼추 짐작만 할 뿐이다.

 

최근에 나는 경북의 어떤 초선 광역의원이 재선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지난 4년간의 의정활동에서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 듯했다. 모든 의안에 대한 찬반 소신은 ‘당론’에 의해 거세당하면서 그는 자신이 ‘사기꾼’이 된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그가 건전한 상식을 갖춘 이라는 주변의 얘기는 과장이 아닌 듯했다.

 

멀쩡한 ‘무상급식’이 ‘좌파’의 ‘포퓰리즘’으로 둔갑하는 시대니 ‘당론’이 갖는 무게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소신이 아니라 당론에 따라 의정활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인물론’이 설 자리 따위는 애당초 없는 것이다.

 

‘계급투표’도 아직은 멀다

 

그렇다면 결국 유권자의 선택은 정책을 중심으로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형식으로 가는 게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이 정책이란 놈이 묘하다. 정책이 어떤 계층의 이해와 이어지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이른바 ‘정책선거’의 출발점이어야 하는데 이 역시 만만치 않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계층적 이익과 정치적 판단을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은 아닐까.

▶ 준법 퀴즈 ⓒ 중앙선관위 누리집

‘시장과 시청 소속의 환경미화원이 같은 정당을 지지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시장의 이해가 환경미화원의 그것과 같지 않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정치적 지지는 겹친다.

 

보수 기득권 계층의 ‘세금 폭탄’ 논리를 지지한 이들의 상당수는 세금과는 무관한 저소득 계층이었다지 않은가. 이들 ‘절 모르고 시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기득권 계층은 무슨 생각을 할지 적이 궁금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에는 ‘정책으로 경쟁하고 투표로 말하세요’라는 공명선거 구호가 떠 있다. 역시 ‘정책선거’는 대세인 모양이다. 그러나 ‘정책을 보고 내 계급(계층)의 이해와 일치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게 계급투표라면 이 땅의 계급투표는 아직 멀었다.

 

지방선거의 공약은 지역의 집단 민원을 해결해 주겠다는 토목형이 대세다. 오랜 개발독재 시대를 살아온 유권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개발-토목-건설’ 위주의 활동을 우선순위로 꼽는다. ‘일 잘했다’라는 평가는 다리와 도로를 얼마나 놓았느냐는 거로 가늠되곤 한다. 점잖고 너그러운 지역 유권자들은 자신의 이해 중심이 아니라 오래된 개발 패러다임에 따라 지역 정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 선거에서 새로운 의제로 등장한 ‘무상급식’이 어떤 형식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을지 흥미롭다. 관련 여론조사 결과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에서 저소득(200만 원 이하·53.9%)보다 중간소득(201만~400만 원·66.3%), 고소득(401만 원 이상·55.7%)에서 ‘지지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많아 중산층이 무상급식을 후보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위클리 경향> 기사 참조]

 

‘무상급식’을 가장 반겨야 할 저소득층에서 가장 낮은 응답률을 보인 것은 일종의 미스터리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삶이 아니라 ‘지역과 나라 발전’ 같은 거대 담론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것일까. 정작 후보자들이 저소득층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래도 희망의 불씨는 간직하자

 

앞서 말했듯 지방선거는 다가오고 있지만, 지역은 여전히 뜨뜻미지근하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있다가 익숙한 형식으로 예년과 다르지 않은 투표를 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그렇고 그런 일상은 계속될 것이다. 막상 표를 던질 후보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번 선거는 여전히 일종의 열패감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한나라당과 무소속을 빼면 야당 경쟁자가 전혀 없는 선거, 시민후보나 진보정당조차도 후보를 내지 못하는 지방선거는 단지 하루쯤 임시로 쉬는 공휴일로만 유용할까. 아니다. 그러나 광역 비례대표 의원과 기초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 투표가 남아 있긴 하다. 그것이라도 기다려 붓두껍을 꾹꾹 눌러 찍으면 이 미완의 민주주의, 그 작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간직할 수는 있을까.

 

 

2010. 4.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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