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 미제라블>과 쌍용자동차
변상욱의 ‘기자 수첩’ 이야기
글쎄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엔 이른바 ‘스타’ 기자의 전통이 빈약한 것 같다. 언론계에서야 특종을 놓치지 않는 유능한 민완 기자의 면면이 알려져 있겠지만, 대중들은 기사를 주목할 뿐, 기사를 쓴 기자에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언론계에 리영희, 송건호 선생 등 존경받는 언론인은 적지 않다.
미국의 경우니, 그 지명도가 어떤 수준인지는 알 수 없다. 끈질긴 탐사보도로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파헤쳐 대통령을 사임시킨 <워싱턴 포스트>의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과 보브 우드워드(Bob Woodward) 기자와 같은 무게를 지닌 현직 언론인은 지금 얼마나 될까.
새삼 스타 기자 이야기로 허두를 뗀 것은 요즘 우리 언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실망감 때문이다. 이른바 ‘특보’ 출신의 사장들이 공중파를 접수한 이래 공영방송이 시나브로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이에 대해 현업 방송인들은 파업으로 저항했고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사측의 무차별 징계가 이어지면서 상황은 여전히 악화일로다.
변상욱, <뉴스타파>에서 <기자 수첩>으로
예민한 정치적 의제를 피해 가려는 소극적 보도 태도는 결국 ‘차라리 SBS가 낫다’라는, 전례 없이 상업방송이 오히려 더 균형 있는 보도를 하는 게 아니냐는 역설을 낳기도 했다. 해고된 언론노조 소속의 방송인들이 만들어낸 동영상 뉴스 형식의 대안언론 <뉴스타파>가 진실 보도에 목마른 독자들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 대안언론과 함께 대중들은 <뉴스타파>를 진행한 방송인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다. 최초로 앵커를 맡았던 <YTN>의 노종면 기자나 ‘변상욱 칼럼’을 맡았던 <기독교방송(CBS)>의 변상욱 기자가 바로 그들이다. 진실 보도를 추구한 이 대안언론을 통해서 사람들은 기사뿐 아니라 비로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바라본 것이다.
변상욱 기자는 1983년 CBS에 입사한 이래 편성국과 보도국 기자, 보도국장을 거친 보도국 대기자다. 현재 아침 종합 뉴스 “레이다” 앵커이며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의 ‘기자 수첩’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1986년 한국 민주언론상을, 2005년에는 라디오 시사 부문 방송대상을 받았다.
<CBS> 노컷뉴스의 변상욱 블로그의 이름은 ‘변상욱의 행자 서신’(行者書信)이다. 이 블로그 이름 아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바람처럼 떠도는 비동맹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이라는 소개 글이 붙어 있다. ‘스나이퍼(sniper)’라는 블로그 주소도 심상치 않다. 그가 기사를 통해 ‘저격’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뉴스타파>에서 나는 그를 처음 알았다. 아, 중견의 현직 기자로 이렇게 당당하게 할 말을 다 하는 이도 있구나, 하는 게 첫 느낌이었고, 진실을 저처럼 간명하고 쉽게, 그리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전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게 두 번째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프로필에서 보이듯 그의 귀공자 같은 인상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뒤를 이어 <뉴스타파> 칼럼을 진행한 최용익 기자의 투박하면서도 다소 거친 듯한 인상과 목소리가 환기해 주는 ‘진정성’과는 또 다른 의미의 안정감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변상욱 기자를 다시 만난 것은 요즘이다. 8시 반께 출근하면서 승용차에서 듣는 “김현정의 뉴스쇼”의 ‘기자 수첩’[바로 가기]에서다. 언뜻 귀에 익은 목소리라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쩌면 문학청년들이 선호할 듯한 어휘를 차분하게 펼치고 있는 이는 변상욱 기자였다.
<레 미제라블>과 ‘쌍용자동차’
김현정과 <레 미제라블> 열풍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변상욱은 17년 전 국내에서 공연된 원작 뮤지컬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엉엉 울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때의 감동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영화 <레 미제러블>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했다.
그는 이 ‘돌풍’의 배경을 두고 사회 양극화,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순, 경제 위기 속의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영화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으로 진단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지난 대선의 과정과 결과가 겹쳐지기도 한다면서.
그는 ‘시민들이 창문을 닫는’ 영화의 한 장면을 이야기한다. 시민들은 혁명을 원하긴 한다. 그러나 정작 혁명이 시작되자 실패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슬그머니 창문을 하나씩 닫고 그들을 외면한다. 변상욱은 ‘그들이 창문을 열고 격려해 주었다면, 문을 열고 나왔다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겠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는 예의 장면에서 ‘쌍용자동차 문제’를 생각했다고 했다.
“……노사의 휴직자 복직 합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들이 쫓겨나고 자살하고 숨져갈 때 사람들은 슬그머니 창문을 닫았다. 언론도 정부도 닫았다.’ 사람들은 복직 합의 소식을 환영했지만 정작 희망퇴직자와 정리해고자 문제는 그대로 남았다. 우리 시대의 ‘비참한 사람들(레 미제라블)’은 그대로 남았다…….”
‘기자 수첩’에서 다룬 이야기들은 그의 블로그 ‘뉴스 로그’ 꼭지에 정리된 글로 실려 있다. [“우리 시대의 <레미제라블> 그들에게 문을 열자!”]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그의 육성을 듣는 것과 그의 블로그에서 정리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또 다르다.
‘뉴스 로그’에 실린 글의 목록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예민한 정치 사회적 이슈다. 대선 이후 5명의 노동자가 숨진 상황과 관련해 그는 “박근혜 당선자에게…그리고 ‘비참과 불평등의 냄새’”를 썼고, 정작 사회적 현안은 방치한 채 인수위에만 넘치는 이상 저널리즘을 꼬집는 “인수위 취재기자가 1천 명… 민생 취재에는 몇 명?”을 썼다.
그는 “인수위……”의 후반부에서 국민 방송의 설립 움직임에 반색을 표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언론들이 사회의 최대 관심사이자 뉴스거리인 시민의 언론, 국민 방송에 대한 보도에 인색하다는 걸 정면으로 짚어낸다.
그러나 한국 언론들은 자기들 운명과도 관련된 이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이것이 정치 권력과 자본의 손에 자기 운명을 맡겨 놓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널리즘이 동시대 민중의 운명을 외면한다. 권력의 향배와 눈 맞추기에만 골몰한다. 눈은 침침해가고 돋보기안경을 추켜올리며 글을 쓰는 지금은,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저널리즘이 동시대 민중의 운명을 외면한다”라는 구절의 의미는 무겁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기사를 통해 일관되게 추구하는 관점을 확인하면서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에 대한 언론의 ‘배임’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동설한, 맹추위 속에 고공농성을 택한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대신 다수 언론은 연예인들의 신변 보도에 열을 울리는 것이다.
‘변상욱의 기자 수첩’의 마지막 뉴스는 “용산 참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이다. 오늘(20일)은 용산 참사 4주기다. 그는 대한문 농성장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용산 참사 유족들을 이야기하면서 “국민 입에서 ‘그래도 살아는 있으니까…’라는 말이 나오는 게 대한민국의 국격이고 화합인가?”고 반문한다. 저널리스트로서 그의 관심은 여전히 현실을 떠나지 않고 있다.
정치 권력에 예속된 언론이 진실과 현실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민들이 유튜브와 팟캐스트로 시민 저널리즘을 전파하는 상황, 그것이 바로 우리 언론의 현주소다. 그것은 변상욱 기자 같은 저널리스트 본연의 구실을 다하는 이들이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쯤 우리 사회는 시민들이 ‘대안언론’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될 것인가.
2013. 1.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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