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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여든셋 기초수급권자 할머니의 일백만 원

by 낮달2018 2021.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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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안전망조차 개인의 선의에서 비롯한 베풂에 기대어야 하는 부끄러운 세

▲ 이공심 할머니(83) ⓒ <한겨레>

바야흐로 ‘연말정산’ 시기다. 행정실로부터 월말께까지 연말정산을 마쳐달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고, 우편과 메일 등으로 연말정산용 영수증이 드문드문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산이 끝나면 지난 한 해 동안의 ‘물질적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한 장의 원천징수영수증에 담길 것이다. 그것은 수치로 계량화된 내 삶의 일부일 것이었다.

 

정산이라고 해 봐야 별 건 없다. 인적 공제는 기본공제 외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아이들은 피부양자에서 빠진 지 오래되었고, 경로우대 공제도 장애인 공제도 해당하지 않는다. 의료비는 공제금액에 미치지 못하고 교육비도 빠지니 결국 보험료와 신용카드 사용액, 기부금 난이나 칸을 메울 정도에 불과하다.

 

아름다운재단을 비롯하여 서너 군데에서 날아온 기부금 영수증과 성과급 반환 때 특별기부금 따위의 영수증을 챙기는데 좀 기분이 스산해진다. 국세청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에 들어가니 기부금 난에 우리가 낸 적십자회비 6천 원도 떠 있다. 아내가 교회에서 받아올 종교단체 기부금도 거기 보태질 것이다.

 

소액의 헌금을 새삼스레 확인하는 기부금 영수증을 받아오며 아내는 늘 부끄럽고 겸연쩍어 어쩔 줄 몰라 한다. 자신의 초라한 살림살이를 남에게 꼼짝없이 내놓는 듯한 기분인 모양이다. 정산을 하면서 1년 동안의 수입과 지출, 납세액 따위를 들여다보면 내 기분도 좀 썰렁하고 부끄러워진다.

 

연말정산 때 기억되는 ‘기부금’

 

나는 내가 기부한 소액의 기부금이 구체적으로 내 연말정산에 얼마만큼 도움을 주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으레 그렇게 하는 거려니 하면서 이들 서류를 붙여서 행정실에 낼 뿐이다. 기부금도 법정기부금이나 근로소득금액의 100%를 한도로 공제될 뿐 나머지 지정기부금은 모두 근로소득금액의 10%를 한도로 공제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게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여전히 알 듯 말 듯 하다.)

 

기부금 명세서를 작성하면서 느끼는 민망함은 대부분 비슷할지 모르겠다. 연말에 으레 펼쳐지는 이웃돕기 성금을 내면서도 우리는 약소하게 3천 원, 5천 원을 적어내는데 익숙한 것이다. 액수가 적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성금도 기부도 일종의 관행으로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의 기부 문화는 짧은 것이다.

 

지난 일요일 저녁이었다. 이틀 동안의 나들이에서 돌아와 묵은 토요일 <한겨레>를 뒤적이다가 19면에서 나는 잠깐 숨을 멈추어야 했다. 연합뉴스가 배급한, ‘훈훈한 기부 2제’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기초생활수급권자인 한 할머니가 100만 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했다는 소식이었다.

 

여든셋 할머니의 일백만 원, 그리고 삼성의 200억 원

 

▲ <한겨레>(1.16.) ⓒ <한겨레> PDF

전남 진도에 사는 여든셋의 이 할머니는 다섯 평 단칸방에 보일러도 켜지 않고 전기장판에 의지해 이 겨울을 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이는 ‘자식들 제대로 못 가르친 한’ 때문이라며 수년 동안 모은 쌈짓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 자녀들이 보내준 용돈을 모아 만든 100만 원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의 중학교 학비를 주지 못해 논두렁을 걸으면서 하염없이 눈물 흘렸던 기억’이 아팠다고 한다. 그이가 모은 100만 원의 가치가 액면가의 수백 수천 배가 되는 이유다.

 

상자 기사 안 흑백 사진에서 그이는 웃는 듯 마는 듯했다. 노인들의 모습은 왜 하나같이 비슷한가. 왜 그이들은 애틋한 연민과 희미한 미소로만 세상을 바라보는지……. 나는 공연히 울컥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잠깐 그이가 자식의 학비를 주지 못해 논두렁을 걸으며 흘린 눈물을 생각하고, 학비를 내지 못했던 그이의 아들을 생각했다. 가난에 시달리며 자식들을 길렀던 이 땅의 모든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들의 위대한 모성을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이가 낸 백만 원이 너무 아팠다. 보일러를 틀지 않고 그이가 견딘 추위와 고단한 잠자리가 아팠고,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 나라 복지 체계가 가슴 아팠다.

 

그이의 뜻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그이의 뜻은 마땅히 기려져야 한다. 그러나 그이가 기부한 백만 원이 그이의 얼마 남지 않은 삶에 따뜻한 잠자리가 되는 게 옳다. 장학금으로 쓰일 돈은 마땅히 나라와 지역이 맡아야 한다는 말이다.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의 ‘넉넉한 나눔’

 

도움받아야 할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베푸는 이 ‘넉넉한 나눔’이 미담이 되는 시대는 기부가 문화로서 정착되지 못한 21세기 한국의 서글픈 초상일지도 모른다. 사회 안전망조차 개인의 선의에서 비롯한 베풂에 기대어야 하는 역설의 시간이 부끄러운 까닭은 그래서다.

 

지난 연말부터 시작된 불우이웃돕기는 예년처럼 대기업의 참여로 나날이 액수를 더해간 모양이다. 얼핏 들리는 소식으로도 LG 100억, SK 100억, GS 50억, 한화 30억, 효성 10억, 롯데 40억……. 대한민국 1등 기업이라는 삼성은 200억을 냈다. 체면치레를 제대로 한 셈이다.

 

그러나 그 200억은 지난 연말, 오너인 이건희가 4개월 전 조세 포탈 등으로 선고받은 벌금 1100억 원에 비기면 약소하다. 그는 불과 백일 남짓한 시간 만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형량과 함께 1천억이 넘는 벌금을 고스란히 특사로 상쇄 받은 것이다.

 

대기업들이 다투어 낸 천문학적 기부금에 비기면 할머니의 백만 원은 흔한 말로 ‘껌값’에 그칠 게다. 그러나 거기 깃든 따뜻한 인간, 어머니의 마음은 재벌들이 ‘쾌척’한 그 수십, 수백억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다. 그럼, 그럼 하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일백만 원을 모으기 위해서 견딘 춥고 고단한 일상과 잠자리를 생각하면 죄스럽다. 일만 배의 액면가가 행세하는 현실 앞에서 노인의 힘들여 모은 그 위대한 돈 일백만 원이 억울하고 분하다.

 

기부금 명세서에 우리가 올리는 몇 줄의 기부금도 마찬가지다. 남도의 섬마을, 한 기초수급권자 할머니의 춥고 고단한 겨우살이 앞에서는 그것은 부끄럽고 민망할 수밖에 없다.

 

 

2010. 1.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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