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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서동요’는 ‘맛둥의 노래’다

by 낮달2018 2021.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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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서탑 안에서 사리 봉안 기록판 발굴

▲ 오늘 자 <한겨레> 기사. ⓒ 한겨레 PDF

지금은 터만 남은 익산 미륵사(彌勒寺)는 백제에서 가장 큰 절집이었다. 또 그 절집 금당 앞에 세운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탑이다. 이 탑은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 주는 중요 문화재로 국보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사는 탑의 동쪽에 같은 규모의 돌탑이 있는, 이른바 동서 쌍탑(雙塔)의 배치였음이 밝혀짐에 따라 이 탑은 저절로 서탑(西塔)이라는 본이름을 찾게 되었다. 동탑은 1993년 복원되었는데, 어지간히 눈 밝은 이들도 두 탑이 쌍둥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한다. 동탑은 예산이 부족하여 기계로 깎은 돌로 미끈하게 복원됨으로써 1300년 세월을 꼼짝없이 무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 보수 복원 이전의 미륵사지석탑 서탑(왼쪽)과 보수 복원된 서탑.  ⓒ 문화재청

19일, 해체 수리 중인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탑 안에서 사리 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이 발견되었다고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전했다. 파기만 하면 유물이 쏟아지는 만만찮은 역사의 땅이니 무어 대수로울 수 없는 소식이긴 한데, 이어지는 소식이 심상찮다.

 

오늘 아침 <한겨레>는 “향가 ‘서동요’ 설화에 얽힌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열렸다”라고 전한다. 향가 ‘서동요’는 뭐고 ‘판도라의 상자’는 또 무언가. ‘서동요’의 지은이는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이고 그의 비였던 신라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지은 절이 미륵사다. ‘서동요’는 선화공주를 대궐에서 쫓겨나게 하고, 무왕과 선화를 엮어준 동요다.

 

그런데 서탑 안에서 나온 사리 봉안 기록판에서 백제의 좌평(16관등 중 최고위 관직) 사택덕적의 딸 출신인 백제인 왕비가 건립을 발원했다는 내용이 판독된 것이다. 무왕 때 왕비의 발원으로 절을 세운 것은 맞으나 왕비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귀족이라는 것이다.

 

판독된 기록이 확실하다면 무왕이 참요(讖謠)를 지어 이웃 신라의 선화공주를 취하고 후일 그녀의 발원에 따라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이 설화가 빚어내는 보랏빛 안개와 그 아우라는 사윌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백제의 소년 ‘맛둥’[서동(薯童)]과 신라의 소녀 선화의 극적인 사랑 이야기에서 ‘왕과 왕비’가 되는 후일담을 여지없이 날려버리는 무게를 지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 사리구 출토 모습. 사리항아리와 사리 보봉안기가 보인다. ⓒ 문화재청

<서동요>는 고려 때 일연이 지은 역사서 <삼국유사> ‘기이(奇異)’ 권2의 ‘무왕’ 조에 실려 전하는 서동 설화에 끼어 전하는 지금까지 전하는 향가 중 가장 오랜 노래다. 형식은 네 줄로 된 4구체. 그 시기에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던 수단이었던 ‘향찰(鄕札)’로 기록된 민요로 보기도 한다.

 

善花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薯童房乙                     서동 도련님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노래는 형식도 그렇거니와 그 내용도 단순하다. 선화공주가 사랑하는 이를 두고, 남몰래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다. 처녀가 사내와 어울려 밤마다 몰래 사랑을 나누는 상황이라면 이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지엄하신 공주가 ‘맛둥’이란 미천한 사내와 얼렸음에랴!

 

그런데 이런 노래를 서라벌의 아이들을 마로 꾀어 부르게 한 이가 바로 서동이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로 말미암아 선화공주가 대궐에서 쫓겨나게 되니 이른바 참요(讖謠,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민요)로서의 목적을 십분 달성한 셈이다. 말하자면 서동요는 ‘사랑의 주사(呪辭)’인 것이다.

 

궁에서 쫓겨난 선화에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준다. 이를테면 지참금이랄까, 부왕의 진노를 사서 추방되는 딸에게 모후가 베푸는 사랑이다. 순금을 본 서동은 “마를 캐던 곳에 그게 진흙처럼 쌓였다”라고 하고 결국 이러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장인인 진평왕의 승인을 얻고 인심을 얻어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이 사람이 곧 백제 제30대 임금 무왕이다.

 

무왕이 선화와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현재의 익산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에서 나타났다. 선화가 왕에게 거기 큰 절을 세우기를 원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 법사에게 나아가 못을 메울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하루 밤새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무왕 대의 금제 사리 봉안기

이 이야기는 미륵사 연기(緣機) 설화이기도 하다. ‘미륵’과 ‘용화’는 같은 뜻이니 이 미륵사 창건 설화는 백제 불교는 미륵신앙이라는 걸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한다. 결국 서동과 선화의 사랑 이야기에 담긴 것은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에 담긴 것과 다르지 않은, ‘민중의 소망’이 교직해 낸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지.

 

그러나 이번 발굴로 이 보랏빛 설화는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번 발견을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후대에 꾸며진 허구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해석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두 사람의 결혼 시점인 6세기 후반은 백제와 신라가 군사적 대치를 거듭했던 점도 이 설화가 윤색된 것임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학계 일부에서는 이번에 발견된 명문을 ‘사택덕적의 딸과 왕비가 함께 발원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거나, 선화공주가 무왕의 다른 왕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그나마 선화공주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관점으로 볼 수 있을지.

 

사리 기록을 통해 미륵사의 창건연대(639년)가 확인된 것은 의미 있는 성과다. <삼국유사>는 역사서이면서도 그 기록의 ‘설화성’ 때문에 미륵사지의 구체적 창건연대는 엇갈려 왔다. 6세기의 무령왕 대설, 동성왕 대설, 그리고 7세기의 무왕 대설 등 설이 무성했으나 이번 발견으로 그 논란은 일단락된 셈이다.

 

한편, 사리 봉안 기록과 더불어 발견된 사리 항아리도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 수준을 보여 준다. 항아리에는 연꽃, 당초, 인동초 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전문가는 ‘백제 금동대향로에 필적하는 백제 공예품의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무려 1천 3백 년 전의 세월이 물리적 시간을 뛰어넘어 확인하는 것은 한 시대의 역사다. 그 역사적 유물이 말하는 증거들로 말미암아 그 역사를 구성하는 사실은 자리를 찾고 정리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역사의 틈새를 수놓은 민중의 소망, 문학적 상상력이야 비록 옅어지고 바랠지 모르지만, 그 본질적 지향은 쉽사리 변하지 않을 터이다.

 

서라벌에서 아이들의 입으로 옮겨 다니던 ‘맛둥의 노래’는 용화 세상, 미륵의 나라를 꿈꾸는 당대 민중들의 상상력이 자아낸 뜨거운 ‘희망’의 노래였음은 1천 년의 세월이 그리고 다시 삼백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무왕(武王)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홀로 되어 집을 서울 남쪽 못가에 짓고 살았는데 못에 있는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며, 도량이 한없이 넓었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생활해 나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化)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그가 서울의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자,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그는 마침내 이런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에게 부르게 하였다.

 

善花公主(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薯童(서동) 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동요가 장안에 퍼져 궁중까지 알려지니 모든 신하가 탄핵하여 공주를 시골로 유배시킨다. 공주가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서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공연히 미덥고 즐거웠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서로 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자고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공주는 “황금인데 백 년 동안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동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였었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듣고 깜짝 놀라 “이것은 천하의 보배인데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서동이 “좋소.” 하고 금을 모았으니 그것이 구릉처럼 쌓였다.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 지명법사(知命法師)가 머무는 곳에 가서 금을 보낼 계책을 물으니 “금만 가져오라.”라고 하여 공주는 편지를 쓰고 금을 법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을 써서 그 금을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인해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 법사에게 나아가 못을 메울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그곳에다 미륵삼존의 상을 세우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간판을 미륵사라 하였는데, 진평왕은 많은 공인들을 보내어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

 

    - <삼국유사> 기이(紀異) 권2

 

 

2009. 1.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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