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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VOD로 만나는 ‘꽃보다 할배’들의 젊은 시절

by 낮달2018 2020.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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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만나는 원로 배우들의 전성기

▲ <삼포 가는 길>은 떠돌이 노동자와 작부의 동행, 그들의 연대 의식을 그린 영화다 .

문학 교과서에서 ‘삼포 가는 길’을 가르칠 차례다. 아이들에게 교과서에 생략된 원문을 인쇄해 나눠주고 수업을 준비하면서 영화 <삼포 가는 길>(1975)의 자료 사진을 찾아 나섰다. 30년이 훌쩍 지난 탓인지 마땅한 자료가 눈에 띄지 않았다. 겨우 몇 장의 스틸컷과 아랫부분이 잘린 포스터를 갈무리할 수 있었다.

 

주초에 두 개 반은 그거로 수업을 했다. 스틸컷에 나온 낯익은 배우들은 아이들에겐 낯설기 짝이 없다. 그나마 주인공 영달 역의 ‘백일섭’은 안면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머리를 갸우뚱한다. 분명 칼라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스틸컷은 흑백밖에 남지 않았는지도 의문이다.

 

어저께 <한겨레> 기사를 통해 한국영상자료원(http://www.koreafilm.or.kr/)이 9, 10월 두 달 동안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tvN>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출연한 배우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의 대표작 무료 기획전을 개최한다는 걸 알았다.

 

영상자료원 기획전 <‘꽃보다 할배’의 ‘한국 영화 전성기’>

 

기획전 ‘할배들의 꽃 같은 청춘-<꽃보다 할배)의 한국 영화 전성기’에선 6, 70년대 한국 영화에 출연한 네 명의 ‘할배’ 배우들의 청춘 시절을 보여 주는 총 15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 영화 데이터베이스 동영상(VOD) 사이트(www.kmdb.or.kr/vod/)를 통해 소개되는 영화 가운데 백일섭의 <삼포 가는 길>도 있다.

▲ 영화 < 삼포 가는 길 >의 포스터

덕분에 주중의 두 개 반은 영상자료원의 기획전을 소개하면서 영화 <삼포 가는 길>을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텔레비전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워낙 인기를 끈 프로그램이어선지 아이들은 ‘꽃보다 할배’의 막내 할배라니까 아, 탄성을 지르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주말에 시간이 나면 VOD를 감상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권했는데 어럽쇼, ‘연소자 관람 불가’다. 교과서에 실릴 만큼 평가를 받은 문학작품이고 정작 작품 속에서 남녀 주인공인 영달과 백화는 입맞춤조차 나누지 않은 사인데, 무슨 ‘연소자 불가’인가 머리를 갸웃했다.

 

영화가 개봉된 1975년에 나는 갓 스물, 동갑내기 여자 친구와 함께 대구 만경관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한창 영화를 즐기던 때인데다가 푹 빠졌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 개봉 날을 기다렸다가 본 영화였다. 엔간히 만든 영화도 원작을 넘는 게 쉽지 않다. 나는 적이 실망한 나머지 여자 친구에게 신경질을 부렸던 것 같다. [관련 글 : ‘문숙’, ‘삼포 가는 길’, 길 위의 사람들]

 

아마, 백화와 정 씨의 과거를 그리는 장면에서 이른바 필요 이상의 ‘애정 신’이 있었지 않았나 싶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부모님과 같이 볼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은 시간이 될 거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영화의 세례를 받은 아이들이 1970년대의 영화와 표현방식을 이해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 오래된 기억을 확인할 겸 VOD로 <삼포 가는 길>의 몇 장면을 다시 보았다. 역시 그렇다. 원작의 큰 골격을 살렸지만, 세부적인 장면에서는 다른 부분도 많다. 그 시절 영화가 다 그랬듯 표현도 연기도 다소 과장되어 보인다. 사랑이든 이별이든 매우, 이른바 ‘쿨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21세기의 영화 문법으로 <삼포 가는 길>을 새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 한국영상자료원의 기획전 소개 화면 ⓒ 한국영상자료원 누리집 갈무리

VOD로 볼 수밖에 없는 점이 아쉽지만, 3, 40년 전의 영화를 새로 만나는 일은 흥미로울 듯하다. 그것도 ‘할배’로 불리는 원로 배우들의 청년 시절을 새로 만나는 일이다. 몇몇 작품은 이런저런 이유로 내게도 낯익다.

 

이순재의 <분례기>(1971)는 방영웅의 장편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1967년 ‘창작과비평’을 통해서 발표된 <분례기>는 시골 여인 ‘똥예’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토속적인 문체와 대담한 성 묘사 등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나는 고교 때 삼성출판사에서 낸 빨간 표지의 문고본으로 <분례기>를 읽었지만 언제 그게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었나 보다.

 

이순재의 <막차로 온 손님들>, 신구의 <파계>

 

<집념>(1976)은 드라마로도 방영된 ‘허준’의 일대기다. 이은성 작가가 쓴 원작 <동의보감>도 내 서가 어느 구석에 꽂혀 있을 것이다. 1975년에 방영된 드라마 <집념>에서 허준 역은 김무생이었는데 이듬해 만들어진 영화에선 이순재가 그를 대신한 것이다. ‘허준’역은 90년대 이후에는 서인석, 전광렬 등이 맡았는데, 이순재는 서인석이 주연한 드라마에선 스승 ‘유의태’ 역을 맡은 것으로 기억한다.

 

15편의 기획전 상영작 가운데 <삼포 가는 길>을 빼고 내가 본 영화는 <파계>와, <지하실의 7인>, <별들의 고향> 등 모두 세 편이다. 신구의 <파계>(1974)는 '괴짜 감독'으로 불리는 김기영의 작품인데, 나는 그걸 지금은 없어진 대구역 앞 개봉관 대구극장에서 보았다. 내 기억에 <파계>의 원작은 고은 시인의 소설이다. 그러나 한국 영화 데이터베이스(KMDB, 이하 ‘한영디비’)의 영화정보에는 원작이 밝혀져 있지 않다.

 

<파계>의 줄거리는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박병호(그는 당시 <TBC> 전속 탤런트여서 <TBC>가 나오지 않는 지방 시청자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다.)와 최불암은 생각나지만, 출연 배우로 신구는 기억에 없다. 아마 그때만 해도 신구는 일반에 그리 알려진 배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0대였던 임예진이 여승으로 나와 연비(燃臂, 팔을 태우는 불교 의식)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신구가 출연한 나머지 영화에도 신구는 조연이었다. 한영디비의 해설에 따르면 신구는 젊은 시절에 ‘악역 전문배우’이기도 했단다. 반드시 주연 배우에게만 ‘그의 영화’라는 표현이 허용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배우를 주연으로 기용한 영화가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영화계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할배’로 뒤늦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순재, 신구, 박근형은 가장 폭넓은 연기력을 갖춘 국내 최고의 배우다. ‘위대’를 함부로 붙이는 시대이긴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헌사가 전혀 과하지 않다. 나는 ‘KBS 무대’의 ‘무명’(이광수 원작)에서 열연한 신구의 귀기 서린 연기를 아직 잊지 못한다.

▲ 한국영상자료원의 기획전 상영작들 ⓒ 한국영상자료원 누리집

박근형 출연작으로 소개된 <지하실의 7인>(1969)을 본 것은 중학교 때로 달성동의 한 재개봉관에서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배우는 허장강과 윤정희, 김혜정 등이다. 특히 이른바 ‘육체파’ 배우로 불린 김혜정의 육감적인 연기와 표정은 충격적이었다.

 

박근형의 <지하실의 7인>, <설국>, 백일섭의 <별들의 고향>

 

한영디비의 영화정보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박근형은 물론, 이순재도 출연했다. 성격배우 이예춘(배우 이덕화의 부친)과 윤양하, 윤소라의 이름도 보인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때 그런 배우들을 알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던 탓이었을 것이다.

 

<별들의 고향>(1974)은 내가 고3 때 본 영화다. 최인호의 이 소설이 <조선일보>에 연재될 때부터 나는 거기 심취해 있었는데,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경아’의 삶과 사랑을 풀어갈지가 무척 궁금했다. ‘연소자 관람 불가’였지만 나는 친구와 함께 태연히 극장에 입장했다.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삼포 가는 길>과 대동소이하다. 나는 경아 역의 안인숙도, 문오 역의 신성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장희의 음악만이 원작소설의 느낌을 그나마 재현했을 뿐이라고 여겼다. <삼포 가는 길>과 달리 <별들의 고향>은 장편이었다. 이야기를 늘려야 하는 단편과 줄이고 압축해야 하는 장편을 영화로 각색하는 것은 반대지만 그 시나리오가 영화의 완성도를 가르는 변수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진실이다.

▲ 6, 7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로 불린 문희, 윤정희, 남정임(왼쪽부터)

나는 <파계>와 <지하실의 7인>은 다시 한번 볼 작정이다. 옛 기억을 되살리면서 3, 40년 전의 우리 영화를 섭렵하는 것도 한가위 연휴를 보내는 맞춤한 시간이 될 듯하다. 그리고 보지 못한 작품 가운데서는 <막차로 온 손님들>과 <분례기>, 그리고 <설국>을 보고 싶다.

 

작가 홍성원 원작으로 남정임과 문희가 공연한 애정물(<막차로 온 손님들>)과 윤정희가 주연한 토속적 작품(<분례기>) 속 이순재의 연기를 확인해 보는 것도 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이른바 여우(女優) 트로이카 시대의 세 여배우, 문희와 윤정희, 남정임의 모습을 다시 만나는 것도 가외의 소득일 수 있겠다.

 

알다시피 <설국>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중후한 신사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상종할 수 없는 인간 말종의 역할도 징그럽게 소화해 내는 대배우 박근형의 모습을 통해서 노벨상 수상작에 대한 실망을 만회해 볼 생각이다.

 

대부분의 복합상영관에서 채택하고 있는, 와이드 스크린이라고 하는 비스타 비전(화면비 1.85:1)에 익숙한 눈에 수십 년 전에 만든 시네마스코프(CS, 2.35:1) 화면은 낯설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컴퓨터 모니터의 한정된 화면으로 영화를 감상해야 하는 건 고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십 년 전의 한국 영화, 그 시절의 배우를 만나는 일이라면 마땅히 그쯤은 지불해야 할 용의가 있어야 할 터이다.

 

 

2013. 9.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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