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2010)
영화가 환기해 주는 씁쓸한 ‘현실’
‘허구를 압도하는 현실’이란 명제가 공공연히 사람 입에 오르내린 게 언제부터일까. 이전 시대만 하더라도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허구의 세계를 통해서 사람들은 ‘일탈의 현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현실은 허구의 상상력을 간단히 넘어버렸다.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그걸 구태여 확인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못 된다. 그런 끔찍한 현실을 굳이 곧이곧대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상황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연쇄살인 사건, 경찰·검찰과 스폰서 간의 유착과 기업의 입찰 비리 따위는 매우 낯익은 것이다. 모두가 우리의 기시감을 유발하는 데 과부족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진 것은 그런 비리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추정’이거나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일 뿐이다.
그래서다. 영화가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 비리와 유착의 디테일이 영화를 보는 내내 어깻죽지를 내리누르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그것은 사건과 사건, 인물과 인물 사이의 유기적 관계가 환기해 주는 사실감이나 그런 리얼리티에 힘입어 이루어진 영화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관객의 상식을 비웃어 버리는 것이다.
‘조작된 사건을 둘러싸고 부당한 거래를 시작한 경찰, 검사, 스폰서의 대국민 조작이벤트가 시작된다!’
‘뉴스보다 생생하고 드라마보다 공감되는 부·당·거·래’
‘대한민국의 오늘을 그대로 담아낸 리얼 드라마’
제작사의 과장 섞인 광고 문구다. 여기서 ‘과장’이라 함은 그것이 현실을 튀겼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현실을 바라보는 감독의, 요샛말로 ‘쿨’한 태도를 이른다. 당연히 영화는 고전적인 ‘고발 영화’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이 점은 “‘사회 고발’, ‘현실 비판’ 등의 사회적 메시지가 아닌 치열한 조직사회에서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았다”라는 영화소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검찰과 경찰의 존재 방식?
영화는 국가 권력 기구인 검찰과 경찰의 존재 방식을 상징적으로 시사한다. 그러한 기구들이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건 순진하다. 연쇄살인범은 검거되어야 한다. 단 그것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관심과 국민의 공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진범’ 아닌 ‘배우’를 만들어 사건을 종결지으려 한다.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인지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경찰과 검찰, 불법을 일삼는 기업인들의 삼각 동맹은 그게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관객들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이 ‘진범 조작’은 그들에겐 ‘이벤트’인지 몰라도 그 희생자들 편에서 보면 범죄고 공포 자체다. 관객들로서도 ‘비분강개’ 이전에 저게 현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등허리가 서늘해질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재현되는 경찰이나 검찰의 모습이 현실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는 우린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가 기본적으로 리얼리티를 지향하는 예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부당거래>에서 그려지는 검경의 모습은 일종의 미니어처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영화 <부당거래>의 줄거리
2010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이벤트!
범인이 없으면 만들어라!
온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연쇄살인 사건. 계속된 검거 실패로 대통령이 직접 사건에 개입하고, 수사 도중 유력한 용의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경찰청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든다. 가짜 범인인 ‘배우’를 만들어 사건을 종결짓는 것!
이번 사건의 담당으로 지목된 광역수사대 에이스 최철기(황정민). 경찰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줄도, 빽도 없던 그는 승진을 보장해주겠다는 상부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그는 스폰서인 해동 장석구(유해진)를 이용해 ‘배우’를 세우고 대국민을 상대로 한 이벤트를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다.
한편, 부동산 업계의 큰손 태경 김 회장으로부터 스폰을 받는 검사 주양(류승범)은 최철기가 입찰 비리 건으로 김 회장을 구속시켰다는 사실에 분개해 그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때마침 자신에게 배정된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조사하던 주양은 조사 과정에서 최철기와 장석구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을 알아차리고, 최철기에게 또 다른 거래를 제안하는데…….
각본 쓰는 검사, 연출하는 경찰, 연기하는 스폰서…
더럽게 엮이고 지독하게 꼬인 그들의 거래가 시작된다!
- <다음(daum) 영화>에서
무엇보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검경의 모습은 이른바 ‘조직’이 가진 생리는 ‘조폭’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애매하게나마 깨우쳐준다. 이른바 이들 ‘조직’은 그것이 배타적 응집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엄격한 위계로 관리된다는 점에서 검경의 그것과 조폭의 생리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차이는 그런 위계의 관리와 집행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다. 조폭의 그것이 즉물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라면 경찰에서 검찰로 갈수록 그 방식이 세련되거나 외피를 쓴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조폭의 세계에선 신체적 폭력과 같은 ‘물리적 힘’이 주로 쓰이지만, 검경에선 위계가 가진 영향력이 그것을 대신할 뿐이다.
영화에선 경찰대 출신과 비경찰대 출신 경찰들의 갈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힘(권력)’에 대한 선호는 승진 지상주의로 드러나고 그것을 좌우하는 게 바로 ‘출신’이다. 세상은 21세기를 구가하지만 국가 권력 기구 안에서는 여전히 전근대적 역학관계가 관철되고 있는 셈이다.
검경의 갈등도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기소독점권을 가진 검찰의 수사 지휘를 받아야 하는 처지여서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검찰을 바라보는 경찰 내부의 시선은 곱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존중하는 척하긴 하지만, 경찰을 바라보는 검찰의 시선에도 경멸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검사 주양을 통해서 검찰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법시험이 나이롱 뽕’이 아니라는 사실처럼 보인다. 그것은 ‘까불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자신의 ‘독선’을 확인하는 오만으로도 읽힌다. 대상은 경찰만이 아니다. 유착하고 있는 자본에 대해서도 ‘비록 너희와 유착하지만, 검찰을 좆같이 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검사 주양(류승범)의 광기 어린 행동을 지배하는 원천은 그러한 ‘힘과 권위’에 대한 넘치는 자부다. 그 자부는 약자인 경찰에게는 비열한 가학으로 나타나지만, 강자인 상사에게는 꼬리를 사리는 비굴로 얼굴을 바꾼다. 검찰과 언론의 유착과 결탁도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빛낸다. 자신에게 유리한 보도를 위해서 주양은 기자에게 성 접대와 고가의 선물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빛나는 연기, 그러나 결말은 군더더기
배우들의 몸에 붙은 연기도 영화를 빛내고 있다. 황정민의 절제된 연기는 류승범과 류해진의 능란한 연기와 어울려 튀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의 독특한 마스크가 <너는 내 운명>과 <부당거래>를 오가는 힘인 듯하다.
조연들도 부시다. 천호진의 관록, 이성민(MBC-TV 주말드라마 <글로리아>의 나이트클럽 MC역), 정만식(<똥파리>에서 주인공 양익준의 친구 역), 마동석, 송새벽에 이르기까지 단단한 조연진이 꾸리는 리얼리티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수훈 갑들이다.
사족이다. 애당초 류승범 감독은 이 영화를 ‘고발’이 아니라 ‘현실’로 그렸다고 했지만, 내게 결말 부 10여 분의 내용은 군더더기처럼 보였다. 결말의 반전도 씁쓸했지만, 그 디테일이 꼭 그런 식으로 가야 했는가 싶어 아쉬웠다. 감독은 현실을 쿨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겐 그게 마치 지금까지의 현실을 새삼 ‘만화’로 되돌리는 패착 같았다.
보도에 따르면 권력 실세인 이재오 특임장관이 이 영화를 보고 그 감상을 트위터에 올렸다고 한다. 그의 반응은 ‘검·경은 그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궁금하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에 제시된 ‘부당거래’는 단지 검경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재오 장관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나는 꽤 궁금해진다.
2010. 12.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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