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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도가니> , 야만의 세상, 혹은 성찰

by 낮달2018 2020.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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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소재의 영화 <도가니>

▲ <도가니>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공유와 정유미.
▲ <도가니>의 포스터

며칠 전, 인근 복합상영관에서 요즘 한참 ‘뜨고’ 있는 영화 <도가니>를 보았다. 그러려니 했지만, 시작 시각을 기다리는 내내 영화관 앞은 사람들로 꽤 붐볐다. 예상을 웃도는 열기에 딸애와 나는 마주 보며 정말, 동의의 눈짓을 나누었다. 거기서 영화를 보러 온 지인을 두 사람이나 만났으니 가히 ‘도가니’의 열기는 뜨겁다고 할 수밖에 없다.

 

관객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간대(밤 8시)이긴 했지만 168석의 자리를 거의 채운 채 영화는 시작되었다.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화면에 몰입하는 것처럼 보였다. 관객으로 가득 찬 실내는 금방 후덥지근해져서 우리는 겉옷을 벗어야 했다.

 

“안동에 오고 처음이네”
“<왕의 남자> 때도 아마 이 정도는 들어왔을걸요?”

 

영화가 ‘뜨고 있다’면 당연히 이유가 있다. 개봉한 지 일주일 만에 <도가니>에 든 관객은 159만이라고 한다. 진작 나온 원작소설은 새로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했으며, 언론은 관련 기사를 양산해 내느라 바쁘기 짝이 없다. 그뿐인가. 4년 전에 개정을 반대해 관련 법안을 폐기했던 여당이 여론에 몰리자 새로이 법 개정에 나서는 상황이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원작자 공지영 작가는 <도가니>의 흥행 돌풍을 예상하지 못했단다. 2009년에 나온 원작은 영화화 후 18만 부가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1위로 떠올랐다고 한다. ‘냄비’처럼 단시간에 끓어오르고 이내 식어 버리는 사회 분위기는 이런 극단의 쏠림을 연출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내린 공지영의 진단은 사뭇 긍정적이다.

 

“남의 아픔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변한 것 같아요. 남의 불행에 무관심하면 안 된다는 열망들이 살아난 것 같아요. 경쟁을 심화시켜 끊임없이 낙오자를 양산한 이명박 정부 들어서 생긴 변화 같아요.”  

 

<도가니>에 쏠리는 관객들의 발길과 한진중공업의 희망 버스로 모인 시민들의 분노를 동렬에 두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나 <도가니>에서 환기된 폭력은 동질적이다. 이들 폭력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열악한 안전망이라는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구조’라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선의나 노력에 따라 바뀌거나 좋아질 수 없다는 뜻이다.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식이고 그 운영이라는 원론은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될 수 없는 열악한 현장 앞에서는 ‘풍월’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는 여론과 사회의 관심도 그 점에서는 오십보백보다.

▲  < 도가니 > 의 장애아들 .  이 아름다운 아이들은 끔찍한 폭력에 희생된다 .

<도가니>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관련 단체들의 투쟁이 절박하게 이어졌고, PD수첩 등에서도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러나 지난 6년 동안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관련 영화 한 편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상황이 어쩐지 생뚱맞고 미덥잖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광주교육청 국정감사에 나온 인화학교 교사(당시 사건 폭로한)의 항변이 기우로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그간 청와대, 교육청 등 관계기관에 수 차례 진정을 했지만, 누구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말해 감사장을 정적에 빠뜨렸다고 한다. 그가 인터뷰에서 지적한 부분도 비슷하다.

 

“(인화학교 문제에 대한 관심이) 거품처럼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언론도 단순 뉴스 분량 채우기가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번에도 그냥 흐지부지된다면 장애인(피해 학생들)을 두 번, 아니 세 번 죽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행정기관이나 교육청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언론이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관심을 두고 계속 갈 것인지 걱정이다.”

 

뒤늦게 원작을 읽는 대신 보기로 한 영화였다. 그러나 정작 영화관을 나서는 기분은 씁쓸하기만 했다. 영화가 새삼스레, 그리 새롭지 않은 방식으로 제기한 문제의 무거움 앞에서 배우들의 연기나 영화의 완성도를 이야기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나는 <도가니>에 펼쳐진 우리 시대의 ‘야만’이 전개되는 방식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내게는 영화의 배경과 사람들, 그들이 맺는 관계, 문제의 해결 방법 따위가 마치 정교하게 제작된 미니어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6년, 새삼스레 우리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

 

1. 무진, 어디에나 있는 도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무진’이다. 일찍이 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창조한 공간인 그 ‘안개 나루’[무진(霧津)]는 읍이지만 이 영화의 배경은 도시다. 김승옥의 무진이 작가의 고향인 순천이었다던가, 영화 속의 배경이 어디인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김승옥의 소설에서 무진은 ‘1960년대의 혼돈’을 상징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무진의 모호한 안개 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고 하지만 결국 현실과 타협, 서울로 돌아가고 만다. 무진을 떠나면서 주인공이 느낀 ‘심한 부끄러움’은 바로 거기서 비롯한다.

▲ 문제 재단의 계보도. 이 족벌 사학이 끔찍한 폭력을 낳았다. ⓒ PD 수첩 갈무리

작가 공지영은 “나라 전체가 무진으로 변해가는 느낌”이라고 토로했다지만, 기실 나라 안에 무진 같은 도시는 쌔고 쌨다. 이른바 ‘토호’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기득권 세력,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토착 비리’의 연장선에 ‘인화학교’의 야만적 폭력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그만한 규모의 중소도시는 지역의 이른바 명문 중등학교라는 학연을 매개로 한 거대한 이익집단이 존재한다. 영화에서 남편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방약무인의 태도를 보이는 교장 부인과 자기 이해에 따라 서로 다른 소견서를 쓴 산부인과 의사는 무진여고 출신의 동창회 간부다. 이 설정은 그런 학연이 현실적 권력으로 기득권의 횡포를 은폐하고 자신들의 이해를 보호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음의 명백한 증거다.

 

자애학원의 비리를 알면서도 이를 묵인하고 뇌물을 챙기는 경찰, 이를 비호하는 검찰은 초록은 동색, 가재는 게 편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도시의 기득권 세력인 학교장을 구출하기 위해서 벌이는 전관 출신의 변호인, 그를 통해서 기득권의 한 축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주인공 강인호(공유 분)의 지도 교수의 모습은 지역을 넘어 이들 가진 자들의 연대가 얼마나 공고한지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

 

2. 교회도 기득권의 일부다

 

학교장이 무진교회의 장로이며, 그의 구명에 뛰어든 교회와 교인들의 연대는 어느덧 지역사회의 기득권의 일부가 된 이 나라 교회의 실상을 넌지시 암시한다. 법원 앞에서 포진한 이들 교인의 학교장 구명 시위 앞에서 ‘아이들이 듣지 못해서(청각 장애) 다행’이라는 여주인공의 푸념은 역설적이다.

 

자신들이 얻은 지위와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절대자마저도 무색하게 만든다.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신앙은 교회 장로의 무죄에 대한 확신으로 발전하고 그것은 결국은 피해자인 장애인들을 ‘사탄의 무리’로 지목하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뒤늦게 일명 ‘도가니 방지법’이라 불리는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지만, 정작 5년 전, 개정안을 반대해 좌절시킨 것은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었다. 이 법률 개정안의 핵심은 ‘족벌체제로 운영되는 사회복지재단에 공익이사를 선임하도록 법제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복지재단의 절반 이상을 운영하는 보수 개신교계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개정안에 결사반대했다. 이들은 사립학교법 개악에 앞장섰고 사회복지사업법 개정도 좌절시킴으로써 그들의 견고한 기득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된 피고들이 룸살롱에서 낭자한 술자리를 벌이면서 ‘사필귀정’ 운운하는 장면은 일종의 풍자이긴 하지만 기실 그들의 ‘정의’가 무엇인가를 아주 역설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성폭력으로 법정에 섰던 이 추악한 인간 군상들은 룸살롱에서 호스티스의 몸을 더듬으며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한다. 그것은 법정에서 벌어진 단죄와 무관하게 우리 현실의 낯부끄러운 미니어처였다.

 

3. 강약은 부동(不同)이다

▲  장애인들과 남녀 주인공은 집회로 항의하지만 ,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물대포 세례다 .

이제 법이 정의를 세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순진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법에 호소’라는 진부한 구절이 존재했던 것은 법이 다수의 억울한 사람 편이라는 기대가 살아 있었던 시절의 얘기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 앞에서 그건 낡은 교과서에만 남아 있을 뿐인 ‘죽은 말’이다.

 

자애학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인권유린, 성폭행과 성추행을 고발하고 이들 짐승을 법정에 세우는 과정에서 드러난 현실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법은 ‘공정’과 ‘권위’를 방패 삼아, 약자의 권리 앞에서는 눈을 감고 압도적 힘과 돈을 가진 강자의 손을 들어준다. 일찍이 옛사람들이 이런 세상의 이치를 일러 ‘강약은 부동’이라 했다. 그렇다. 강자와 약자는 절대 같을 수 없다.

 

재판장은 거짓 진술을 일삼는 피고들을 향해 내지르는 장애인들의 억눌린 비명 앞에서 ‘정숙’과 ‘권위’를 부르댄다. 그러나 그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장애인들의 결정적 증거를 인멸해 버린 검찰도 정의는 고사하고 약자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권력과 돈을 매개로 한 기득권, 가진 자들의 연대는 성채처럼 견고하고, 그 성채 앞에서 절망하는 약자들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은 자신의 이해조차 보호할 힘이 없다. 돈과 허위의 사과 앞에 피해자 가족들은 합의서에 도장을 찍고 재판은 강자의 승리로 끝난다.

 

결국, 약자들이 선택한 것은 집회다. 불법이란 족쇄에 갇힌 이 집회는 그러나 다수 경찰의 물대포 세례를 받는 거로 귀결된다. 어디에도 약자들을 위한 법이나 배려는 없다. 서슬 푸른 현실의 법이 있을 뿐 그들의 고통과 억울한 사정을 어루만져주는 인간의 손길은 없는 것이다.

 

4. 그것은 ‘구조’의 문제다

▲ 돈을 받고 피의자에게 합의해 준 민수의 할머니. 그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피해자인 장애아들의 가족을 회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지적장애인들이다. 손자 하나를 잃은 민수 할머니에게서 합의서를 받아낸 자애학원의 여교사는 돈에 자식까지 팔았다며 할머니를 비난한다.

 

그러나 산송장과 진배없는 장애인 아들을 돌보며 장애아 손자 둘을 자애학원에 보내야 했던 백발 할머니의 실루엣은 슬프다. 돈 가방 옆에 허리 굽힌 노인의 어두운 얼굴은 이 현실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그런 현실 앞에서 어떤 도덕적 비난도 오히려 무력할 뿐이라는 걸 말이다.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인 것이다.

 

민수 형제를 학대한 교사 박보현이 강인호에게 건넨 말―아이들은 육체적 장애 때문에 정신마저도 장애가 있다―은 단지 가해자의 비틀린 생각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오래된 통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통념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이 묵시적 제도의 몸통이 우리 사회인 것이다.

 

이 사건이 웅변하고 있는 것은 장애의 문제든, 폭력의 문제든 그것이 개별적 사건으로서 우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통념을 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미숙성에서 기인한 구조적 사회악이다. 가진 자들의 공고한 연대로 지켜지는 기득권의 성채와 그 앞에서 늘 지기만 하는 사회적 약자의 게임에서 승패는 미리부터 정해져 있다는 얘기다.

 

소설 ‘무진 기행’에서 주인공은 ‘당신은 지금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라고 쓰인 팻말 앞에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추억과 순수의 공간, 무진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영화 <도가니>를 보고서 우리가 느껴야 할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이 야만의 세상에 대한 고발 앞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성찰의 제목은 무엇일까.

 

 

2011. 10.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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