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차례, 제사 문화를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19. 2. 1.
728x90

시대 변화 앞에 선 ‘차례와 제사’ 문화 

▲ 관혼상제의 하나인 제사는 한국인의 일생에서 이어지는 의례다. ⓒ 한국역사문화신문
▲ 추석날 급하게 인터넷에 올라온 방송 기사. 교열을 거치지 못한 듯 오류가 많은데 곧 수정되었다.

한가위 저녁에 인터넷 마실을 다니다가 포털 다음에서 추석 명절 이슈를 다룬 방송 기사 며느리의 노동제사 문화 이대로 좋은가?”를 읽었다. 남녀 앵커가 대학 교수를 초대하여 제사 문화를 주제로 인터뷰한 기사였다.

 

 제사 용어, 낯설고 어렵다

 

방송된 내용을 정리해 놓은 기사를 읽다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방송된 기산데 급하게 정리한 티가 나도 너무 났던 것이다. 명절이어서 교열할 인력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눈에 띄게 잘못 쓰인 기사를 갈무리한 게 위 그림이다.

9시 이후에 확인해 보니 위 기사는 격식과 내용에 맞게 깨끗이 다시 정리되어 있다. 급하게 정리하느라 미처 교열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 글을 쓰는 것은 그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오늘날 제사 문화가 일상과 꽤 멀어져 있음을 말하고 싶어서다.

 

제물의 오타인 듯한데 수정된 기사에서도 그대로 제무. 글쎄, 그런 낱말이 있나 싶어서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표제어에 없는 단어다. , , 는 아예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잔 올리기의 절차이고, 축문(祝文)’제사를 지낼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이다. 삭망례(朔望禮)’는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드리는 의례다.

 

녀제는 무슨 말인가 하여 찾아보았더니 녜제(禰祭)’. 이건 나도 처음 보는 낱말이다. ‘()’는 자전을 찾아보니 아비 사당 녜()’자다. ‘아버지를 모신 사당예묘(禰廟)’라 하고 조상을 모신 사당예조(禰祖)’라 할 때 쓰는 말이다.

 

두음법칙에 따라 예제라 쓰든가 이제라 써야 할 텐데 자료마다 녜제라 쓰고 있다. <다음국어사전><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봐도 녜제는 물론이고 예제’, ‘니제’, ‘이제등 어느 것 하나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일상과는 단절된 낱말이라는 뜻일까.  

▲ 제사상 ⓒ 인터파크

선친과 형님이 살아계셨을 적에는 우리 집도 절차가 반듯한(!) 제사를 모셨다. 지방을 쓰는 것을 물론이고 축문을 써 독축(讀祝)을 하고 당연히 잔도 세 차례 올렸다[삼헌(三獻)]. ‘유세차(維歲次)’로 시작하되 를 길게 빼며 시작하고 감소고우(敢昭告于, 삼가 밝게 고합니다)’를 거쳐 상향(尙饗, 신명께서 제물을 받으소서)’로 끝나는 독축은 내 몫이었다.

 

 내가 독축의 가락에 익숙해질 무렵에 형님마저 떠나고 더는 제사를 모시지 않게 되면서 나는 지방 쓰는 법도 축문의 격식도 다 잊어버렸다. 주변의 지인으로부터 아예 지방도 컴퓨터로 출력해서 쓴다는 얘기를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사, 사대부 특권에서 보편적 의례로

 

 중국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우리 제사의 규범이었으니 그 절차와 형식 따위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제사는 한자로 문자 생활을 했던 조선 시대의 양반들에 의해서 규범으로 받아들여진 이래 소수의 특권으로 이어져 오다가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보편적 의례가 되었다.\

▲ 조선 중기의 학자 김장생이 <가례>를 증보, 해설한 책인 <가례집람>

조선 시대에 제사는 사대부만의 특권이었다. 그것은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향반에 이르기까지, 자신들 권력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재생산하는 유교 가부장 국가의 숭고한 의례였다. 고로 민중은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하지만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신분 질서가 어지러워지면서, 제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제사를 지내는 쪽으로 역사가 거꾸로 흘러갔다. 이것이 이른바 온 민족 양반 되기의 면목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향 평준화를 통한 평등이 아니라 상향 평준화를 통한 허위의식의 전면화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최범, ‘내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이유’(<허핑턴포스트>2016.09.14.)

 

제사가 보편적 의례가 된 상황을 허위의식의 전면화라고 주장한 디자인 평론가 최범의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그게 예법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서민들의 부담이 되어버린 것은 분명하다. 저마다 양반이 되고자 한 동기가 군역 회피의 수단이었다는 데 이르면 좀 씁쓸해진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교 예법을 지키던 이들은 양반들이었잖아요. 양반이 아니면 차례를 지낼 필요가 없었던 거죠. 조선 초기에 양반이 전체의 5~10%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머지는 상민이었으니, 90% 이상의 사람들은 차례를 안 지냈어요.

 

그런데 조선말에 와서 계급 질서가 무너집니다. 양반 계급이 약 70%가 되는 거죠. 양반들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늘어난 게 아니라, 상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양반으로 신분 세탁을 했기 때문이죠.”

 

대다수 사람이 양반으로 신분을 세탁했고, 유교 예법을 지키게 된 입장에서 자연스레 차례를 지내게 됐다는 말이다.

 

갑오경장을 통해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본격적으로 모든 사람이 양반이라는 인식이 확산됩니다. 해방 후에도 양반인 것처럼 행세해야 사회적인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해 양반이 해야 하는 일인 차례를 지내고 있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지낼 줄 몰랐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집의 가가례를 지켜보면서 홍동백서’, ‘조율이시’·‘조율시이등이 만들어져요. 그렇게 만들어져 돌던 것을 1970년대 국가에서 확정했습니다. 사실 유교식으로 따졌을 때 아무 근거도 없고, 맞지도 않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왜 추석 차례 지내지 말자고 할까, <노컷뉴스>(2016.9.13.) 중에서

 

사대부의 의례였던 제사를 온 백성이 받들어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시빗거리가 된 제례의 형식도 난만하게 꽃피었다. 모든 가치 판단의 준거로서의 중화(中華)에 대한 짝사랑은 정작 종주국보다 더 완고하고 경직된 형식주의가 이 땅을 지배하게 만든 것이다.[관련 글  : 차례상에 홍동백서는 없다?(2015/09/27)]

 

시대와 변화를 이기는 제도는 없다

 

그러나 시대와 그 변화를 이기는 제도는 없다. ‘양반도 없지만 제사를 지내야 양반이라는 오래된 형식도 시나브로 힘이 빠지고 있다. 굳이 드러내지는 않지만 집집이 골칫거리인 제사는 저절로 간소해지고 있다. <주자가례>에서 제시하고 있는 제사 가운데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기제사가 고작이다.

지난 벌초 때 만난, 떡집을 하고 있는 집안 동생이 이야기했듯, 떡집 대목도 예전 같지 않다. 제사를 지내는 집이 줄고 있는 것이다. 제사에 쓰는 고사리 값이 해마다 떨어지는 것도 제사 수요가 줄고 있는 것으로 그는 보고 있었다. [관련 글  벌초 이야기(3)]

 

이름난 종가가 아닌 이상, 이른바 ‘4대 봉제사(奉祭祀)’를 유지하는 집안은 드문 듯하다. 부모님 가운데 한 분이 살아계신 경우에도 기제사만 7, 추석과 설날 차례까지 포함하면 열 차례 가까이 제사를 모셔야 한다. 거기 드는 비용도 만만찮을뿐더러 각지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이 모여야 하는 등 들이는 시간도 무시하지 못한다.

 

살아생전에 모셨던 부모나 조부모의 경우야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며 추모하는 게 마땅한 일이긴 하지만 이름조차 낯선 그 윗대의 조상들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 시간과 비용을 써야 하는 일이 합리적이라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말이다. 봉제사가 ‘4에서 ‘2로 줄어든 데에는 합리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예 올 한가위를 전후해서 제사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도 그런 변화의 일부가 아닐까 싶다. 세상을 떠난 조상을 추모하는 일이 미풍양속이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죽은 조상을 위한 일이 산 자손들에게 짐이 되고, 갈등과 불화의 씨앗이 된다면 그건 조상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벌초 문제가 그랬듯이 제사도 근본적으로 다시 돌아보아야 할 이유가 적지 않다. 한가위 전후하여 후손이 찾지 않은 묘지가 적지 않아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공원묘원에 관한 뉴스가 이어졌다. 어쩌면 세상의 변화는 우리가 인지한 것보다 더 빨리 찾아올지도 모른다.

 

 

2016. 9. 16. 낮달

  

 

2016년 한가위를 앞두고 쓴 글인데, 2년이 훌쩍 지났다.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웃 중 한 친구는 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않는 대신, 그날 동기간을 모아서 제수에 드는 비용으로 쇠고기를 사 구워먹으며 아버지를 추모한단다. 추모의 방식은 반드시 제사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