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형제들 모이는 연례행사 벌초
어제 벌초를 다녀왔다. 걱정했던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축축한 날씨가 좀 더웠다. 아침 7시 반에 집안 형제들과 만났다. 손아래의 10촌 동생과 그 아래 8촌 셋이 모여 다섯이다. 지난해 결혼한 막내는 올핸 빠졌다. 그러나 다섯이 모이면 든든하다.
연례행사 ‘벌초’ 준비하기
벌초는 연례행사다. 한가위를 앞두고 인동에 사는 10촌 동생이 ‘아무 날에 벌초한다’는 통문을 돌리면 나는 슬슬 바빠지기 시작한다. 먼저 창고에서 예초기를 꺼내 이것저것 손질해 둔다. 일 년에 단 한 번 쓰고 처박아 두지만, 이 기계가 벌초의 성패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날이 일주일쯤 앞으로 다가오면 페트병에 사 온 휘발유를 윤활유와 섞는다. 비율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대충했다가 기계가 통 힘을 제대로 못 쓰는 꼴을 당해본지라 매우 조심스러워졌다. 섞은 연료를 예초기의 연료통에다 붓고 나면 준비는 거의 끝난다.
연료 코크를 내리고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스타터(starter)를 일정하고 순간적인 힘을 가해 잡아당긴다. 관건은 시동이 단박에 걸리는가이다. 오래 잠자고 있던 기계는 단번에 반응하진 않지만 두세 번 정도만 시도하면 이내 쨍쨍한 소음을 내며 살아난다. 지난해 벌초를 끝내고 연료통을 깨끗하게 비워둔 덕분이다.
벌초 날까지 두어 번쯤 더 시동을 걸어보는 것은 혹시 현장에 갔는데 말을 듣지 않는 낭패를 예방해서다. 연료가 모자랄 경우를 대비해서 혼합한 예비 연료통을 마련해 두는 것으로 벌초 준비는 끝난다. 남은 것은 당일에 다른 탈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일뿐이다.
가까이 있어도 자주 보지 못하는 형제들은 1년에 한 번, 벌초 날에 만나 그간의 안부를 나눈다. 먼저 온 10촌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체로 소재는 거기가 거기다. ‘언제까지 벌초를 해야 하나’는 우리가 함께 모여 벌초를 시작한 때부터 빼먹을 수 없는 주제다.
[관련 글 : 벌초 이야기(2008.9.3.), 다시 ‘벌초'를 생각한다(2010.9.15)
한군데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지역의 몇 군데 산 여기저기 흩어진, 스물몇 기의 산소를 찾아다니며 벌초를 하는 건 만만찮은 일이다. 자연 그 어려움을 확인하면서 이 제도의 존폐를 전망하기도 한다. 총론에서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데 각론에 가면 입장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동생들이 모두 맏이지만, 지차(之次)인 나는 가볍다. 맏이로서 응당 져야 할 부담이 내겐 없다. 맏이였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일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일행 가운데 제일 손위지만 재지 않고 바로 속내를 말해 버린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거야?”
“아재 돌아가시고 나면 그만 버리도록 하자고!”
“언제까지 이 짐을 지고 갈 거야? 새끼들한테 물려줄 거야?”
동생들의 반응은 그랬다. 첫해만 해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버리자’고 하면 ‘그래도 챙겨온 산소를 어떻게 버리냐’고 되받았다. 이들은 장자의 의무와 압박감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었다. 내가 더는 논의를 진전시키지 않았던 것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힘이 세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벌초 문제에 관한 의견은 조금씩 진전되어 왔던 것 같다. 지난해 벌초 날은 방송고 수업과 겹쳤다. 나는 아침에 예초기를 싣고 와 동생들에게 건네주고 돌아서야 했다. 그 현장에서 나눈 이야기다.
벌초, 어떻게 할 것인가
“미안하이. 수업 때문에. 수고들 해야겠네.”
“걱정마세요. 그나저나 형님, 이제 벌초도 못 하게 생겼습니다.”
“무슨 소리야?”
“서울 있는 아들놈에게 벌초하러 오라니까, 회사 핑계 대면서 몸을 사리는데……. 이런 형편이면 앞으로 얼마나 더 벌초하러 모이겠습니까?”
“그래 말이야. 내가 그래왔잖은가. 좌우간에 결정을 내릴 때가 다가오고 있는 거지, 뭐.”
우리는 마치 푸념처럼 주고받았지만, 그동안 꽤 완고한 태도를 보였던 그 아래 동생이 귀가 확 뜨이는 말을 했다. 작은집 맏이인 동생은 벌초 길의 산소들을 대체로 꿰고 있을 만큼 장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친구다.
“어쨌든 우리가 결단을 내려야겠지요. 아이들 세대로 결정을 넘겨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그의 의견은 나름대로 실존적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내가 가볍게 접근하는 문제도 그는 좀 고민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을 게다. 장자와 자손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명분과 그걸 치르는 데 장애가 만만치 않다는 현실 사이에서 그는 꽤 고민스러웠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의견이 모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칼로 무 베듯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수백 년을 내려온 관습을 버리는 것에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조건들의 성숙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늘 이야기한 조건은 지금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집안 어른, 내 재종숙(再從叔)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다. 글쎄, 노인이 돌아가시길 기다려야 한다는 게 참람(僭濫)하긴 하다. 평생 조상 공경하는 일을 깔축없이 해 오신 분께 젊은것들이 선조들 산소 관리를 그치자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설사 그걸 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살아생전에 그 불경(不敬)을 고스란히 지고 가시게 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다. 미수(米壽)에 가까운 연세, 힘에 부쳐 산으로 출입을 하지 못하시니 젊은것들에게 맡겨두긴 하지만 그 속내는 좀 안타까우실까.
그러나 어른께서 돌아가실 날은 예측할 수 없다. 산소 관리를 그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은 우리들의 ‘안녕’이다. 주거나 신병 등의 문제로 우리 가운데 한둘이 이 작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상황도 예측할 수 없기는 매일반이다.
총론에 이어 각론도 하나로 모이고 있다
어쨌든 총론은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남은 것은 각론인데 그건 좀 더 시간의 숙성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이번 벌초 길에서 나는 문제가 아주 쉽게 풀릴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듯했다. 10촌 동생이 지난해에 산소 예닐곱 기가 있는 골짜기 하나를 빼먹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 거기에 안 갔다고?”
“예. 올해도 그렇게 하면 되겠지요?”
“아무렴. 그거야 우리가 결정하기에 달린 거니까…….”
나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던가 싶었다. 아예 그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골짜기 하나를 빼먹는 것도 힘을 더는 방법의 하나다. 하긴 외따로 산꼭대기에 있는 윗대 산소 하나는 찾지 않은 지 벌써 수년이 지났다. 우리는 벌초를 했다고 말씀드리고 어른께서는 그러냐, 욕봤다고만 치하하고 마시니 서로가 거리낄 게 없다.
“세상이 바뀌어 가니 거기 맞출 수밖에 없잖은가. 벌초뿐이 아니야. 제사도 마찬가지. 요즘 4대 봉제사하는 집이 어디 종가 빼고 있을라?”
“맞습니다. 요즘 떡집도 경기가 예전 같지 않아요. 집집이 제사가 줄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재배 고사리 말린 거 1kg에 재작년에는 7만 원 줬지요. 작년엔 6만 원, 올해는 4만 원에 샀습니다.”
우리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그 골짜기로 가지 않았다. 아무도 그걸 꺼림칙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얘긴 아예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하긴 그게 켕기거나 찝찝할 일이 무어 있겠는가. 우리가 산소를 버린다는 것도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젊은것들을 벌초 보내고 기다릴 어른을 생각했다. 어른인들 이런 상황을 짐작하지 못할까.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꼭대기 산소에 아이들이 가지 않을 수도 있으리란 생각을 연세 높다고 어른이 상상조차 못 할까. 나는 어른께서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계신 거로 생각한다.
오전 작업을 끝냈는데도 점심때가 한참 남았다. 새참으로 김밥을 먹고 바로 부모님과 조부모님 산소가 있는 고향 뒷산으로 갔다. 두 군데, 모두 7기의 산소 벌초를 끝내고 나니 오후 두 시가 채 되지 않았다. 네 시는 되어야 끝나던 예전과 비길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
일찍 끝난다고 방심했던가. 부모님 산소에서 낫질을 하다가 왼손 중지를 베이었다. 모처럼 숫돌에 갈아간 묵은 낫은 날카로웠고, 뜨끔하다고 느낀 순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우리는 구급약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다.
차로 내려가 휴지로 피를 닦았더니 대충 지혈이 되었다. 뼈가 상할 정도는 아니고 중지 두 번째 마디의 살이 푹 패었다. 걱정하는 동생들에게 집에 가서 소독한 다음, 내일 병원에 가면 된다고 하고 막국수 집에서 뒤늦은 점심을 먹고 우리는 헤어졌다.
우려했던 비는 오지 않았고, 무사히 올해 벌초도 끝났다. 내년에도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고 거기서 각론을 논의하고 그걸 조금씩 다듬어 갈 것이다. 그러나 단시간에 이 문제가 매듭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연면히 이어진 관습이 바뀌는 데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니 말이다.
2016. 9. 5. 낮달
벌초 이야기(1) 다시 벌초의 계절이다
벌초 이야기(2) 다시 ‘벌초’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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