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무관심’, 혹은 ‘살인과 배신’

by 낮달2018 2019. 1. 24.
728x90
SMALL

부르노 야센스키(Bruno Yasenskii), ‘살인과 배신보다 무관심’을 경계

 

1988, 학교를 옮기고 500만 원짜리 전셋집, 재래식의 '부엌이 깊은 집'에 들었다. 방은 두 칸.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데리고 잤는데, 삐딱한 사다리꼴의 작은방에 내 서재를 꾸몄다. 말이 서재지, 제재소에서 켜 온 합판을 구운 적벽돌로 받쳐놓은 간이 책장이 전부인 초라한 공간이었다.

 

오래 써 온 크로바 타자기를 그 즈음 막 나온 라이카 전자타자기로 바꾼 때였다. 헝겊 리본이 아닌, 교체할 수 있는 고급 리본으로 인자(印字)되는 선명한 글꼴이 아름다웠고, 한 줄 입력이 끝나면, 자동으로 줄이 바뀌면서 나는 묵직한 기계음이 새로운 물건을 쓰는 즐거움을 새록새록 환기해 주곤 했다.

 

위의 글은 그때 그 타자로 쳐서 내 보르네오 책상의 책꽂이 위에 코팅해 붙여 놓았던 부르노 야센스키(Bruno Yasenski, 1901~1941)의 글이다. 당시 막 단위학교마다 태동하고 있었던 평교사회나 지역 교사협의회 활동으로 눈코 뜰 새가 없던 때였는데, 어디선가 읽은 야센스키의 글은 매우 통렬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야센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러시아 작가다. 그가 쓴 공상적인 정치소설 <파리를 태운다>(1928)는 국제적 베스트셀러였다. 1937트로츠키스트’,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는데, 1956년에야 복권되었다. 국내에서 그의 저작은 출판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연히 나는 이 짧은 글만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이 글은 유고로 발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무관심한 사람들의 공모>에 실렸던 내용으로 보인다. 친구나 적과의 관계에서 최악의 상황은 배신이고 죽임이다. 그러나 야센스키는 그러한 극단적 상황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믿음을 저버리지도, 사람을 죽이지도 않는그들의 말없는 동의는 방관이고 악의 추인이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으며 그들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우열반 편성을 통해서 살릴 자식버릴 놈을 가려내던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건 꼼짝없이 이기적 우등생과 열등생을 문제아로 확대 재생산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치 경쟁하는 것처럼 결석과 무단이탈, 폭행과 절도를 저지르던 열등생들과 함께 했던 그 1년이 내게는 가장 교사다웠던 시간으로 남아 있다. 뜻을 같이 한 동료들과 함께 나는 아니라거나 틀렸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 개인들은 무력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과 연대를 통해 살아간다.

이후에 전개된 여러 곡절을 거쳐 나는 94년 봄에 복직했다. 그리고 무심한 일상 속으로 매몰되어 가던 어느 해 봄이었다. 우연히 서가를 정리하는데 책꽂이 한켠에서 저 야센스키의 코팅한 글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상 위에 굴러 떨어졌다.

 

먼지를 문지르고 그것을 다시 읽는데 코끝이 시큰해 왔다. 그것은 마치 까맣게 잊어버린 옛 연인이 남겨 둔 묵은 연애편지 같았다. 동시에 그것은 지난 시간 동안 빨갛게 타올랐다 스러져 버린 내 열정의 현주소처럼 느껴졌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것은 내가 굳건히 믿어 온 한 시대 정신의 표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여러 해의 세월이 흘렀다. 살인과 배신의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무언으로 거기 동의하는 사람들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들의 무관심을 바라보는 내 눈길은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인가. 야센스키의 글을 한자 한자 뜯어 읽어 보는 2005년의 가을은 쓸쓸하기만 하다.

 

 

 

 2005. 10. 14. 낮달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