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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노동시인 조영관과 임성용의 만남

by 낮달2018 2020.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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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의 첫 수혜자 임성용 시인

▲ ‘작업화를 신는 사람’(성효숙). 조영관을 그린 그림. ⓒ 추모사업회

일전에 이웃 굴렁쇠 님의 블로그에서 임성용 시인을 처음 만났다. 이 나라의 열악한 노동 상황과 겹쳐지는 그의 시 “하늘 공장”의 울림이 다르게 다가왔다. 어저께 <한겨레>에서 시인의 수상 소식이 실린 기사를 읽었다. 한 시인이 독자와 만나는 과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의 첫 수혜자 임성용 시인

 

단신 기사로는 드물게 시인의 사진까지 실은 기사는 시인이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의 첫 수혜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조영관? 이름이 입에서 뱅뱅 돈다고 느끼지만 그건 착각이다. ‘서울 구로공단과 인천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2007년 타계’했다는 시인의 이력은 낯설었다.

 

유고시집 책날개에 실린 시인 조영관(1957~2007)의 이력은 소략하다.

 

“195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서울시립대 영문과를 졸업하였고, 2002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1998년 겨울, 영종도’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86년 이후 건설 일용 노동자와 용접공 생활을 하면서 노동운동 현장에서 활동하다가 2007년 2월 20일 간암으로 타계하였다.”

▲  유고시집 (2008) 과 조영관 시인 (1957~2007)

1957년생이면 우리와 거의 동년배인데 마흔일곱에야 등단했으니 엔간한 늦깎이인 셈이다. 같은 57년생으로 박노해와 <인부 수첩>의 김해화가 있는데 일찌감치 시집을 내고 대중의 기림을 받았던 이들과는 달린 조영관은 등단하고 불과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동자’로 살다 간 시인 조영관

 

추모사업회 누리집(www.koani.kr)에 떠 있는 그는 마치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아 보인다. 살아 있으면 올해 쉰다섯. 이른바 ‘학출’로는 드물게 그는 일생을 노동자로 살다 간 사람이다. 제한된 정보만으로 그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결례 같아서 줄인다.

 

그의 유고시집 <먼지가 부르는 차돌멩이의 노래>(2008, 실천문학사)를 온라인서점 보관함에 쟁여놓고 그의 등단작 ‘1998년 겨울, 영종도’을 읽는다. IMF 직후 인천 영종도에서 일한 경험을 시화한 작품이다. 바람 한 점 막아 주지 못하는 황량한 벌판의 추위가 생생하다.  [조영관 시 텍스트 읽기]

▲ 시집 <하늘 공장>(1997)과 임성용 시인

힘들게 노동자로 살다 갔지만, 그는 한 권의 시집을, 그리고 그를 기리는 벗들과 후배들을 남겼다. 추모사업회에서 제정한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은 창비에서 제정한 ‘신동엽창작기금’(현재 신동엽창작상)의 권위나 규모에 비길 수는 없지만 한 시인의 삶과 죽음을 보듬는 것만으로 뜻깊다.

 

기금 ‘3백’을 ‘3천’처럼!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의 첫 수혜자로 선정된 임성용 시인은 1965년 전남 보성 출신이다. 구로·안산 공단에서 공장노동자로 일하면서 1992년부터 노동자 문예 <삶글>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제11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표제작 ‘하늘 공장’에서 보이듯 임성용 시인은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의 육신에 새겨지는 자본의 흉포함을 고발하고, 또 이를 통해 희망을 모색’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진실성’과 ‘진정성’은 이러한 노동 현장의 직접 체험에서 비롯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시 텍스트로 읽기]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의 수여 기금은 300만 원이다. 신동엽 창작상이 1천만 원이고, 내로라하는 메이저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문학상 상금은 5천만 원에 이르니 시인이 받은 창작기금은 초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임성용 시인은 300만 원의 기금을 3천만 원처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기금은 한 시인이 후배 시인에게 물려준 조촐한 유산과 다르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2011. 2. 13.


▲ 지난 5월의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자로 나선 임성용 시인. 뉴스페이퍼 사진

이 글을 쓴 때가 9년 전이다. 나는 조영관의 시집을 읽고서 임성용의 시집을 바로 들일 작정이었는데 어쩌다 그걸 잊고 지금에 이르렀다. 오늘 <프레시안>에서 어느 작가가 쓴 글에서 조영관과 임성용 소식을 들었는데 순간, 아뿔싸 그이가 그이였구나, 하고 나는 무릎을 쳤다.

 

지난 5월, 3.1운동·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 <문단의 적폐, ‘친일 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에서 임성용 시인이 발표자로 나섰고,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까맣게 잊고 있다가 오늘 프레시안 기사를 읽으며 그를 환기하게 된 것이었다. [관련 기사 : 동인문학상, 팔봉문학상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시집을 들이는 일을 더는 미루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광저우와 충칭으로 가는 임정 답사길이 코앞이라 당분간은 미루지 않을 수 없다.

 

2020.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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