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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197

[오늘] 한강 다리 폭파 - 전날 이미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을 탈출했다’ [역사 공부 ‘오늘’]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대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28분, 국군은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사흘 전인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한국전쟁 70시간 30여 분 만이었다. 폭파 장면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은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500~800명의 인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수도 서울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이 다리가 끊어지면서 무고한 인명의 희생에 이어 서울시민 100만 명의 발이 묶였다. 병력과 물자 수송이 막히면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지 못한 국군 6개 사단이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중화기와 차량 등 다량의 군수품을 적에게 내줘야 했다. 전쟁 발발 뒤 정부의 공식 발표는 6차례에 걸쳐 있었다. 6월.. 2022. 6. 28.
남과 북이 기리는 양세봉 장군, 그 ‘유일(唯一)’의 역설 [역사 공부 ‘오늘’] 1934년 9월 20일,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 순국 1934년 9월 20일, 랴오닝성 환인(桓仁)현 대랍자구(大拉子溝)에서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1896~1934) 장군이 매복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교전하다가 전사, 순국했다. 향년 38세. 이십 대 초반에 무장 항일투쟁을 시작한 이래, 단 한 순간도 총을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 양세봉은 전투의 현장에서 죽었다. 그는 조선혁명군으로 싸운 다섯 해 동안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과 8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일본군 1천여 명을 죽였고, 흥경성, 노구대, 쾌대무자 전투를 승리를 이끈 이였다. 독립군이 좌우로 갈려 좌익은 중국 공산당 휘하로 들어가고, 우익은 중국 본토로 옮겨갔을 때, 만주에 남아 일제와 싸운 독립군은 그의 휘하 조.. 2020. 9. 20.
[오늘] 작가 생텍쥐페리, 정찰 비행 중 실종되다 [역사 공부 ‘오늘’]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 정찰 비행 중 실종 1944년 7월 31일 오전 8시 25분, 정찰기 P38 라이트닝을 타고 출격한 『어린 왕자』의 소설가이자, ‘야간 비행’의 선구자 앙투안 마리 장 밥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 1900~1944)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비무장으로 6시간분의 연료를 싣고 이륙했으나 6시간이 지나도록 기지로 귀환하지 않았다. 8시간 반 뒤에 실종 보고가 들어와 그는 공식적으로 실종 처리가 되었다. 1948년 프랑스 당국은 그의 실종을 사망으로 보고 전사로 인정하였다. 생텍쥐페리는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 2020. 7. 30.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열사, 타이항산에서 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42년 6월 3일-윤세주, 타이항산 폔청 전투에서 전사 1942년 6월 3일, 조선의용대 화북(華北)지대 정치위원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 1901~1942)가 타이항산(太行山) 석굴에서 순국했다. 허베이(湖北)성 폔청(偏城)에서 일본군의 제팔로군 소탕 작전에 맞서 싸우다 총상을 입은 지 닷새 만이었다. 폔청 전투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국 타이항산맥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운 타이항산 전투 가운데 후자좡(胡家庄) 전투·싱타이(邢台) 전투(1941)와 함께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1942년 5월 28일, 허베이성 셰현(涉縣)의 북쪽 가장자리 산시성 경계에 있는 폔청에서 시작된 이 전투는 일본군의 소탕 작전에 대항한 팔로군의 반 소탕전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5월 29일 항일.. 2020. 6. 3.
[오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유배지 엘바섬 탈출 [역사 공부 ‘오늘’] 1815년 2월 26일-보나파르트 엘바섬 탈출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는 유배 중이던, 이탈리아반도 서쪽 티레니아해(Tyrrenian Sea)의 토스카나 제도에서 가장 큰 섬 엘바(Elba)를 탈출했다. 1814년 4월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엘바섬으로 유배된 지 9개월 21일 만이었다. 그는 황제의 지위를 유지한 채 세습되지 않는 엘바 공국의 대공으로 섬에서 머물다가 영국군의 감시를 피해 엘바섬을 벗어난 것이었다. 지중해의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의 사회적 변동기 뒤에 요구된 사회적 안정을 기반으로 제1 제정(帝政)을 건설하였다. 그로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 2020. 2. 25.
백범, 삼천만 동포에게 통일정부 수립을 눈물로 고했지만 [역사 공부 ‘오늘’] 1948년 2월 10일 - 김구, 단정 반대·통일 정부 수립 호소 성명 발표 1948년 2월 10일, 등에는 백범 김구(1879~1949)가 동포들에게 ‘통일 정부’ 수립을 호소하는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 실렸다. 같은 해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 항의 의견서를 보낸 데 이어 2월 10일부터 12일까지 사흘에 걸쳐 지면에 실린 이 성명은 70 고령의 노 독립운동가의 시국에 대한 절규였다. 김구의 단정 반대·통일 정부 수립 호소 그의 피 울음은 단순 명쾌했다. 1893년 열여덟에 동학에 입문, 1896년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처단하고, 1919년 마흔넷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의 .. 2020. 2. 10.
[오늘] 혁명의 완수-쿠바혁명군, 아바나에 진입 [역사 공부 ‘오늘’] 1959년 1월 1일, ‘7월 26일 운동’ 주력부대 아바나에 진입 산타클라라 전투의 승리 이어 아바나 진입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라울 카스트로 등이 이끄는 쿠바의 청년 게릴라 전사들은 1958년 12월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독재자 바티스타는 포르투갈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1959년 1월 1일, 마침내 ‘7월 26일 운동’ 세력의 주력 부대가 아바나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1953년 7월 26일 시작된 쿠바혁명의 완수였다. 당시 쿠바는 1933년 9월 ‘하사관들의 반란’으로 불리는 쿠데타 이후 최고 권력자가 된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1901~1973)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194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 2019. 12. 31.
[오늘] 국군과 유엔군, 중공군에게 밀려 ‘흥남철수’ 시작 [역사 공부 ‘오늘’] 1950년 12월 15일, 흥남항을 통한 해상 철수 시작 장진호 전투, 그리고 흥남철수 1950년 12월 15일,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함경남도 흥남항을 통해 해상 철수를 시작하였다. 12월 23일까지 아흐레 동안 이루어진 흥남철수(興南撤收)로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한 국군과 유엔군 등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완전하게 철수시켰다. 1950년 12월, 당시 서부전선으로 북진한 제8군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 장진호(長津湖) 방면으로 북진한 미 제10군단의 병력은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막혔다. 활로는 해상 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같은 해 11월 27일, 중국 제9병단이 장진호 지.. 2019. 12. 14.
[오늘] 홀로코스트 전범 아이히만 교수형 선고 [역사 공부 ‘오늘’] 1961년 12월 15일, 예루살렘 법정 아이히만에게 교수형 선고 1961년 12월 15일, 이스라엘 정부가 연 예루살렘의 특별 3심 법정은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군에게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아이히만이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것은 1958년이었다. 그러나 그가 누린 평화는 짧았다.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Simon Wiesenthal)과 이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난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밀.. 2019. 12. 14.
[오늘] 첫 시상, 이후 노벨상 이야기 노벨상, 그리고 노벨문학상 이야기 1910년 12월 10일 오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상 첫 시상식이 열렸다. 알프레트 노벨(1833~1896)의 5주기를 맞아 3,150만 스위스 크로네(약 920만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상금은 5개 부문 6명의 수상자에게 돌아갔다. 5개 부문 6명의 수상자 중 알 만한 사람은 물리학상을 받은 엑스(X)선을 발견한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과 평화상을 프레데리크 파시(Frederic Passy, 국제평화연맹 설립자)와 공동 수상한 적십자 창설자인 앙리 뒤낭(Jean-Henri Dunant)이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진 이 역사적인 상의 첫 시상은 그러나 어수선했던 모양이다. 형식도 그랬지만, 내용으로도 그리 개운하.. 2019. 12. 6.
[오늘] 베를린 장벽 붕괴 [역사 공부 ‘오늘’]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무너지다 28년 만에 베를린 장벽 붕괴-‘육지의 섬’ 혹은 ‘반파시스트 보호벽’ 1989년 11월 9일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7시, 동독 경찰과 군 당국이 여행 자유화 정책을 선언함으로써 마침내 동서 베를린을 막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61년,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서방측 선동을 차단한다는 구실로 장벽이 구축된 지 28년 만이었다. 1961년 8월 12일 밤 동독은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장벽을 설치했다. 철조망과 블록으로 이루어진 장벽은 기관총 초소와 지뢰 지역이 설치된 5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대체되었다. 1980년대에는 고압선과 방어 진지들이 45㎞에 걸쳐 구축되어 베를린시를 양분하고 서베를린 주.. 2019. 11. 9.
[오늘] ‘10·4 남북공동선언’, ‘6·15’를 이으며 ‘판문점선언’으로 [역사 공부 ‘오늘’] 2007년 10월 4일, 남북공동선언으로 6·15 실천방도를 밝히다 6·15공동선언은 통일의 원칙, 10.4선언은 그 실천강령 2007년 10월 4일 오후 1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공동 서명했다. 이 ‘10·4선언’은 김대중 대통령의 ‘6·15 남북공동선언’에 이은 ‘제2차 남북정상선언’으로 불린다. 이 공동선언이 천명하고 있는 합의 사항은 크게 3가지 영역, 즉 ① 통일문제 논의를 위한 남북한 각 분야의 접촉면 확대와 6·15공동선언 이행을 통한 남북한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② 서해 평화수역 조성 등 한반도 군사적 긴장 완화와 북핵 문제 해결을 통한 항구적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③ 민족경제·문화.. 2019.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