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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2·28-대구 고교생들, 이승만 선거 방해 공작에 맞서 일어서다

by 낮달2018 2024.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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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고교생 민주 시위

▲ 경북중고등학교에 세워진 2.28 기념조형물

1960년 2월 28일 낮 12시 50분, 대구의 고교생들이 정부와 여당(자유당)의 부당한 선거 개입에 항의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시내 중심가로 진출하여,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까지 계속된 시위는 3·15 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1960년, ‘빈사의 민주주의’
 
1960년, 13년째 이어진 이승만 독재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빈사 상태였다. 발췌개헌(1952)과 사사오입 개헌(1954)으로 장기 집권을 위한 권력을 강화한 이승만은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관련 글 : 이승만 정권, 사사오입 개헌으로 중임제한 폐지]
 
이승만과 맞설 유일한 대안으로 국민의 기대를 받았던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한 달 전인 2월 15일 급서함으로써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86세 고령인 이승만의 대통령 유고 시 권력 승계자인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는 것이 자유당 정권 최대의 과제였다.
 
그러나 야당 부통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이었던 장면과 맞서 자유당은 이기붕의 당선을 자신할 수 없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의 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야당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대구에서 2월 28일 예정된 장면의 수성 천변 유세에는 전국의 이목이 쏠린 건 당연했다.

▲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부통령 선거 유세 중인 민주당 장면 후보 (매일신문) ⓒ2.28민주운동 60주년 기념 사진집 이하 같음.

이기붕 당선에 목맨 ‘자유당의 무리수’, 일요일 등교
 
이에 자유당 경북도당은 1960년 2월 10일, 대구 시내 각 기관장과 각급 학교장을 소집하여 2월 27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있을 예정인 자유당 대통령 선거 유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자유당 유세장에 가구당 1명씩 동원하고, 다수가 유세장에 참석할 수 있도록 정오까지 업무와 수업을 모두 끝낼 것. 둘째, 민주당 유세 날인 28일 일요일에는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 행사를 계속할 것. 셋째, 특히 고교 학생들은 정치에 민감하므로 일요일에 일제히 등교시켜 민주당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에 따라 대구의 8개 공립 고교[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대구여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는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렸다. 급조한 등교의 명목은 학기말 시험(경북고), 임시 수업(경북대사대부고), 졸업생 송별회(대구상고·대구여고), 토끼사냥(대구고) 등이었다.
 
일요 등교 방침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학교별로 회의를 열어 부당함을 지적하고 일요 등교를 철회해 줄 것을 학교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2월 27일 오후 경북고 이대우 학생 부위원장의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학도호국단 간부 10명이 모였다. 이들은 부당한 일요 등교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 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 낭독으로 격앙되어 있던 학생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28일 오후 1시경 경북고생 800여 명이 대구 중심부인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했으며 교문 돌파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고 학생들도 마침내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었다.
 
경북고 800명이 선도한 시위, 학생들 220명 체포
 
대구 시내 거리는 곧 불의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시위대는 번화가인 중앙통 매일신문사를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불의를 규탄하는 시위를 이어갔다. 시민들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위대에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시위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경북대사대부고와 대구상고 등의 학생들은 교내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거나 학교 담을 넘어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수성 천변 유세장으로 간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등의 학생들도 산발적인 시위를 이어 갔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약 22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체포됐고 각 학교의 교사들도 책임추궁을 받았다.

▲ 2.28 당시 고등학생들이 경북도청 광장에 집결하여 시위하고 있는 모습 (연세대 박물관)
▲ 경북도청으로 질주하는 학생시위대의 모습 (연세대 박물관)
▲2.28 당시 중앙로에서 경북도청으로 진입하고 있는 학생 시위대 (연세대 박물관)
▲2.28 당시 경북도청에서 발언하는 시위학생
▲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학생들 모습 (연세대 박물관). ⓒ2.28민주운동 60주년 기념 사진집

대구지역 언론은 ‘2·28 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학생시위가 확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28의 함성은 3·15 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이후 역사에서 이는 현실 모순의 극복과 민주주의 수호, 불의에 대한 항거로 상징되는 학생들의 현실 참여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 4월 26일 고등학생 시위대가 '자유당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대구 중앙로를 통과하고 있다 (매일신문)
▲ 2.28 기념중앙공원의 2.28 기념시비. 김윤식(1928-1996) 시인의 시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이 새겨져 있다.
▲1962년 4월 19일 2.28학생의거기념탑이 명덕로터리에 준공됐다 (매일신문)
▲ 2.28민주운동기념탑. 1962년 명덕로타리에 세웠다가 1990년 두류공원으로 옮겼다.

무려 63년 전의 일이니, 이 역사는 그걸 직접 겪지 못한 이들의 시간 감각으로는 비현실적이다. 그보다 4년 전에 태어나 1960년대 말에 중학교에 입학한 내게도 2·28은 구체적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4·19혁명조차 ‘의거(義擧)’로 깎아내렸던 박정희 독재가 20여 년 가까이 이어졌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잊힌 2.28, 2018년 국가기념일로 부활
 
박정희 정권은 일제에 항거한 광주학생독립운동(1929)조차 1973년 정부 기념일 간소화 과정에서 폐지했다. 간소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정작 유신정권은 학생들의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했다. 고교생들이 참여한 한일회담 반대 시위(1964)를 겪은 바 있는 박정희 정권이 2·28을 따로 조명할 이유도 없었을지 모른다.
 
2·28민주운동 국가기념일 추진 범시민 위원회 출범한 것은 2016년이었고, 국회의 의결(2017)을 거쳐 국가기념일 지정된 것은 2018년이었다. 1962년 4월 19일 명덕로터리에 세워진 2·28 기념탑을 제외하면, 시민들에게 잊힌 날로 이어져 온 2·28의 기념 시설은 이후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2·28민주운동 기념회관, 2·28 기념 중앙공원, 대구교육박물관 2·28전시관, 2·28기념 학생도서관 등이 그것이다. 경북고, 경북대사대부고, 대구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상고, 대구농고, 대구공고 등 시위에 참여한 고교에 기념조형물이 세워진 것 외에도 대구지하철 1호선 명덕역 7번 출구에 조성되어 고교 동아리 공연, 2·28민주운동 헌정 공연 등 길거리 공연의 중심지가 된 2·28민주운동 기념 무대와 반월당의 2·28민주운동 집결지 표지판도 특기할 만하다.

▲ 대구시 반월당에 있는 2.28 민주운동 집결지 표지판

60년 후 …, 보수정당의 아성으로 변모한 대구
 
그러나 자유당 시절 야도(野都)로 이름 높았던 대구는 1970년대 이후부터 박정희를 이어 전두환, 노태우 등 지역 출신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보수정당의 아성으로 변모했다. 대구시와 경상북도 의회는 보수정당 일색이고, 시장과 도지사와 국회의원 등 선출직은 최근 20여 년간 보수정당이 독점해 버린 상태다.
 
1969년 나는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한 공립 중학교로 진학했다. 신암동에서 버스를 타고 통학했는데, 2·28기념탑이 서 있는 명덕로타리를 반드시 거쳐야 했다. 그때도 내게 2·28의거를 이야기해 준 사람은 학교가 아니라 대구의 고교에 다니던 형이었다. 이 탑은 1990년 2월 28일 두류공원으로 이전했고, 명덕로타리엔 2·28기념탑 터 표지석만 남아 있다.
 
2·28민주운동 63돌을 맞으면서 바래가는 민주주의와 극단의 대치로 막힌 이 땅의 정치를 우울하게 돌아본다.
 
 

2023. 2.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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