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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유배지 엘바섬 탈출

by 낮달2018 202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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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815년 2월 26일-보나파르트 엘바섬 탈출

▲ 엘바(Elba)은 이탈리아반도 서쪽 티레니아해(Tyrrenian Sea)의 토스카나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구글지도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는 유배 중이던, 이탈리아반도 서쪽 티레니아해(Tyrrenian Sea)의 토스카나 제도에서 가장 큰 섬 엘바(Elba)를 탈출했다. 1814년 4월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엘바섬으로 유배된 지 9개월 21일 만이었다. 그는 황제의 지위를 유지한 채 세습되지 않는 엘바 공국의 대공으로 섬에서 머물다가 영국군의 감시를 피해 엘바섬을 벗어난 것이었다.

 

지중해의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의 사회적 변동기 뒤에 요구된 사회적 안정을 기반으로 제1 제정(帝政)을 건설하였다. 그로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의 카이사르와 견주어지는 군사·정치적 천재로 일컬어진다.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포병 소위로 임관한 그는 프랑스 대혁명 때 코르시카로 귀향하였다가 1792년 일가를 이끌고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그가 군인으로 세운 최초의 무훈은 이듬해 가을 툴롱(Toulon) 항구의 왕당파 반란을 토벌한 여단 부관으로서였다.

 

이후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아우와 알게 되어 이탈리아 국경군의 지휘를 맡았으나 테르미도르(Thermidor)의 반동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파로 몰려 체포되어 다시 실각하여 일 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1795년 10월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Barras)에게서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물리쳤다.

 

이 승리로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인 사교계의 꽃 조제핀(Joséphine)과 결혼, 5명의 총재가 통치하던 혁명정부(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대혁명 이후 혁명파와 반혁명파 간의 이념 대립 등 혼란이 이어지면서 프랑스는 외세의 침입이 잦았다. 이탈리아 주둔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려 나폴레옹은 알프스산맥을 우회하여 이탈리아를 제압한 뒤 이듬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항복하고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조약으로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 넘겨주어야 했다.

 

승전으로 얻은 명성, 서른에 프랑스 정권 장악

 

잇따른 군사적 승리로 프랑스 안에서 나폴레옹의 인기가 한껏 높아지자 혁명정부는 그를 국민과 떨어뜨려 놓으려고 이집트 파병 명령을 내렸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상륙하여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이집트 원정 기간에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위협했고, 프랑스 해군은 넬슨의 영국함대에 참패하여 지중해 함대 주력은 전멸했다. 영국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자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고립되었다.

▲ 대관식에서 조제핀에게 직접 황후관을 하사하는 나폴레옹. 다비드, 루브르 박물관 소장

혼자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10월에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가 장악한 군대와 30여 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입법권을 가진 오백인회를 해산하여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붙였다.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나폴레옹은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이때 그는 불과 서른 살이었다.

 

연합국에 강화를 제의했으나 거절당한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 하였다. 부관들의 반대에도 그는 단호히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고 하면서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다. 이후 대(對) 프랑스 동맹은 붕괴하였고, 영국과도 1802년 아미앵 조약 체결로 안정을 되찾았다.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시행했다. 전국적으로 조세·행정 제도를 정비하면서 혁명기에 쇠퇴한 공업 생산력을 회복하고 산업 부흥에 힘을 쏟았다.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또, 국내법 정비에도 임하여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 이는 각 지역의 여러 가지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 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법전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은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하고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통합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그는 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은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1802년 8월에 그는 종신대통령(종신 집정)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 해안으로부터 10km 떨어진 엘바섬은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포도주 산지로도 유명하다.
▲ 엘바섬의 나폴레옹 빌라. 나폴레옹은 1814년 4월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엘바섬으로 유배된 지 9개월 21일 만에 섬을 탈출한다.

황제 등극, 그러나 권력은 내리막길로

 

1804년 그는 국민 투표를 통하여 프랑스 황제로 등극했다. 프랑스 국민 99.93% 찬성으로 등극하면서 그는 부르봉 왕가가 쓰던 ‘왕’ 대신 카롤루스 대제가 쓴 ‘황제’의 칭호를 썼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베토벤이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나폴레옹을 찬미하고자 제3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붙인 제목은 ‘보나파르트’였지만, 나폴레옹이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실망감에 악보의 표지를 찢고 ‘영웅’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베토벤은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고 전한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나폴레옹은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가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의 영국해군에 패배하여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꺾은 이래, 프랑스 육군은 전 유럽을 제압하여 명성을 온 세계에 떨쳤다.

 

1809년 조제핀과 이혼하고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지만 나폴레옹에게도 황혼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득권층인 귀족에게 억눌림을 받던 유럽의 부르주아지와 민중은 침공 프랑스군을 혁명군으로 환영하였지만, 프랑스군이 저지른 횡포 때문에 차차 원성이 높아졌다. 점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저항에 학살로 응대하자, 사람들의 환호는 저항으로 바뀌었다.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러시아·프러시아·오스트리아군은 마침내 제국의 수도 파리를 점령했다. 프랑스의 마르몽 원수는 비밀리에 연합군과 연락하여 합의를 본 후, 휘하 전군을 이끌고 그대로, 진군해오는 연합군에게 투항했다.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하겠다고 했지만,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한 그는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한 뒤 엘바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이 실각 후, 각국은 유럽의 재편을 논의하였지만, 이해관계 때문에 이는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민은 엘바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총 한 번 쏘지 않고 나폴레옹이 3월 20일 파리로 귀환한 것은 이러한 조건들 덕분이었다. 깜짝 놀란 루이 18세는 파리를 탈출했고 국민은 돌아온 황제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른바 ‘백일천하’의 시작이었다. 나폴레옹이 파리로 귀환하는 24일 동안 일간지 <모르퇴르( Moniteur universel)>의 관련 보도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비루한 언론의 예로 널리 인용된다.

▲ 나폴레옹의 귀환. 흔히 '나폴레옹의 100일'('백일천하'는 일본식 조어)

프랑스 혁명 당시 시민의 편에 서서 이들을 옹호함으로써 프랑스 최대의 일간지가 되었던 <모니퇴르>는 시민의 힘이 약해지자 왕정(王政)의 편으로 돌아섰고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또한 이를 찬양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되고 루이 18세가 등장하자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나폴레옹을 찬양하던 펜으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힘이 없는 황제를 맹렬하게 두들겨팼다. 이러한 <모니퇴르>의 논조는 나폴레옹이 유배되어 있는 동안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유배지를 탈출하자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신문의 탈바꿈은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진격해 올라오던 3주 동안의 논조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이 쥐앙만에 상륙하여 그를 진압하려는 군대를 연달아 격파하면서 북상, 파리에 접근하여 마침내 3월 20일 수도에 입성했다. 이 짧은 기간에 시시각각으로 변한 <모니퇴르>의 논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餓鬼), 쥐앙만에 상륙”
“괴수, 카프에 도착”
“폭군, 리용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점에 출현”
“보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그러나 파리 입성(入城)은 절대 불가!”
“황제, 퐁텐블로에 도착하시다”
“어제 황제 폐하께옵서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튀일리궁전에 듭시었다”

       - <한겨레> 신홍범 기자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 헌법 등으로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하고 연합국에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다시 전쟁에 돌입한 그는 초반 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워털루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하면서 백일천하도 막을 내렸다.

 

영웅에서 침략자까지-엇갈린 평가

 

쫓겨난 나폴레옹은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항구 봉쇄로 실패했고,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하였다. 영국 정부는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폐했다. 나폴레옹은 감금 생활을 하면서 수행원에게 구술 기록한 방대한 회상록을 남기고 1815년에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그는 평생 코르시카인의 거칢·솔직함을 잃지 않아, 농민 출신 사병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으나, 역사적 영웅으로 보면 인간성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행동의 주인공이었다. 광대한 구상력, 끝없는 현실 파악의 지적 능력, 감상성 없는 행동력은 마치 마력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상 유례없는 개성이 혁명 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과도기의 사회상황에서 보나파르티슴(Bonapartisme)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방식이 확립되었다.
 
      <두피디아>

▲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 있는 나폴레옹의 석관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철학자 헤겔(Hegel)은 ‘마상(馬上)의 세계정신’이라며 그를 나폴레옹으로 치켜세웠는데 나폴레옹을 직접 만난 바 있는 괴테(Goethe)도 이에 공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히테(Fichte)는 “나폴레옹이 가진 이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다른 나라의 주권과 자유를 짓밟는 침략자에 불과하다”(「독일 국민에게 고함」)라고 하며 그를 비판했다.

 

나폴레옹은 다른 나라를 점령할 때마다 그 지역을 약탈했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유럽에 전파해 자유주의를 이식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유럽 각국에 민족주의가 확산한 것은 나폴레옹의 침략에 대한 반동으로 비롯한 것도 사실이다.

 

 

2020. 2. 25. 낮달

 

참고

· <두피디아>

· <위키백과>

· 이만적, <한 권 서양사>(중앙일보 플러스, 2018)

· 신홍범, <모니퇴르>와 언론 속성.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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