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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수저 한 벌만 남기고 떠나다

by 낮달2018 2025. 3. 13.

1944년 3월 13일 - 민족해방운동가 김마리아 온 곳으로 돌아가다

▲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검거된 김마리아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당시 신문 기사

1944년 오늘(3월 13일), 민족해방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가 해방을 1년여 앞두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다. 향년 52세.  두 차례의 투옥 중에 받은 고문 후유증이 그의 숨을 거두어 갔다. 여성 교육이 전무했던 시절,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독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이 담대한 여성은 수저 한 벌만 유품으로 남겼다.

 

 “일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고문했는지,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고… 그러나 내 정신은 똑똑해서 ‘너희가 할 대로 다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빼내리라’ 하고 생각했어.”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저고리를 입어야 했던 사람

 

그이는 수감 중 여성으로서 치욕적 고문을 받아 한쪽 가슴을 잃고 늘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특별한 저고리를 입어야 했던 사람, 대한 독립과 결혼했다며 여러 번의 청혼을 모두 거절하고 마침내 홀몸으로 떠났던 사람이었다.

 

 김마리아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소래교회)가 설립된 황해도 장연 소래 출신이다. 본관은 광산. 아버지는 한학자로,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 대지주였다. 그는 학교와 교회를 통해 서구적 근대교육을 받고 기독교적 인생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연동여학교(현재 정신여자중학교)를 다니면서 안창호, 김규식과 절친한 숙부 김필순과 고모 김순애의 영향을 받아 남다른 민족의식을 형성했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하던 김마리아는 재일본 유학생들이 추진하고 있던 2·8 독립선언 등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 중 여학생은 없었다. 그는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독립운동에서의 여성들의 참여 확대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1919년 2월 중순, 졸업을 포기하고 김마리아는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기모노의 허리띠에 숨겨 귀국했다. 그때까지 여자 유학생에 대해선 일경의 감시가 느슨해서 그는 “여성들이 단체를 만들어 남자들과 긴밀히 연락하고 남자단체의 활동이 어려울 때는 여자단체가 대신하자”고 주장했다.

▲  김마리아는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기모노 허리띠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가져왔다 . KBS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 있소?”

 

 귀국 후 그는 대구와 광주, 서울과 황해도 일대에서 3·1운동 사전 준비운동을 벌였다. 황해도 봉산에서 3·1운동 발발 소식을 듣고 곧장 서울로 올라온 그는 3월 5일 모교 기숙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일제 검경에게 시종 당당해서 당시 일본 검사는 “너는 영웅이다. 너보다도 너를 낳은 네 어머니가 더 영웅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가 있소?”

 

김마리아는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 복역했다. 이때 고문으로 얻은, 뼛속에 고름이 차는 유양돌기염과 상악골 축농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고문으로 몸은 망가졌지만, 그는 출감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19년 9월 모교에서 비밀리에 20여 명의 여성 지도자들을 모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옛말에 나라 사랑하기를 내 집 사랑하듯 하라 하였거니와… 국민 모두가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으니… 아, 우리 부인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다. 빼앗긴 인권을 찾고 빼앗긴 국권을 회복할 최대의 목적을 향해서 우리 부인들에게는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취지서’ 중에서

 

 애국부인회는 전국적인 항일여성조직으로 확대되었고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11월 김마리아는 다시 투옥되었지만, 그의 기상은 여전히 드높았다. 징역 3년을 선고한 일제의 판결문에서도 그의 당당한 모습이 엿보인다. 

 

 “김마리아는 인격과 재질이 비범한 천재이나, 대담하고 거만하며, 가증한 것은 ‘나는 일본의 연호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니 그의 눈에 일본제국이란 것은 없다.……”

 

 김마리아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대의원, 국민대표회의 여성계 대표로 활동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독립을 위한 실력을 기르기 위해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여긴 김마리아는 192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 1938 년 이후 각 교파의 목회자들까지 신사참배에 나섰지만 ,  그는 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

10여 년간 파크대, 시카고대, 컬럼비아대, 뉴욕신학원 등에서 사회학, 교육행정학, 종교교육학을 공부했고 현지에서 만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다시 여성 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2년 7월, 40세의 나이로 귀국한 김마리아는 원산의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 교수로 취임, 기독교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던 중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성경을 통해 조국과 민족 사랑을 가르치는 데 진력했다.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한 강골의 운동가

 

일제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하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하고,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까지 신사참배에 나섰지만, 그가 이끄는 여전도회는 공식적 모임을 회피함으로써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강건했던 독립운동가도 총독부의 집요한 공작과 회유 앞에서 흔들리고 변절하는 예도 있었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혹독한 고문과 지속적인 탄압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가 떠나자 도산 안창호가 “김마리아 같은 여성 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됐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2007년 ‘여성 인물을 화폐에!’라는 이름의 여성단체는 유관순과 허난설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10만 원권 지폐의 인물로 선정하자며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마리아는 지폐의 도안으로 오를 만한 위대한 민족해방운동가였기 때문이다. 

▲  2004 년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는 김마리아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

김마리아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대동강에 뿌려졌다. 해방 뒤 정부는 1962년 김마리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남긴 어록비가 세워졌다.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이되 누구나 쉽게 지킬 수는 없는 그의 어록을 곰곰이 뜯어 읽으며 ‘나라와 결혼했다’고 강변했지만, 마침내 국민으로부터 내쳐진, ‘박근혜 없는 봄’을 맞는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2017. 3. 12. 낮달

 

  * 참고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훈터’

* 김마리아 어록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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