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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29

[순국]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 순국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사형집행으로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가 순국하였다. 1919년 9월,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폭탄 거사를 감행한 지 14개월 만이었다. 그는 처형 직전에 유언 대신 ‘사세시(辭世詩)’ 한 수를 남겼다.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有身無國 豈無感想)” 강우규는 평안남도 덕천 사람으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성장하였고, 청소년기에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이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 2023. 11. 28.
[순국(殉國)] 1940년 오늘-간도관리사, 13도의군 도총재 이범윤 순국하다 1940년 오늘-간도관리사, 13도의군 도총재 이범윤 순국하다 1940년 10월 20일, 마지막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였던 이범윤(李範允, 1856~1940)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그는 러일전쟁 때 러시아를 도와 일본군과 싸웠고, 을사늑약 후 연추로 망명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벌였던 의병장이었다. 이범윤은 주러시아 공사를 지냈고 경술국치 후에 자결한 이범진(1852~1910)의 아우다. 1907년 고종의 밀명으로 이준·이상설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동행했고 뒷날 러시아에 귀화한 이위종(1887~?)이 형의 아들, 곧 조카다.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이범윤이 1902년에 간도시찰(視察)로 관계에 들었을 때 그는 마흔여섯이.. 2023. 10. 20.
[순국] 박용만,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남기고 총탄에 스러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28년 10월 17일, 박용만, 항일무장투쟁의 꿈과 함께 지다 1928년 10월 17일, 베이징(北京)의 대본농간공사((大本農墾公司)에서 우성(宇醒)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이 한인 청년 이해명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에서 한인 소년병학교를 세운 이래, 오직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이루고자 진력해 온 독립운동가의 꿈도 스러졌다. 향년 47세.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출신이다. 한성일어학교(漢城日語學校)를 다닌 뒤 1895년(고종 32) 관립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숙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 졸업 후 한국 개화사상 형성에 한 줄기를 이룬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정치과에서 공부하였다고 하나, 이 학교 졸업생 명.. 2023. 10. 17.
[순국] 조명하(1928)와 이봉창(1932) 의사, 형장에서 지다 조명하 의사(1928.10.10.)와 이봉창 의사(1932.10.10.)는 순국 조명하 의거(1928년 5월 14일) 1928년과 1932년 오늘, 조명하(趙明河) 의사와 이봉창(李奉昌1900~1932) 의사가 각각 타이베이 형무소와 도쿄 이치가와(市川)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조명하는 히로히토의 장인인 일본제국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를 독검으로 찔렀고 이봉창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폭탄으로 저격한 이다. 조명하에게 찔린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는 상처에서 패혈증이 생겨 이듬해 1월 죽었고,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에 말과 마차가 손상되고 일본 고관대작 두 명이 다쳤으나 히로히토는 화를 면했다. 거사의 성패는 갈렸지만, 일제는 두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 2023. 10. 10.
[순국(殉國)] 유관순 열사, 열여덟에 지다 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벌여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이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18세. 1919년 4월 1일, 고향인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체포된 지 546일 만이었다. 1919년 5월 9일, 유관순은 1심인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 형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3년 형을 선고받았다. 함께 재판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유관순은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상고하지 않았다. 복심법원서 징역 3년 선고, 상고하지 않다 .. 2023. 9. 28.
[순국] 예관 신규식, 독립 기원하며 25일 단식 끝 순국하다 1922년 9월 25일, 독립 기원하며 25일 단식 끝 순국 1922년 9월 25일,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을 지냈던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1880~1922)이 자신이 선택했던 외교독립 노선의 좌절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정과 삼천만 동포를 잘 보살펴줄 것’을 당부하고 대화조차 거부하고 단식에 들어간 지 25일 만이었다. 숨이 멎기 전에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정부! 정부’였다. 상하이 임정은 수립된 지 2년여 만에 이념과 출신 지역에 따른 파벌로 인한 내부적 갈등으로 심각한 분열에 처해 있었다. 독립운동의 방법론에 따라 외교독립론(이승만계), 무장독립론(박용만계), 실력양성론(안창호계)이 충돌했고 임정의 대표성 문제도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제기된 국민대표회.. 2023. 9. 25.
[순국] 의병장 이근주, “의로움을 취해 인을 이루다” 1910년 9월 23일, 의병장 이근주 자정(自靖) 순국하다 1910년 9월 23일, 충남 홍주의진(洪州義陣)의 의병장 이근주(李根周, 1860~1910)가 부모의 묘에 주과(酒果)로 제사 지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술국치, 일제의 강제병합(8.29.)으로부터 25일 만이었다. 향년 50세. 그는 죽기 전 나무에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이라는 8자를 써 놓았다. 가족과 사우(社友)에게 남긴 유서는 왜경이 압수해가서 그의 형 이근상이 돌려달라고 하였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매장하지 말고 화장할 것을 당부하면서 ‘매장은 비린내 나는 땅으로 나를 멸하는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며 자정 이근주.. 2023. 9. 23.
[순국] 산남의진의 손영각 의병장, 입암 전투에서 순국 1907년 9월 1일-산남의진의 의병장 손영각 입암 전투에서 순국 1907년 9월 1일(음력, 양력 10월 7일)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일본군과 맞붙은 경북 포항시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손영각(孫永珏, 1855~1907) 참모장이 전사, 순국하였다. 향년 52세. 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1962 독립장), 중군장 이한구(1963 독립장), 좌영장 권규섭(1991 애국장) 등 산남의진의 주력이 모두 전사했다. 이 무렵 산남의진의 본진 지휘부[장영도소(將營都所)]는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에 정예 의병 1백여 명과 함께 포진하고 있었다. 이를 탐지한 일본군은 입암리(立巖里) 후원(後原)의 험준한 암석을 거점으로 야음을 틈타 침공해 들어왔다. 때마침 임무를 마치고 귀진한 이세기(1991 애국장)·우재룡(1963.. 2023. 8. 30.
[순국] 청산리 전투의 주역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자결 순국하다 1921년 9월 28일 -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자결 순국하다 1921년 9월 28일(음력 8월 27일), 노령 국경 부근 미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徐一, 1881~1921)이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진(自盡) 순국하였다. 그때 그는 자유시(自由市) 참변으로 타격을 입고 밀산에서 재기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전날, 소련 적군(赤軍)의 후원을 받은 토비(土匪) 수백 명이 야간 기습하여 진영이 초토화되고 훈련 중이던 숱한 청년 병사들이 희생되자 그는 독립군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지고자 짧은 유언을 남기고 자결한 것이었다. 향년 41세. “조국 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 2023. 8. 26.
[순국] 수당 이남규, 아들, 노비와 더불어 순국하다 1907년 8월 19일, 수당 이남규 일가의 순절 1907년 8월 19일(음력, 양력은 9월 26일)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에서 이남규(李南珪, 1855~1907) 의사가 일본 헌병과 관군의 칼끝에 스러졌다. 아들 충구(1874~1907)에게 겨누어진 칼을 손으로 막으며 다섯 손가락이 잘렸으나 끝내 아들과 더불어 순국하였다. 가마를 메고 가던 노비 김응길(1867~1907)도 일본군의 칼에 맞아 수당을 뒤따랐다. 수당(修堂) 이남규는 충남 예산 사람이다. 본관은 한산, 목은(牧隱)의 후예다. 187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형조참의·영흥 부사·안동 관찰사 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1895) 후 향리로 내려갔다. 1899년에 함경남북도 안렴사(按廉使)를 제수받았으나 자핵소(自劾疏:자기 허물을 스스.. 2023. 8. 18.
[순국]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서른한 살에 지다 의병장 안규홍, 대구감옥에서 순국 1910년 6월 22일, ‘담살이(머슴, 머슴살이)’ 의병장으로 불리는 안규홍(安圭洪, 1879~1910) 선생이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는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머슴살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창의(倡義)한 이래, 파청(巴靑)·진산(眞山)·원봉(圓峰) 대첩 등 의병 사상 기념비적 승리를 구가했던 보성 의진(義陣)을 이끈 의병장이었다. 향년 31세. 안규홍은 호좌(湖左) 의진의 선봉장 김백선(1849~1896), 영덕의 신돌석(1878~1908)과 함께 평민 의병장이었다. 너무 가난하여 머슴살이(담살이)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던 그는 ‘안 담살이’, ‘안 진사’ 등의 별명으로 불리었다. 안규홍은 전남 보성 출신이다. 본관은 죽산, 자는 제원(濟元), .. 2023. 6. 22.
[순국]‘훈춘 호랑이’ 황병길, 서른다섯에 지다 1920년 6월 1일, 훈춘의 3·1운동 지도자 황병길 순국 1920년 6월 1일, 독립투쟁으로 인한 과로로 쓰러진, 중국 훈춘(琿春) 지역의 3·1운동 지도자 황병길(黃炳吉, 1885~1920) 선생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향년 35세. 그는 일찍이 안중근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고 의병투쟁을 벌였고, 두만강 너머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 큰 전과를 거두어 ‘훈춘 호랑이’로 불리었던 만주지역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였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난 황병길은 가난하여 서당에 다니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글을 깨쳤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만주로 이주하여 1908년, 러일전쟁 전의 우리나라 간도 관리사였던 이범윤(1865~1940)이 조직한 사포대(射砲隊)에 가입하여 안중근, 최재형, .. 2023.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