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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

[순국] ‘마시탄’ 사건의 이의준 순국하다

by 낮달2018 202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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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에서 사이토 총독 공격한 이의준 의사 사형집행으로 순국

▲ 1922년 8월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독립군 연합단체 통의부 의용군 훈련 광경 (1922)

1929년 오늘(1월 25일), 1924년 5월, 압록강 중류인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 마시탄(馬嘶灘)에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공격했던 참의부 소대장 이의준(李義俊,1893~1929)이 일제의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향년 36세.

 

스물아홉 살에 만주로 건너가 항일무장투쟁을 벌였으나 이름조차 생소한 이 독립운동가는 사진 한 장도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대신 그가 사살하고자 했던 일제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통해 그의 삶을 역으로 돌아볼 뿐이다.

 

사이토 총독 공격한 마시탄 사건

 

이의준은 평북 위원(渭源) 사람이다. 성장기와 독립운동 투신 이전의 삶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1922년 8월이다. 김창균(1892~1929)과 같이 만주로 건너간 이의준은 1924년 조직된 항일 무장 독립운동단체 참의부 제1중대 제1소대장에 임명되어 무장 항일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김동삼(1878~1937 1962 대통령장)·오동진(1889~1944 1962 대한민국장) 등이 주도한 남만 지역 독립군단체들의 통합 조직 대한통의부가 1923년 노선을 두고 분열하게 되자, 통의부 의용군에서는 ‘남만(南滿) 군인대표’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독립운동 단체나 개인의 대립을 지양하고 임시정부 깃발 아래 대동단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통의부는 광복군사령부의 전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 부대로 편성되었으니, 이 조직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 약칭 참의부)다. 참의부는 일본 군경 습격, 일제 통치기관 파괴, 친일파 숙청, 군자금 모금 등 각 방면에 걸쳐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참의부 소대장 이의준은 1923년 4월에는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 우편 호송 중인 현금 1,500원을 탈취하였고 같은 해 8월에는 평안북도 강계군 청풍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1924년 5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 등을 거느리고 한만(韓滿) 국경 시찰에 나섰다. 다섯 해 전, 강우규(姜宇奎)의 사이토 총독 암살 미수 사건(1919)[관련 글 :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을 완고한 불평분자의 소행일 뿐이라고 허위 선전한 조선총독부는, 치안 유지에 일정한 자신을 얻게 된 때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駐滿) 참의부의 대원들 . 192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사진 .

이 정보를 입수한 참의부는 사이토 일행에 대한 공격, 암살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그 중책을 맡은 이가 제1중대 제2소대장 이의준(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이명인 한권웅으로 서술)이었다. 이의준은 참의부의 참의장 겸 제1중대장 채찬(蔡燦)의 명령을 받아 김창균 등 8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24년 5월 19일,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며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일행이 평북 강계군 고산면 마시탄(馬嘶灘)의 강가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의준의 결사대는 중국 쪽 강가에 잠복하고 있다가 사이토 일행을 향하여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 이의준 의사의 예심 종결 기사

이에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던 호위선의 경비병들과 수행원들은 대항 사격을 가해 왔다. 쌍방 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이 틈을 타 사이토 일행을 태운 경비선이 현장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결사대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국경 지방에 대한 일제의 경비가 강화되었고, 독립군 부대에 대한 탄압 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의준은 소대원들을 이끌고 국내 진공 작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참의부 소대장 이의준의 항일투쟁

 

1924년 7월, 이의준 부대는 평북 강계군 곡하면 쌍부동으로 진입한 뒤, 일제의 통신 시설을 파괴하고자 신의주와 강계를 잇는 전선을 절단하고 전신주 다섯 개를 잘라 넘어뜨렸다. 그리고 같은 군 어운동에서도 전신주 네 개를 넘어뜨렸다.

 

이렇게 일제의 통신을 두절시킨 뒤, 신용섭 등 여섯 명의 소대원을 거느리고 강계군의 계인계와 인근 염진희 집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며칠 뒤 다시 시중면 시천동의 김찬원 집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거두는 등 지속적인 군자금 수합 활동을 벌였다.

 

이의준은 친일 밀정 처단 투쟁도 벌였다. 같은 해 6월, 평북 강계군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어운면에서 밀정 노릇을 하던 자를 잡아다가 장갑골에서 총살, 처단함으로써 부일(附日) 친일배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의준은 1925년 6월 19일에는 24명의 소대원을 거느리고 강계군 창곡산(倉谷山)에서 강계경찰서의 수색대를 습격하여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1925년 6월 중국과 이른바 ‘삼시(三矢)협정’(한인 취체에 관한 쌍방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제부터 독립군들은 일제만이 아니라 중국 관헌의 감시망까지 피해야 하는 이중의 짐을 지고 다니게 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고립 상황 때문에 이의준은 1926년 말 만주에서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일제 경찰에 넘겨졌다.

▲ 복심 \에서도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기사.

이의준에 대한 재판은 1927년 10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이의준은 재판장이 개정을 알리기도 전에 앞에 나아가 “어떤 일이든지 변명할 시간과 기타 공술의 자유를 충분히 주지 않으면 일절 진술하지 않겠다.”고 일갈하는 등 기개를 잃지 않았다.

 

1928년 11월 6일, 마침내 평양 복심법원에서 이의준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때에도 “이미 각오한 바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평정을 잃지 않았던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이듬해 1월 25일 이루어졌다.

 

불발 폭탄과 빗나간 총탄이 광복으로 이어졌다

▲ 참의부 본부가 있었던 집안시 화전진 전경. ⓒ 독립기념관

무장투쟁을 전개할 때 이병준(李秉俊)과 한권웅(韓權雄) 등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던 이 육척장신의 호방한 평안도 사나이는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려 추서한 건국훈장 독립장이 우리에게 남겨진 그의 삶의 자취를 돌아보게 하는 유일한 표지다.

 

돌이켜보면, 일제 35년 동안 조국의 제단에 자신의 삶을 던진 독립투사들은 얼마였던가. 그들이 던진 수류탄과 폭탄은 터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그들이 쏜 총탄은 표적을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들 끊이지 않은 투쟁의 집적이 광복과 해방으로 이어진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걸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그들 유 무명의 투사들이 풍찬노숙으로 지켜온 조국과 얼은 21세기에 국정교과서로, 관찬의 우편향 역사로 위협받고 있다.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지 못해 안달하고 박정희의 과에 눈을 감은 채 구국의 영웅으로 기리는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이들 투사가 겨누었던 총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2017. 1.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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