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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2019/0631

[청송 기행] 송소고택(松韶故宅) - 청송 심부자 댁 왕버들과 물안개의 호수 주산지 옆 청송 심부자댁 ‘청송’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를까. ‘주왕산’이나 ‘주산지’ 따위의 명승지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청송교도소’나 지금은 청송제3교도소가 된 ‘청송보호감호소’를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터이다. 경북 북부의 궁벽한 산골인 청송이 사람들에게 ‘교도소’나 ‘감호소’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상황은 아무래도 찜찜할 수밖에 없겠다. ‘교도소’와 ‘보호감호소’의 청송 지난 3월에 법무부 장관이 청송제2교도소에 사형집행시설 설치를 지시한 것에 대해 청송 지역이 크게 반발한 것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983년 보호감호소가 설치되면서 악명 높은 교도소 소재지로 알려진 데 이어 청송에 사형집행 시설이 들어서면 청송의 ‘청정 지역 이미지’가 훼손.. 2019. 6. 12.
두 개의 ‘웨딩 케이크’, 그 삶과 사랑 트윈 폴리오의 번안곡 ‘웨딩 케이크’ 추석 연휴 때다. ‘트윈폴리오’ 멤버가 나온 한 예능 프로그램을 아주 흥미롭게 시청했다. 어느새 이순을 훌쩍 넘긴 저 70년대 통기타 가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내외는 묘한 감회에 젖었다. 그 시절, 그들이 부른 노래는 우리 세대가 누렸던 젊음과 자유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트윈폴리오, 70년대의 ‘젊음과 자유’ 70년대 초중반, KBS-TV에서 방영하던 ‘젊음의 행진’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주역들이 바로 청바지에 기타를 메고 나와 이야기와 함께 포크송을 들려주던 트윈폴리오였다. 송창식과 윤형주, 그리고 그들이 부른 노래와 세월이 마치 빛바랜 무성영화처럼 떠오른다. 솔로로 활동할 때의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지만, 웬일인지 ‘트윈폴리오’에 대한 기억.. 2019. 6. 11.
‘모스크바 동네’가 배출한 항일운동가 권오설 [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④] 20년대 사회주의 운동, 잊힌 시대와 삶 여기 한 혁명가가 있다. 감옥에서 찍은 일그러지고 바랜 사진 속에서 그는 정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일제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향년 서른넷. 그의 시신은 일경의 삼엄한 경비로 봉분도 올리지 못한 평장(平葬)으로 고향 인근의 산기슭에 묻혔다. 그 무덤에 봉분이 올라간 건 수십 년이 흐르고 나서였다. 2차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제2대 책임 비서였던 그는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노선을 택한 ‘실용주의’ 운동가로 평가되는 이다. 조선공산당의 ‘6·10 운동 투쟁지도 특별위원회’ 총책임자로 6·10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했지만, 해방 후 극심한 좌우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전쟁을 거친 자본주의 조국.. 2019. 6. 10.
‘아름다운 우리 말글 맵시’, 위당 정인보를 생각한다 국학자 위당 정인보가 쓴 아름다운 우리 ‘말글 맵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을 처음 만난 건 개천절이나 광복절의 노랫말을 통해서였다. 그는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의 국경일 노래의 가사를 썼다. 위당은 정부 수립 후 국가 사정(司正)을 맡은 감찰위원장을 지냈는데 이들 노랫말을 지은 것은 이 시기였을지 모르겠다. 위당이 다듬은 아름다운 우리 말글의 맵시 위당의 노랫말은 좀 다르다. 그가 한말의 대학자 이건방(李建芳)의 제자로 10대 시절부터 문명을 날렸던 한학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쓴 아름답고 전아한 의고체(擬古體)의 한글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 듯하다. 그가 쓴 노랫말에는 우리 고유어의 단정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한강.. 2019. 6. 9.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와 40년 세월 처음 만난 팝송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와 소년 시절 원곡인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를 먼저 알았는지 아니면 조영남이 부른 번안곡 ‘물레방아 인생’이 먼저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 비슷한 시기에 두 노래를 만났다고 하면 그리 틀리지 않을 듯하다. 원곡과 번안곡의 가사는 확연히 달랐지만 그게 별 대수겠는가. 1971년, 우리는 까까머리 중3이었다. 고등학교 입시가 코앞이었지만 뒤늦게 만난 친구들이 좋아서 날마다 내 자취방에 모여서 노는 데 미쳐 있을 때였다. 치기 만만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만난 친구 가운데 ‘진’이 있었다. 우리는 ‘문학’에 어정쩡하게 빠져 있었다는 점에서 코드가 같았다. ‘프라우드 메리’, 까까머리 시절의 노래 녀석은 시를, 나는 소설 쪽에 맘을 두고 있었.. 2019. 6. 8.
거기 뜬구름 같은 부귀도 무릉도원도 없다 [안동 시가 기행 ⑦] 갈봉 김득연의 한글 시가를 찾아 떠나는 이 기행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그간 누차 뇌었듯 고을마다 시인 묵객들로 넘치지만 정작 한글로 그 시대와 삶을 기록한 이는 드문 까닭이다. 비록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노래하는 데 그쳤다고는 하나 퇴계나 송암 같은 학자 문인들이 여러 편의 한글 시가를 남긴 것이 돋보이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한글 시가를 찾아가는 오늘의 여정은 안동시 와룡면으로 향한다. 와룡면 가구리(佳邱里)에 있는, 광산김씨 유일재공파의 종가인 유일재(惟一齋) 고택을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안동의 광산김씨는 구담, 가구, 외내 등 세 군데에 뿌리를 내렸는데 가구리에 세거해 온 이들을 유일재공파로 부른다. 애당초 유일재의 조부인 담암 김용석(金用石, 1453~?).. 2019. 6. 2.
바람 앞 농촌, ‘이 중에 즐거운 뜻’은 이미 거기 없다 [안동 시가 기행 ⑥]존재 이휘일의 일찍이, 한문으로도 완벽한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조선조 사대부들은 한문뿐 아니라, ‘언문’이라 천대받던 한글로도 삶과 세상을 노래했다. 우리가 오늘날 국문 시가를 즐기며 당대 현실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다. 이들 사대부는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였고,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그릇’이었다. 퇴계나 율곡 같은 이들이 과 를 통해서 노래한 것은 그들의 성리학적 세계관,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였다. 이들 사대부가 관념적인 유교 이념을 형상화하거나 안빈낙도에 침잠하고 있을 때, 피지배계층인 농민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이들은 여전히 문학의 향유층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노래할 여유도 능력도 .. 2019.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