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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드 메리(Proud Mary)’와 40년 세월

by 낮달2018 2019.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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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팝송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와 소년 시절

▲ '프라우드 메리'는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이다.

원곡인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를 먼저 알았는지 아니면 조영남이 부른 번안곡 ‘물레방아 인생’이 먼저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 비슷한 시기에 두 노래를 만났다고 하면 그리 틀리지 않을 듯하다. 원곡과 번안곡의 가사는 확연히 달랐지만 그게 별 대수겠는가.

 

1971년, 우리는 까까머리 중3이었다. 고등학교 입시가 코앞이었지만 뒤늦게 만난 친구들이 좋아서 날마다 내 자취방에 모여서 노는 데 미쳐 있을 때였다. 치기 만만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만난 친구 가운데 ‘진’이 있었다. 우리는 ‘문학’에 어정쩡하게 빠져 있었다는 점에서 코드가 같았다.

 

‘프라우드 메리’, 까까머리 시절의 노래

 

녀석은 시를, 나는 소설 쪽에 맘을 두고 있었지만, 문학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의기투합했던 것 같다. 마침 내가 월세로 살던 자취방 근처에 녀석의 집이 있어서 녀석은 거의 내 방에 와서 살았다.

 

고도 근시라 안경을 끼었고, 상대를 깔보는 듯한 시건방진 표정의 녀석이 환상적인 발음으로 부른 노래가 ‘프라우드 메리’였다. 선명한 분홍빛 얄팍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부르는 녀석의 ‘프라우드 메리’를 우리는 그저 앞뒤 서너 소절 정도만 따라 부르면서 바다 건너온 문화를 즐긴다는 겉멋에 빠지곤 했다.

 

집집이 라디오나 TV가 보급되어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가끔 듣는 라디오나 이른바 ‘야전’이라고 부르던 휴대용 전축에 걸어놓은 엘피판을 통해서 대중문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가 만났던 팝송은 대체로 그런 형태를 통해서 유통된 것이었다.

 

그때 우리가 개처럼 쏘다니던 대구 대명동 거리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골목의 레코드점의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톰 존스의 프라우드 메리를 따라 부르면서 우리는 1971년과 작별했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는 각각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진학을 무산시켰다. 그는 자신이 지망한 한 실업계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린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를 배출하기도 한 그 학교의 우중충한 교사를 바라보면서 그는 뒤늦게 거기서 3년 동안 자신을 묵힐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고등학교의 첫 여름방학을 맞기도 전에 녀석은 오대산의 한 거찰로 출가했다. 글쎄, 그가 아예 승려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취방에 모여 소주를 곁들인 잔치를 베풀어 녀석을 배웅했다.

 

녀석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서너 달 후였던 것 같다. 그가 다시 돌아온 이유도 분명하지는 않다. 녀석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보낸 몇 달간의 행자 시절을 우리에게 조곤조곤 일러주었고, 우리는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의 ‘썰’에 귀를 기울이며 탄성을 지르곤 했다.

▲ 산사의 겨울.눈 내린 전북 부안 개암사. 2011년 2 월 .

녀석이 쓴 시 두 편이 오랫동안 내 습작 노트 한쪽에 끼어 있었다. ‘말에 자유를 주면 마치 미친 말의 형상이어서’로 시작되는 시 한 편과 ‘초녀부(招女賦)’라는 제목을 단 짤막한 시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버렸다. 나는 단지 그 시구의 첫 마디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녀석은 2년 후에 다시 입산했고 이후 우리의 교유는 끊어졌다. 나는 가끔 그가 승려의 신분으로 병역을 마쳤다든가, 우리가 자주 들르던 술집에 들러 대포 한 사발을 마시고 사라졌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소식이 궁금할 법했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의 소식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가 간 길을, 그가 정리해야 할 속세의 연이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마다 사느라고 팍팍한 삶을 이어가게 되면서 우리는 모두 뿔뿔이 헤어졌다. 십몇 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1991년 여름, 전교조 가입과 활동으로 고향 근방의 남학교에서 쫓겨난 내가 지역 조직의 상근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그가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벗의 ‘출가’, 그리고 십수 년 만의 해후

 

그는 내가 근무했던 학교를 통해 내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했다. 약속 장소에 나가자 길가에 서 있던 낡아빠진 검정 중형 승용차에서 사내 하나가 내렸다. 나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중머리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상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그는 머리를 길렀고 얼룩덜룩한 티셔츠에 쑥색의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찌 그를 잊을 수 있겠는가. 외양만 바뀌었을 뿐 그는 예전의 내 친구 진이 틀림없었다.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느낌으로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내가 자신을 유심히 뜯어보는 걸 눈치챈 녀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뭘? 내 신분이 궁금해? 나 ○○종 소속 승려야…….”

 

대구 인근의 어느 골짝에 법당을 하나 짓고 있는데 승복을 입고 일을 보자니 불편해서 신도들의 양해를 구하고 머리를 기르고 사복을 입는다고 했다. 그는 이태 전 전교조 사태 때 라디오 뉴스에서 내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결코 탈퇴각서를 쓰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서 녀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만큼 들은 아내가 국수를 끓이다가 날 불러냈다.

 

“어떡해요? 고기를 넣어요, 말아요?”
“글쎄, 어쩔까……. 넣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던 녀석인데 뭘…….”

 

점심상이 나오자 나는 불편하면 고기를 건져내라고 말했는데 그는 괜찮다고, 아주 심상한 표정으로 국수를 깨끗이 비웠다. 서로에게 부재했던 세월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우리는 대화의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자꾸만 엇갈렸다. 녀석이 어디 술이나 하러 가자고 말했다. 나는 반색을 하고 녀석과 집을 나왔다.

 

대낮이었다. 나는 읍내 중심가에 있는 경양식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낮술을 마시는데 거기 말고 마땅한 장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맥주를 마셨다. 괜찮겠냐고 그가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가야 한다는 그에게 술을 마셔서 어떻게 운전할 거냐니까 그 역시 괜찮다고 했다.

 

“어떤 독주를 마셔도 꼭지가 돌거나 필름이 끊어지는 일은 없어. 그러면 중이 아니지. 걱정하지 말아.”

 

그의 말이 맞았다. 결국, 필름이 끊어진 건 나였다. 그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몽롱한데 아침에 일어나니 그는 가고 없었다. 며칠 후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심상하게 말했다. 천하 없는 술을 마셔도 중은 정신을 잃지 않는다니까 그러네…….

 

단편적으로 나눈 이야기 속에서 그가 살아온 이력을 나는 띄엄띄엄 읽었다. 그는 해인사의 승가대학을 수료했고 민중불교를 내세우며 대구의 빌딩 한구석에서 노숙자처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자기 신도들을 모아서 대구 도심에다 법당을 열었다. 그의 민중 포교는 나름의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노랑할배(부처님) 덕분에 공부는 꽤 했어. 연애도 뜨겁게 해 봤고…….”

 

그는 언제나 내가 등단하리라 믿고 있었다고 했다. 늘 문예지나 신춘문예 당선작이 실린 신문을 눈여겨보았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녀석의 번득이는 재기가 시로 치열하게 꽃 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독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절로 놀러와. 원하는 대로 대접해 줄게. 술이 필요하면 술을 줄게. 스스로 견딜 수 있을 만큼이라면 자학도 괜찮아. 자학 끝에 한 소식 할 수도 있잖아?”

 

얼마 후에 나는 그의 ‘절’에 한번 들렀다. 농가 주택으로 허가를 내고 지은 법당인데, 지붕은 슬레이트를 얹었다. 기와를 얹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허가가 농가 주택이어서 그럴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공양주 보살의 저녁 공양을 들었던가, 말았던가.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두서없이 나누다가 헤어졌다.

 

그러고 두어 달이 지났다. 안부 전화를 했더니 거길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떠난다고 했다. 그러다가 자연 소식이 끊어졌다. 전화를 잃으면 안부도 잃을 때였으니까 말이다. 3년 후에 복직하면서 나는 경북 북부의 시골로 옮아왔다. 그의 소식을 여전히 알지 못한 채. 그리고 다시 속절없이 흐른 세월이 열여섯 해다…….

▲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 멤버들. 프라우드 메리는 이들이 만들고 부른 노래다 .

톰 존스의 ‘프라우드 메리’를 부르고 다닐 무렵, 정작 우리는 그 가사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영남이 부른 ‘물레방아 인생’이 번안곡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에서 검색만 하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라우드 메리’, 미시시피의 유람선의 ‘자유’

 

오늘 인터넷에서 확인해 보니 이 노래를 부른 이는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이라는 그룹이다. 애당초 ‘블루 벨벳’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 오던 이들이 ‘더러워진 물을 깨끗이 정화한다’는 의미의 CCR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68년이라고 한다.

 

▲ 티나 터너와 남편 아이크 듀엣

이 그룹의 멤버인 존 C.포커티가 1968년에 만든 노래가 ‘프라우드 메리’다. 그때 우리는 노래의 제목을 두고 ‘자랑스러운 메리’가 어쨌느냐고 반문하곤 했지만 ‘프라우드 메리’는 미시시피 강을 오르내렸던 유람선의 이름인 모양이다. 배 옆구리에 바퀴를 달고 석탄을 때 운항했던 배인데 요즘도 ‘프라우드 메리’라는 이름의 유람선이 많다고 한다.

 

가사에 드러난 노래의 화자는 멤피스와 뉴올리언스에서 접시닦이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도시의 직장은 힘들었다. 잠도 충분히 자지 못하고 혹사당하다가 그는 직장을 그만둔다. ‘도시의 좋은 점을 알 수 없었’던 그는 우연히 ‘멋진 배’를 보게 된다.

 

그게 유람선 ‘프라우드 메리’다. 그는 거기서만큼은 즐거웠던 모양이다. 되풀이되는 노랫말 속에서 ‘커다란 바퀴는 쉬지 않고 돌아가고 프라우드 메리호는 항해를 계속한’다고 그는 노래하고 있다. 그 배의 ‘멈추지 않는 운항’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과 지향이었을 터였다.

 

꽤 속도감 있는 노래의 흐름은 매우 흥겹다. 이 노래가 당시 중고생들 소풍 때 널리 불린 춤곡이었던 이유가 여기 있을 터이다. CCR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프라우드 메리’는 다른 가수나 밴드가 부른 버전이 100개가 넘는다니(정말?) 그 인기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 톰 존스 경(Sir Thomas Jones Woodward, 1940~  ). 역시 프라우드 메리는 톰 존스의 것이 제일 익숙하고 편하다.

 

 

 

▲ 비욘세와 주얼 듀엣

CCR이 만들고 처음 불렀지만, 이 노래는 티나 터너가 남편이었던 아이크와 듀엣으로 부른 게 가장 사랑을 받았단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도 이 노래를 불렀다. 비욘세와 쥬얼이 함께 부르는 ‘프라우드 메리’는 아주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인터넷에서 여러 버전의 노래를 들어보았다. 역시 내겐 톰 존스의 노래가 가장 익숙하고 편하다. 그러고 보면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귀는 여전히 그 시절의 리듬을 기억하고 있는가 보다. 톰 존스는 올해 일흔 살이 되었다. 기사 작위까지 받은 이 영국인 가수가 부른 ‘고향의 푸른 잔디(Green Green Grass Of Home)’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1971년 까까머리 중3은 이제 쉰다섯의 초로가 되었다. 그의 절에서 만난 걸 끝으로 나는 내 친구 진의 소식을 더는 알지 못한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승려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는 어느 절집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묻고 있을까. 톰 존스의 ‘프라우드 메리’를 아련히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나는 까마득한 옛 친구의 안부를 물어본다.

 


* 톰 존스 '프라우드 메리' 유튜브로 듣기

 

2010. 12.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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