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시가 기행 ⑥]존재 이휘일의 <전가팔곡(田家八曲)>
일찍이, 한문으로도 완벽한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조선조 사대부들은 한문뿐 아니라, ‘언문’이라 천대받던 한글로도 삶과 세상을 노래했다. 우리가 오늘날 국문 시가를 즐기며 당대 현실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다.
이들 사대부는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였고,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그릇’이었다. 퇴계나 율곡 같은 이들이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통해서 노래한 것은 그들의 성리학적 세계관,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였다.
이들 사대부가 관념적인 유교 이념을 형상화하거나 안빈낙도에 침잠하고 있을 때, 피지배계층인 농민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이들은 여전히 문학의 향유층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노래할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적어도 이들이 자신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17, 18세기의 평민 가객들이 출현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들 농민의 고단한 삶의 터전이었던 ‘땅’과 ‘들’은 그러나 사대부들에게는 ‘자연’이란 이름의 관념적 공간이었다. 사대부들은 자연을 ‘안빈낙도’의 삶을 구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에겐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이었지만, 사대부들에게 그것은 유유자적과 음풍농월의 공간이었을 뿐이다.
자연, ‘음풍농월’에서 ‘건강한 노동’의 공간으로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서 이들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시대의 진전에 따라 구체적 현실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사대부들에게도 자연은 ‘건강한 노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들 가운데는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농사를 짓는 ‘농민의 정서’로 농촌 생활을 노래하는 이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경상도 영해의 이휘일(李徽逸, 1619~1672)과 전라도 장흥의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그들이다. 약 백여 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영호남에 살았던 이 두 선비는 <전가팔곡(田家八曲)>과 <농가구장(農歌九章)>을 통해 농촌과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전가팔곡>과 <농가구장>은 각각 8수, 9수의 연시조다. 두 노래는 제목도 닮았고, 길이도 비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 모두 ‘존재(存齋)’라는 아호를 가졌다는 점이다. 한 세기를 격해 농민들의 삶의 현장인 농촌과 농민의 삶을 노래한 두 선비의 인연은 ‘이름’을 통해서 이어진 것일까.
존재 이휘일의 자취를 따라 영해, 영덕군 창수면으로 길을 떠난다. 존재의 본관은 재령. 그의 가계는 만만찮다. 이휘일은, 작가 이문열이 자신의 보수적·퇴영적 세계관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 소설에 불러낸 조상인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1598~1680)의 아들이다.
작가로 입신한 13대손으로부터, 시문과 서화에 능했으나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새로운 선택을 감행’했다고 칭송되는 이 여인은 이 나라 최초의 여성 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다. 퇴계의 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무남독녀로 제자인 석계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의 후취였던 정부인은 소생으로 8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맏이가 존재고, 둘째가 현일(玄逸)이다.
부친인 경당이 이었던 퇴계의 학통은 남편인 석계를 거쳐 둘째 아들인 영남 남인의 영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로 이어졌다. 그녀가 정부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현일이 이조판서 자리에 오르면서 내려진 품계에 따른 것이다.
퇴계 학맥은 둘째인 갈암 이현일을 거쳐 갈암의 셋째아들인 밀암 이재(李栽, 1657~1730)로 이어졌고, 밀암의 외손, 그러니까 정부인에게는 외현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 1711~1781)으로 이어졌다. 동방 유학의 성현인 퇴계의 학맥을 이은 학자 넷이 그이와 피를 나눈 이들이니 한국 성리학에서 경당의 위치가 퇴계 학맥의 중심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지나치지 않은 셈이다.
안동에서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영덕군 창수면으로 가는 길은 초행이다. ‘손바닥만 하다’는 이 나라의 골과 산은 그러나 뜻밖에 깊고 너르다. 낯선 땅을 밟으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그 ‘손바닥’이 일종의 관용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영양군으로 들자마자 친절한 ‘내비’는 ‘석보’ 쪽으로 우회전하라고 권한다. 석보면 원리리, 재령 이씨의 집성촌으로 존재의 부친 석계 이시명의 고택과 정부인 장씨의 유적비가 있는 ‘두들마을’을 지나는가 싶은데 갑자기 내비는 마을로 들어가라고 한다. 순간 우리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 마을은 정작 정부인이 말년을 보낸 곳이긴 하지만 존재와는 별 인연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비’를 앞세운 지 벌써 이태째다. 사람만큼 명석하지는 않지만, 녀석의 안내대로 가도 이른바 ‘대과(大過)’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마을을 돌아 거기 있을 것 같지 않은 좁고 꼬부라진 길로 차를 인도한다. 한참을 달리자, 제법 가파른 재가 앞을 막는다.
나는 그 재 꼭대기를 돌아서야 그게 ‘창수령’이라는 걸 알았다. 어딘가 눈에 익은 이름이다 했더니 그게 이문열의 소설 <그해 겨울>의 배경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창수를 다녀와서다. 죽기 위해 ‘유서와 약병’을 품고 길을 떠난 젊은이와 열아홉 해의 세월을 보상받으려 칼을 품은 사내가 함께 넘는 폭설 내린 고갯길…….
그의 소설을 읽던 스무 살 무렵의 자신의 모습을 어렴풋하게 떠올린다. 그리고 ‘한 번 더 떨어지면 낙선소설집을 내겠다’고 이를 갈았던 문학청년이 밀리언셀러의 ‘국민작가’로 자란 30년이 훌쩍 지났다. 작가는 모든 진보 의제들을 적대시하며 보수 우익을 옹호하는 기득권의 성채로 들어앉았고 그때의 스무 살 풋내기는 이제 자기 비평에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노회한 독자가 되었다.
재를 넘자 이내 창수다. 창수 오촌리는 한길에 닿아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나지막한 산에 기대 들어선 마을은 살림집들로 빼곡한 여느 마을과는 달리 집들이 듬성듬성 들어섰고, 마을 한가운데는 웃자란 볏논과 담배밭, 도라지와 콩밭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들 가운데 들어선 마을 같았는데 여러 군데 예사롭지 않은 기와집이 눈에 띄었다.
한참 보수 중인 존재종택은 존재와 갈암 형제의 살림집이다. 존재가 인근 인량리에서 이 마을로 솔가해 온 1661년(현종 2)에 지은 ‘ㅁ’자형의 정침(正寢)과 사당으로 구성된 집이다. 지금 사당은 헐려 없어지고 정침의 오른쪽 뒤 언덕 위에 초석만 남아 있다고 한다. X자형의 비계로 둘러싸인 종택 뒤편으로는 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대밭이 멋지네요.”
“대밭, 정말 좋지요?”
흙을 이기고 있던 젊은 인부와 하나 마나 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건 말하자면 나그네를 맞이하는 주인(비록 인부이긴 하지만)의 예법인 셈이었다. 나그네가 찾아온 집은 수리 중이었으니, 둘이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온전한 대밭뿐이었던 게다.
존재는 열세 살 때 외조부 장흥효의 문하에 들어가서 글을 읽었고 뒤에 이 마을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아우 갈암 이현일과 함께 당시 주리학파(主理學派)를 대표하였으나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는 성리학 공부를 그치고 병서를 읽기 시작했다. 효종의 북벌계획에 도움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효종 사후 그는 다시 근사록·성리대전·주자절요·퇴계집 등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일가를 이룬다. 존재는 당대의 대 유학자였으나 그의 삶과 이름은 아우 갈암의 명성에 가려 빛이 바랬다. 퇴계의 학맥을 이은 이도 그가 아니라, 외조부 경당의 직접 훈도(薰陶)도 받지 못한 아우인 것이다.
‘초야’에서 노래한 ‘노동의 즐거움’
종택 사랑채의 툇마루에 앉으면 마을과 들이 한눈에 들어올까. 존재 이휘일이 <전가팔곡>을 쓴 것은 그가 이 마을로 솔가한 3년 후(1664)로 그의 나이 마흔다섯일 때다. 이 노래는 농촌 풍경과 농민의 노고를 소재로 한 8곡의 단가(短歌), 곧 평시조 8수로 된 연시조다.
그는 〈서전가팔곡후(書田家八曲後)〉에서 이 노래를 쓴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농사짓는 사람은 아니나, 전원에 오래 있어 농사일을 익히 알므로 본 것을 노래에 나타낸다. 비록 그 성향(聲響)의 느리고 빠름이 절주(節奏)와 격조에 다 맞지는 않지만, 마을의 음탕하고 태만한 소리에 비하면 나을 것이다. 그래서 곁에 있는 아이들로 하여금 익혀 노래하게 하고 수시로 들으며 스스로 즐기려 한다.”
- <존재집(存齋集)> 권4
<전가팔곡>은 자연 친화적 삶을 노래한 이전 시기의 노래나 농민들의 생활상을 지켜보는 처지에서 그린 작품과는 다르다. 존재는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직접 농사일을 하는 농부의 처지에서 농촌과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엄한 양반 마님께서 손수 농사를 지었을 리는 없다.
<전가팔곡>은 서사(序詞) 격인 제1곡에서 ‘풍년을 기원’[원풍(願豊)]한 뒤, 제2곡부터 5곡까지는 춘·하·추·동 사시에 걸쳐 농민이 해야 할 농사일의 노고를 담았다. 그다음 6곡부터 8곡까지에는 하루를 새벽·낮·저녁으로 나누어 일하는 즐거움을 소담스럽게 노래했다.
[원풍(願豊)]
세상에 버려진 몸이 견무(畎畝)에 늙어가니
바깥일 내 모르고 하는 일은 무엇인고.
이 중에 우국성심(憂國誠心)은 풍년을 원하노라.
* 견무 : 논밭의 이랑, 여기서는 초야
[춘(春)]
농부가 와 이르되, 봄 왔으니 밭에 가세.
앞집에 쟁기 잡고, 뒷집에 따비 가져오네.
두어라, 내 집부터 하랴. 남이 하니 더욱 좋다.
[하(夏)]
여름날 더운 때에 단 땅이 불이로다.
밭고랑 매자 하니 땀 흘러 땅에 듣네.
어사와 입립신고(粒粒辛苦) 어느 분이 아실꼬.
*입립신고: 곡식 알맹이 하나하나에 맺힌 고생과 괴로움
[추(秋)]
가을에 곡식 보니 좋기도 좋구나.
내 힘으로 이룬 것이 먹어도 맛있구나.
이 밖에 천사만종(千駟萬鐘)을 부러워 무엇하리요.
*천사만종: 부귀영화
[동(冬)]
밤에는 삿자리 꼬고 낮에는 띠풀 베어
초가집 잡아매고 농기구 좀 손질하여라.
내년에 봄 온다 하거든 곧 종사(從事)하리라.
*종사: 농사일을 시작하다
제1곡은 ‘속세를 떠난 사대부의 풍년 기원’이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던 존재는 벼슬길과 거리가 멀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을 ‘버려진 몸’으로 처신하며 우국성심(憂國誠心)으로 풍년을 기원했다.
제2곡부터 계절에 따라 농민들이 해야 할 일이다. 봄에는 ‘상부상조’하는 노동을 권하고 여름에는 ‘땀 흘리는 고통’과 함께 ‘곡식 알맹이마다 맺힌 고생과 괴로움’을 노래한다. 비록 손수 하는 일은 아니지만, 화자는 볕에 달아오른 땅과 비 오듯 듣는 땀, 그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겪은 듯하다.
가을에는 ‘내 힘으로 이룬 것’을 먹는 기쁨과 함께 ‘천사만종’을 누리는 사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세속에서 달관한 화자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겨울에는 이듬해 농사 준비를 하는 겨우살이를 노래하고 있다.
[신(晨)]
새벽이 밝아오자 백설(百舌)이 소리한다.
일어나라 아이들아 밭 보러 가자꾸나.
밤사이 이슬 기운에 얼마나 길었는가 하노라.
*백설: 온갖 새
[오(午)]
보리밥 지어 담고 명아주 국 끓여
배곯는 농부들을 제 때에 먹이어라.
아이야 한 그릇 올려라. 친히 맛보고 보내리라.
[석(夕)]
서산에 해지고 풀 끝에 이슬 난다.
호미를 둘러메고 달 등지고 집에 가자꾸나.
이 중에 즐거운 뜻을 일러 무엇하리요.
나머지 곡에서는 하루를 셋으로 나누어 일하는 즐거움을 소담스레 노래한다. 화자는 ‘새벽’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밭에 나가보자고 권한다. 화자는 청유형 어미를 사용하여 농부들과 함께하는 동류의식을 은근히 드러냈다.
또 ‘낮’에는 들에 나갈 점심밥을 미리 맛보고 보내자고 하면서 ‘농부들과 어울리는 일상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그 점심밥은 보리밥과 명아주 국이다. 명아주는 경상도 말로 ‘도토라지’니 원문의 ‘도트랏’은 이를 말한 듯하다.
마지막 저녁 풍경은 가히 한 편의 영상이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즐거움’은 ‘호미를 둘러메고 달을 등지고’ 귀가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정겨운 실루엣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녕 그것이 그럴진대, ‘즐거운 뜻’을 더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 즐거움을 아는 이 없다
존재의 <전가팔곡>이 노래하는 것은 결국 ‘초야에서의 노동의 즐거움’이다. 마치 시경의 ‘빈풍(羚風) 칠월장(七月章)’을 축소해 놓은 듯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 시는 한자투성이인 기왕의 시조와는 달리 순수한 우리말로 적은 것도 남다르다. 전편에 한자어는 ‘우국성심’과 ‘천사만종’, ‘입립신고’ 정도가 고작인 것이다.
민중들의 노래인 판소리가 양반의 기호를 좇아 한문 투의 언어를 지향한 것과는 달리 존재의 시조가 순우리말을 즐겨 쓴 것은 그가 밝힌 것처럼 ‘곁에 있는 아이들로 하여금 익혀 노래하게 하고 수시로 들으며 스스로 즐기려’ 하기 때문이었을까.
<존재집>에 수록되지 않은 채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이 노래가 빛은 본 것은 1960년이다. 어쨌든 17세기 중반을 산, 이 성리학자가 부른 노래의 의미는 만만찮다. 반상이 유별하고, 양반이 땀 흘려 일하지 않는 법도는 여전하지만, 농민들의 삶과 노동을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은 그 전 시대의 것과는 이미 달라졌다. 고단한 역사 가운데서도 이 땅과 사람들은 근대의 맹아(萌芽)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택에서 바라보이는 동쪽 산 중턱에 우헌정(于軒亭)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우헌정은 존재의 8대손, 이수악(李壽岳, 1845~1927)이 세운 정자로 1800년대 말에 건립되었다. 그는 1896년 1월에 영해에서 유림을 중심으로 창의한 이수악 의진(義陣)의 중심인물이었다.
종택을 사이에 두고 우헌정의 반대편 찻길 옆에는 명서암(冥捿庵)이 북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명서암은 존재가 중년에 이곳을 거처로 삼고 바위를 의지하여 세운 서재다. 명서암은 홍수로 유실되었으니 지금의 건물은 영조 때 후손인 주원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강학소다.
7월 초순에 시작한 보수공사는 아직도 종택에 머물러 있는가. 명서암 주변은 잡풀로 자욱하다. 무너진 담 귀퉁이를 환삼덩굴이 휘감고 있고, 명서암 앞 연못은 우거진 잡풀로 어둡다. 도로변에 우뚝 선 290년짜리 은행나무 보호수도 쓸쓸하긴 매일반이다. 은행나무 좌우에 서 있는 트랙터 두 대는 이 오래된 마을에 당도한 21세기의 증거 같아 보인다.
오후 4시의 햇살은 눅눅했다. 다음 일정에 쫓겨 서둘러 차를 돌리며 돌아본 마을과 마을에 깊숙이 들어온 들은 적막했다. 존재가 노래했던 것처럼 볕에 단 땅은 뜨거울 테지만 땀 흘려 밭고랑을 매는 이는 없다. 없는 것이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가을이면 지금 익어가는 있는 논밭을 거두겠지만, ‘내 힘으로 이룬 것’이라 기뻐하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천사만종(부귀영화)’을 ‘부러워하지 않는 이’도 없을 테고, 호미를 둘러메고 달을 등지고 귀가하는 농부도, 그 황혼의 실루엣도 없다. ‘이 중에 즐거운 뜻’을 아는 이는 물론 더더욱 없을 터이다.
2009. 8. 10. 낮달
[안동 시가 기행 ①] 송암 권호문의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안동 시가 기행 ②]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 「농암가(聾巖歌)」
[안동 시가 기행 ③] 퇴계 이황과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안동 시가 기행 ④] 역동 우탁의 「탄로가(歎老歌)」
[안동 시가 기행 ⑤] 청음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안동 시가 기행 ⑦] 갈봉 김득연의 「산중잡곡(山中雜曲)」
[안동 시가 기행 ⑧] 안축의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
[안동 시가 기행 ⑨] 내방가사 「덴동 어미 화전가(花煎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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