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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2019/0237

노래여, 그 쓸쓸한 세월의 초상이여 유년 시절에 만난 대중가요, 그리고 세월 초등학교 6년을 유년기(幼年期)로 본다면, 나는 가끔 내 유년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의 시기가 아니었나 하고 의심하곤 한다. 무슨 턱도 없는 망발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소리’를 ‘음성’이 아니라 일정한 가락을 갖춘 ‘음향’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매미 소리와 택택이 방앗간 소음의 유년 앞뒤도 헛갈리는 기억의 오래된 켜를 헤집고 들어가면 만나는 최초의 소리는 매미 소리다. 초등시절, 여름 한낮의 무료를 견딜 수 없어 나는 땡볕 속을 느릿느릿 걸어 집 근처의 학교 운동장을 찾곤 했다. 지금도 혼자서 외로이 교문을 들어서는 내 모습이 무성영화의 화면처럼 떠오른다. 거기, 오래된 단층 슬라브 교사, 운동장 곳곳에 자라고 있는 잡초들, 그리고 탱자나.. 2019. 2. 21.
나의 전교조 25년, 그 옹이와 매듭 25년 만에 사학 재단의 사과를 받다 지난 15일, 스승의 날 저녁에 나는 친구인 장(張) 선생과 함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갔다. 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가 우릴 초대했던 것이다. 우리는 물론 그를 모른다. 친구는 그래도 한때 거기 신자였지만 나는 가톨릭과는 아무 인연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거기 간 것은 오래전의 어떤 ‘인연’ 때문이었다. 25년 전 - 아, 그새 그렇게 세월이 흘러 버렸다. 1989년 8월 23일에 나는 친구와 함께 그 수도원 산하의 학교 법인에서 해임되었다. 그해 5월 28일, 온 세상을 달구며 돛을 올린 ‘교원노조’ 때문이었다. 전국에서 교원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초중등, 공사립 교사들은 무려 1천6백여 명이었다. 1989년 우리를 해임한 재단의 초대를 .. 2019. 2. 21.
‘경축 현수막 사회’를 생각한다 ‘개인 출세의 여정’을 단위사회가 추인하고 격려하는 오래된 관행 인터넷에 강원도 교육청이 학교와 학원에 홍보성 현수막 설치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는 소식이 떠 있다. 학교 위계 서열화와 지나친 경쟁을 조장한다는 이유다. 상급학교 진학, 출세한 동문 등을 알리는 일도 마찬가지. 이는 공해에 가깝고 예산 낭비라는 이유도 덧붙었다. 곳곳에 현수막이 차고 넘친다. 참, 이 땅은 ‘현수막 국가’라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경축 머리말을 단 현수막은 종류도 여러 가지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역시 학교나 학원에서 내건 명문 학교 입학을 축하하는 것이다. 비슷한 종류로 행정고시나 사법시험, 기술사 시험 합격 현수막이 있고 박사 학위 취득이나 장군 진급 축하 현수막도 있다. 현수막 사회, ‘부친 이름’을 두드러.. 2019. 2. 20.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체벌의 진실’ 가르쳐 준 ‘열등반’ 50명 아직 정년은 한참 남았다. 그러나 조만간 교직을 떠나는 게 옳다는 생각을 굳히면서 서른 해 가까이 머문 ‘교사의 자리’를 무심히 돌아볼 때가 더러 있다. 떠난다 해도 퇴임식도 퇴임사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자신에게 건네는 ‘퇴임의 변’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그게 내 존재와 삶의 확인일 터이므로. 아이들, 사랑, 삶, 인간, 성장, 존엄성 따위의 단어로 조합된 몇 개의 글귀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젓는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참회록이 아닌가 싶어서다. 시인 윤동주는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의 삶에도 참회록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교단에서의 내 삶에는 그보다 더 길고 무거운 참회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교직에 오래 있을수록 죄가 많다’던 .. 2019. 2. 20.
미나리, 미나리강회, 그리고 봄 풍성한 봄의 향기, 미니리강회가 밥상에 올랐다 공연히 어느 날, 아내에게 그랬다. 요새 시장에 미나리가 나오나? 그럼, 요즘 철이지, 아마? 왜 먹고 싶어요? 그러고는 나는 미나리는 잊어버렸다. 그런데 어제 아침 밥상에 미나리강회가 올랐다. 서둘러 교회에 가야 하는 일요일 아침이라 좀 약식이긴 했다. 그러나 입안에서 퍼지는 그 향은 예전 그대로다. 아침상에 오른 미나리강회 인터넷에서 미나리를 검색했더니 한 지방 신문의 미나리 수확 기사가 뜬다.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이란다. 미나리꽝에서 농민들이 얼음을 깨고 미나리를 수확하고 있는데 정작 그게 미나리꽝인지 어떤지는 금방 짚이지 않는다. 얼음에 덮인 논에 비치는 것은 웬 붉은 빛이 도는 나뭇잎 같은 것일 뿐이다. ‘미나리를 심는 논’을 ‘미나리꽝’이라고 한다.. 2019. 2. 19.
첫 수확과 호미, 이 땅 어머니들의 ‘노동’을 생각한다 [ 텃밭일기 2018] ② 첫 수확과 호미, 이 땅 어머니들의 ‘노동’을 생각한다 지난해 6월에 쓴 텃밭 일기다. 오늘 인터넷에서 기사를 읽고 ‘호미’에 관해 쓴 이 글이 생각났다. 기사는 영주의 대장간에서 전통 방식으로 농기구를 만들고 있는 경상북도 최고 장인의 호미가 아마존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전한다. 미국 온라인 쇼핑 사이트 아마존에서 한국산 농기구 ‘영주대장간 호미(Yongju Daejanggan ho-mi)’가 크게 이른바 ‘대박’을 냈다는 것. 국내에서 4000원가량인 이 호미는 아마존에서 14.95~25달러(1만6000원~2만8000원)로 국내보다 훨씬 비싸게 팔리지만, ‘가드닝(gardening·원예)’ 부문 톱10에 오르며 2000개 이상 팔렸다고 한다. ㄱ자로 꺾어진 ‘호미’는 .. 2019. 2. 17.
책 읽기, 그 도로(徒勞)의 여정 책 읽기의 압박, 그리고 결기를 버리고 나니 … 책 읽기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된 지 몇 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날, 내가 내 안에 더는 어떤 열정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조직 활동에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때, 내 삶을 마치 말라 바스러진 나뭇잎 같은 것으로 느끼기도 했다. 그건 슬픔도 회한도 아니었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오랜 절망적 성찰 끝에 스스로 깨친 자기응시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 무렵에 쓴 어떤 편지에서 나는 그렇게 썼다. ……시나브로 나는 자신을 타자로 바라보는 게 어렵지 않을 만큼만 노회해졌습니다. 자신의 행위나 사고를 아무 통증 없이(!) 여러 갈래로 찢고 자를 수 있으며, 그 시작과 끝을 희미한 미소로, 어떠한 마음의 동요도 없이 바라볼 수도.. 2019. 2. 17.
‘돛과닻’, 혹은 ‘낮달’을 위한 변명 인터넷 아이디(ID) ‘돛과닻’에서 ‘낮달’까지 아이디로 쓰고 있는 ‘낮달’에 대한 변명이다. 2007년에 블로그에서 처음 쓴 이름이 ‘돛과닻’이었다. 그보다 앞서 ‘다음’과 ‘천리안’에 잠깐 머물 때에는 ‘낮달’을 썼다. 오블에 정착하면서 쓴 ‘돛과닻’을 2년쯤 쓰다가 다시 ‘낮달’로 돌아간 얘기가 ‘변명 하나’다. 변명 둘은 그보다 2년 전인, 오블 초기에 쓴 ‘돛과닻을 위한 변명이다. 호적에 기록된 제 이름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웹에서 쓰는 아이디는 저마다 이런저런 뜻을 붙여서 나름의 개성적인 이름을 쓴다. 10년도 전의 일이라, 그걸 시시콜콜 설명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시 읽어보아도 무어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도, 그걸 굳이 해명해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 2019. 2. 17.
누룽지는 ‘눋고’, 강물과 재산은 ‘붇는다’ [가겨찻집] 다른 ‘ㄷ불규칙용언’ ‘듣다’와 ‘싣다’와 같은 방식으로 쓰라 얼마 전 어느 매체에서 기사 제목을 “하루 더 늘은 2차 북미정상회담…”이라 쓴 걸 보았다. 김정은· 트럼프 간 2차 북미정상회담 일정이 하루 더 ‘는’ 것을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이 동사의 기본형은 ‘늘다’니 그 관형사형은 ‘늘 + ㄴ→ 는’으로 써야 한다. ‘늘은’이 아니라 ‘는’이다 ‘늘다’뿐 아니라, 어간의 끝소리가 ‘ㄹ’로 끝나는 모든(!) 동사·형용사는 같은 형식으로 써야 맞다. 이런 용언은 ‘ㄴ’으로 시작하는 어미(-ㄴ/-은/-는) 앞에서 반드시 ‘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예외는 없다. 그래서 이러한 활용을 ‘규칙활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위와 같은 실수를 한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 2019. 2. 17.
가지치기, 혹은 거름과 물 주기 졸업식, 아이들을 보내며 학년 말이다. 한 해 농사를 다 지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 농사는 사람 농산데, 요즘 이 농사꾼은 고단하다. 이 작물은 제멋대로 자라는 성질이 있어서 농사꾼은 제풀에 지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을 기르는 이 농사꾼 중에 으뜸은(말하자면 ‘꽃’은) ‘담임’이다. ‘생살여탈권’에 준하는 권한을 무제한 행사했던 옛날과는 다르지만,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 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내밀한 교감 같은 것도 가능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3년을 내리 쉬고 지난해 3월, 스스로 원해서 3학년 담임을 맡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비담임으로 지내면 ‘몸의 평화’와 ‘정신의 이완’을 맞바꾸어야 한다. 조·종례에서 해방되고 반쯤은 ‘강시처럼’ 살아도 된다. 종이 울리면 무조건 반사로 교실.. 2019. 2. 16.
이효리와 ‘궁둥이 의자’, 혹은 ‘작업 방석’ 농민들의 ‘작업 방석’ 이야기 주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인터넷에 접속했더니 우연히 이효리 관련 연예 기사가 눈에 띄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가수 이효리가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에 나온 ‘엉덩이 의자’ 이야기다. 이효리야 따로 궁금할 게 없는데 기사에 나오는 ‘엉덩이 의자’가 궁금했다. 웬 엉덩이 의자? 그건 또 뭐지? 시골 필수 핫 아이템, 마술 의자, ‘엉덩이 의자’ 기사를 읽기 전에 이효리가 궁둥이에 붙이고 있는 동그란 의자를 보자마자 나는 그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를 단박에 알아챘다. 기사인즉슨 그랬다. 이효리가 콩 수확하는 모습을 공개하면서 ‘시골 필수 핫 아이템’이라는 ‘저 밴드 사이로 다리를 끼우고 궁둥이에 붙이고 다니며 앉고 싶을 때 언제 어디서나 앉을 수 있는 마술 의자’를 소개하고 있.. 2019. 2. 16.
‘퉁퉁 불은 국수’와 ‘몸 달은 KBS’ ‘퉁퉁 불은’은 맞고 ‘달은’은 틀리다 얼마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퉁퉁 불은 국수’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대통령이 지난 2월 23일 국회의 ‘부동산 3법 처리 지연’을 두고 ‘퉁퉁 불어터진 국수’라고 비유하면서다. 이를 두고 이런저런 반박도 적지 않았지만, 그 비유의 적절성이 아니라 맞춤법을 한번 따져 보자. 은 올바른 표현 어간이 ‘ㄹ’로 끝나는 동사 가운데 ‘물들다’나 ‘울다(발라 놓거나 바느질한 것 따위가 반반하지 못하고 우글쭈글해지다.)’를 ‘물들은’, ‘울은’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이들 용언은 ‘ㄴ’음 앞에서 ‘ㄹ탈락’이 저절로 일어나는 규칙 동사이므로 ‘물든’, ‘운’으로 쓰는 게 옳다. [ 참조] 그러나 ‘불은’의 기본형은 ‘물에 젖어서 부피가 커지다’는 뜻의 동사 ‘붇다’다. .. 2019.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