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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노래여, 그 쓸쓸한 세월의 초상이여

by 낮달2018 2019.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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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시절에 만난 대중가요, 그리고 세월

▲ 영화 〈섬마을 선생〉(김기덕, 1967)

 

초등학교 6년을 유년기(幼年期)로 본다면, 나는 가끔 내 유년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의 시기가 아니었나 하고 의심하곤 한다. 무슨 턱도 없는 망발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소리음성이 아니라 일정한 가락을 갖춘 음향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매미 소리와 택택이 방앗간 소음의 유년

 

앞뒤도 헛갈리는 기억의 오래된 켜를 헤집고 들어가면 만나는 최초의 소리는 매미 소리다. 초등시절, 여름 한낮의 무료를 견딜 수 없어 나는 땡볕 속을 느릿느릿 걸어 집 근처의 학교 운동장을 찾곤 했다. 지금도 혼자서 외로이 교문을 들어서는 내 모습이 무성영화의 화면처럼 떠오른다.

 

거기, 오래된 단층 슬라브 교사, 운동장 곳곳에 자라고 있는 잡초들, 그리고 탱자나무 울타리 앞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키 작은 나무들이 쏟아지는 햇살 속에 마치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풍경에서 내가 터득한 것은 소란적막의 간격이다. 나무에 다닥다닥 붙은 매미들이 입 모아 울어댈 때 교정을 가득 채우는 소란과 문득, 약속이나 한 듯 멈춰지는 울음소리가 연출하는 정적 사이의 거리는 다만 일순(一瞬)이었다.

 

그리고 내 일상은 부모님이 운영하던 방앗간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동기로 동력을 얻었던 방앗간은 택택이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규칙적인 소음을 내면서 밤낮으로 돌아갔다. 그 소음이 내가 기억하는 유년의 음향이었다.

 

▲ 가수 이미자(1941~ )

음악 시간에 풍금 반주로 배우던 동요를 빼면 내 생활은 초등 고학년 때부터 읽기 시작한 신구문화사 판 한국문학전집안의 텍스트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연초에 급조된 농악대가 지신을 밟으며 동네를 돌아 우리 집 마당에서 풍악을 잡혀도 그것을 소음으로만 여겼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타관에서 흘러들어온 내 맏형 또래의 청년이 시작한 유선방송이 집마다 들어왔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 일상과는 너무나 먼 외계와 만나게 되었다. 집집이 스피커라는 이름의 네모난 나무상자를 설치하고 공중파 방송을 중계해 주는 대가로 그는 매년 아마 보리 한 말쯤의 수곡(收穀)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앰푸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군부대에서 흔히 삐삐선이라 부르는 가느다란 깜장 전선으로 온 마을을 얼기설기 엮은 그 마법의 상자에서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에 나는 이내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KBS ‘라디오 극장의 드라마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이 드라마가 이미자가 부른 주제가를 히트시켰고, 나중에 오영일과 문희가 주연하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물론 훨씬 뒷날의 일이다.

 

유선방송으로 들은 라디오 연속극 ‘섬마을 선생님’

 

이 연속 방송극의 내용은 제목대로다. 섬마을에 부임한 총각 교사와 섬 처녀의 사랑 이야기였는데 남녀 주인공은 각각 성우 이창환과 고은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고은정의 목소리에 실린 한 처녀의 애절한 사랑을 내가 이해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어떤 금단의 세계를 엿보고 있다는 흥분감에 빠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삐삐 선으로 중계되는 그 시절 유선방송의 음질이 오죽했겠는가. 그것은 때로 거칠고 지속적인 잡음 때문에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그 부실한 소리통(스피커)을 끌어안고 다락방에 처박혀 간신히 한 회분의 드라마를 청취하곤 했는데, 식구들이 나를 찾느라 부산을 떨어도 나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거기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60년대 트랜지스터라디오. LG의 전신인 금성사에스 만들었다. ⓒ 디자인디비

 우리 집에 라디오가 들어온 것은 초등 6학년 때였다. 그때 신혼이었던 맏형님이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장만한 것이었다. 금성사에서 만든 라디오는 윗부분이 당시 유행한 호마이카 처리를 해 반들반들했고, 레이스가 달린 비로드 덮개까지 딸려 있어서 마치 우리가 범접하지 못할 중산층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나는 라디오를 따로 즐기지 못했다. 형수가 항상 깨끗이 정돈해 둔 형님의 방에 들어가기가 껄끄러웠던 탓이었다.

 

드라마 <섬마을 선생님>을 들으며 나는 겨우 난생처음으로 유행가를 익혔다. 그 유선방송 스피커는 말하자면 내가 당대의 대중문화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셈이다. 그 이후로 따로 스피커를 통해 방송을 들은 기억이 없으니 나는 아마 다른 데 정신을 팔았던 모양이다. 막내여서 부모님은 이미 쉰을 넘긴 데다 구식 노인들이라 나는 당신들께서 유행가를 부르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은 물론 없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때라, 내가 그 시기의 대중문화를 비슷하게라도 겪을 수 있었던 것은 형 덕분이었다. 대구의 먼 친척에게 양자(養子)로 입양된 손위 형은 방학이 되면 도회의 생기를 가득 담고 생가로 돌아오곤 했다.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연필깎이나, 갖가지 학용품에서 유추되는 도회의 이미지 앞에 나는 늘 주눅이 들곤 했다.

 

6학년 가을, 운동회의 마지막 연습이 끝난 어느 오후였다. 어떤 선생님께서 6학년 여자반의 아이 하나를 조회대 앞으로 불렀다. 예쁘장한 데다가 공부도 썩 잘해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아이였다. 선생님들의 주문은 이 여자아이에게 노래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뜻밖에 전개된 상황 앞에서 얼떨떨해져 있었다. 그러나 주문을 받고 조회대에 오른 그 아이는 전혀 주저함 없이 마이크를 잡아당겨 애절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또래의 여자아이 입에서 유명 가수의 노래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애타도록 보고파도 찾을 길 없네./ 오늘도 그려보는 그리운 얼굴 / 그리움만 쌓이는데". 나는 거의 넋을 잃고 아이의 간드러진 노랫소리에 푹 빠져 있었다.

 

대중가요와 통기타, 휴대용 전축의 사춘기

 

그리고 그 노래는 열세 살짜리 소년의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그 노래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마음 깊은 켜 속에서 새록새록 숨 쉬고 있다. 1960년대의 무심한 표정과 빛깔을 하고. 가끔 노래방에 들러 놀 때면, 나는 노래목록 책을 여러 번 뒤적여 예의 노래를 찾아내 세 자리에 불과한 그 번호를 모니터에 입력하곤 한다.

 

▲ 요절한 가수 김정호(1951~1985)

대도시의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나는 여느 아이들과 같은 길목을 거쳐 사춘기로 진입했다. 그 무렵, 거리 곳곳의 소리사(당시 음향기기 판매점의 이름은 모두 이런 형식이었다)에서 밤낮없이 틀어대는 대중가요에 나는 곧 익숙해졌고 엔간한 히트곡들도 죄다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고향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게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리고 부친께선 20인치 TV를 사랑방에 들여놓았다. 대도시 만화방에선 얼마쯤의 시청료를 내고 장욱제와 태현실이 주연한 연속극 <여로>를 보았다. 그러나 우리 집에선 온 동네 사람들이 평상 가득 둘러앉아 방 밖으로 돌려놓은 텔레비전을 공동으로 시청했다.

 

고등학교시절, 일찌감치 대중음악에 눈을 뜬 도시의 동급생들은 주말이면 기타를 둘러메고 유원지를 쏘다녔다. 그리곤 혀 짧은 발음으로 팝송을 소화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여유를 나는 부러했지만, 그게 내게 너무 먼 사치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주말의 역전이나 버스 정류장에는 나팔바지 차림에 야전(포터블 전축을 야외전축이라 했는데 이를 줄여서 야전이라고 했다.)을 자랑스럽게 들고 선 한 무리의 남녀 고교생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듀엣 어니언스의 편지와 송창식의 고래사냥’, 김정호의 날이 갈수록따위의 노래가 우리가 즐겨 부른 노래들이었다.

 

▲ '야전'이라 불리던 1970년대의 휴대용(포터블) 전축.ⓒ 나무위키

 나는 최인호의 연재소설을 읽기 위해 자췻집에서 특정 일간지를 구독했고,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 <별들의 고향>을 친구들과 늠름하게 관람했다. 시대는 시청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텍스트에 머물러 있었다. 이른바 70년대 작가들이라 불렸던 조해일, 조선작, 황석영 등 작가들의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대중문화와 결별, 그리고 20년

 

▲ 영화 〈별들의 고향〉(1974, 이장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태 만에 나는 징집되었다. 그리고 33개월, 만기전역 때까지 대중문화와는 아주 무관하게 살았다. 병영에도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나는 왠지 거기에 이미 흥미를 잃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복무 중에 익힌 노래는 몇 곡이나 될까. 대구 남산동 어느 카바레 가수였다는 신병교육대 동기가 부른 ’, 이수영이 부른 하얀 면사포만이 기억에 떠오른다.

 

제대 후, 복학하고 나서도 나는 유행가와는 무관한 시간을 살았다. 복학생들 혹은 소설 공부를 하던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우리는 주로 술을 마시는 걸 낙으로 삼았다. 선술집에서 소주를 마시다 거나해지면 우리는 마치 한량처럼 젓가락 장단에 맞춰 쌍팔년도의 유행가를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졸업하면서 바로 여학교에 임용되었는데, 열일곱 살짜리 여고생들을 맡았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배운 노래가 그해 최고의 히트곡이었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대중문화와 무심히 결별했다. 이미 나는 더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최초로 섬마을 선생님을 익히던 초등학교 고학년은 이제 머리가 빠진 반백의 초로가 되었다. 몇 곡의 노래로 환기되는 우리의 삶은 참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대중가요는 우리네 남루한 삶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지만 몇 곡의 노래로 담아내는 시대의 초상 속에 삶의 곡진한 사연을 어찌 말로 다 헤아리겠는가.

 

 

2009. 1.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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