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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동네 한 바퀴 ② 살구와 명자 지고 사과꽃 피다

by 낮달2018 2020.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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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도 중순, 사과꽃 피다

▲ 골목길 양옥집 담안에 핀 사과꽃 . 그 검박함이 처연한 품위를 드러내 준다 .

동네에 핀 꽃을 둘러보면서 쓴 첫 번째 글에서 ‘우리 동네 꽃 지도’ 어쩌고 하면서 건방을 떨었다. 그게 ‘건방’이란 걸 알게 된 것 이즘 들어서다. 늘 다니던 길 대신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새로운 꽃나무를 여럿 만났기 때문이다. 고작 그 정도를 둘러보고 ‘지도’를 들먹였으니 건방도 그런 건방이 없다. [관련 글 : 동네 한 바퀴-매화 지고 앵두, 살구꽃까지]

 

늘 주변을 살피며 다닌다고는 하지만 우리 눈이란 그리 믿을 바가 못 된다. 겨우내 헐벗은 나무를 보면서 그게 피워낼 꽃을 알아보는 데에는 내공이 필요하다. 새 숲길로 다니던 나는 겨우내 이쪽 길은 아무래도 생강나무가 전의 길만 못한 것 같다고 여겼다.

▲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발견한 명자꽃. 그것은 ' 꽃의 잠복 ' 이라고 해도 좋다 .

우리가 참꽃이라고 불렀던 진달래도 어쩌다 눈에 띌 뿐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게 북봉산 본 줄기가 아닌 갈래기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다. 산이 낮아지니 나무의 분포도 달라지는 거라고 지레 생각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봄이 와 꽃이 피면서 나는 내가 청맹과니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봄바람이 돌고 물이 오르며 겨우내 헐벗었던 나무들은 마침내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달래와 생강나무꽃, 산벚꽃 등은 마치 잠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시에 모습을 드러내듯 산등성이를 점령해 버렸다.

 

꽃의 잠복

 

갈래라서 꽃이나 나무의 분포가 본 줄기만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청맹과니의 눈에 그게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생강나무도 적지 않았고, 산벚나무는 오히려 많았다. 진달래도 산길 주변의 등성이를 불태우듯 타올랐다.

 

새 길에서 만난 꽃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한 블록 차이인 골목마다 뜻밖의 꽃들이 피어나 외진 길을 밝히고 있었다. 그 골목길에서 나는 백매화 겹꽃을 만났고, 또 다른 명자꽃을, 그리고 사과꽃을 만났다. 산의 진달래처럼 명자꽃도 무심코 스쳐 지났던 나무에서 피어나 있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것들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게 맞다.

▲ 사과꽃은 어릴 적의 추억을 환기해 주면서 과부족이 없는 그윽한 품위가 있다 .

새로 다니는 골목 끝에 있는 마당 넓고 큼지막한 양옥집 담 안에 핀 사과꽃을 나는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 살구꽃과도 배꽃과도 닮았는데 그게 딱히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모야모’는 그걸 사과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사과꽃!

 

직전에 다니던 길에는 꽃사과가 몇 그루 있었다. 꽃사과는 열매가 아름답다. 벙글기 직전의 꽃송이도 괜찮았다. 그러나 정작 피고 난 뒤의 꽃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꽃잎이 큰 데다가 어쩐지 싱싱하다는 느낌보다 시들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 꽃사과는 봉오리가 벙글 때는 화사하더니 정작 핀 꽃은 봉오리만 못하고 어쩐지 피자마자 시든 느낌이 있다 .

사과꽃과 아그배 꽃, 봄날은 간다

 

그러나 사과꽃은 꽃사과가 주던 우중충한 느낌을 일거에 가시게 하는 검박하면서 처연한 품위가 있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사과를 ‘능금’이라 불렀지만, 사과는 능금과 다르다. 사과는 한자로 ‘沙果’라 쓰는데 ‘모래[사(沙)]밭처럼 물이 쉽게 빠지는 땅에서 잘 자라는 과일[과(果)]’이라는 뜻이다.

 

어릴 적 내 고향 윗마을에는 낙동강 강가의 모래땅에 사과밭이 이어졌다. 그 마을 아이들은 여름이 지나면서부터 풋사과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우리는 그걸 맛보기 쉽지 않았다. 부모님을 조르면 한 됫박의 보리로 얼마간 풋과일을 바꿔먹는 것 외에는.

▲ 아파트 화단의 아그배나무 . 꽃봉오리가 벙글기 시작하더니 이내 핀 꽃은 정갈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다 .

내가 사는 아파트 앞 화단에는 아그배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봄볕이 나면서 잎에 윤기가 돌더니 어느 날부터 화사한 붉은빛 꽃송이가 벙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일주일 전부터 마침내 하얗고 작은 꽃잎이 열렸다. 꽃잎은 작지만 노란 꽃술은 선명하고 깔끔하다.

 

살구꽃도 복사꽃도 졌다. 명자꽃도 바야흐로 시들어 가고 있다. 집을 나설 때마다 나는 아파트 화단 아그배나무 그늘에서 아그배 꽃의 안부를 눈여겨 묻곤 한다. 사과꽃이 핀 골목길 어귀를 지나면서 공연히 보이지도 않으면서 목을 빼 보기도 한다.

 

머지않아 아그배 꽃도, 사과꽃도 질 것이고 곧 아까시 꽃, 찔레꽃, 장미가 필 것이다. 이상기온을 부르대어도 이처럼 꽃의 오고 감은 깔축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구러 2018년 4월도 중순, 봄날은 시나브로 가고 있다.

 

 

2018. 4.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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