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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종점의 할미꽃

by 낮달2018 2020.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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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버스 종점에 핀 할미꽃

▲  동네 버스 종점 앞 음식점 뜰에 핀 할미꽃이 피었다 .

집에서 한 백여 미터를 걸어 나가면 버스 정류장이 있다. 시내 여러 방면에서 오는 버스의 종착지니 이른바 종점(終點)이다. 정류장은 지금은 문을 닫은 음식점의 뜰 앞이다. 며칠 전, 버스를 기다리다가 그 뜰의 수양버들 아래 피어 있는 할미꽃을 만났다.

 

버스 종점에 핀 할미꽃

 

올봄, 거의 하루걸러 북봉산을 오르면서도 만나지 못한 할미꽃이다. 진달래는 지천으로 피어나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지만 정작 할미꽃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할미꽃을 동네에서 만나다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거기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할미꽃이 언제부터 귀한 꽃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릴 적에 할미꽃은 진달래처럼 지천이었다. 양지바른 무덤들 주위에 다소곳이 피어나던 그 꽃! 중학교 졸업반 때 돌아가신 할머니께선 내가 꺾어온 할미꽃으로 늘 ‘족두리’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때, 할머니에게서 족두리 만드는 법을 배워둘걸, 하고 뉘우치게 된 건 성년이 되어서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는 산에 올라도 할미꽃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할미꽃의 꽃자루를 떼어 버리고 노란 꽃술을 위로 하고 자줏빛 꽃잎을 밑으로 말아 돌려서 조그마한 가시 같은 것으로 고정하면 화려하고 예쁜 족두리가 된다고 한다. [관련 글 : 진달래와 나무꾼, 그리고 세월……

 

뒷동산의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젊어서도 할미꽃
싹 날 때에 늙었나 호호백발 할미꽃
천만 가지 꽃 중에 무슨 꽃이 못 되어
가시 돋고 등 굽은 할미꽃이 되었나
아하하하 우습다 꼬부라진 할미꽃

 

심훈이 1935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직녀성>에 나오는 동요다. 할미꽃을 꺾으며 놀던 아이들이 불렀다는 노래지만 내겐 낯설다. 우리보다 이전 세대의 노래였거나 우리 지역엔 구전되지 않았던 노래였을까.

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빗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이 지면서 백발이 성성한 모양의 열매가 할머니의 흰 머릿결처럼 보이기 때문에 할미꽃이라 불린다. 게다가 늘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등 굽은 할미, ‘노고초(老姑草)’가 된 것이다.

 

자줏빛 댕기 닮은 처연한 아름다움

 

이름은 할미지만 할미꽃은 그 자색이 남다르다. 비록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줏빛 댕기를 닮은 꽃은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다. 노란 꽃술도 강렬하지만, 할미꽃은 늘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그 참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삼국사기> ‘열전’에 전하는 설총(薛聰)의 우언적(寓言的) 설화 ‘화왕계(花王戒)’에서 할미꽃은 ‘백두옹(白頭翁)’이다. 화왕(花王)인 모란이 자신을 찾는 많은 꽃 가운데 아첨하는 장미를 사랑하였다가 할미꽃 백두옹의 충직한 모습에 갈등하다 결국, 간곡한 충언에 감동하여 정직한 도리(道理)를 숭상하게 된다는 내용의 설화다.

 

“이 몸은 서울 밖 한길 옆에 사는 백두옹입니다. 아래로는 창망한 들판을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 경지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옵건대, 좌우에서 보살피는 신하는 고량(膏梁)과 향기로운 차와 술로 수라상을 받들어 임금님의 식성을 흡족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드리고 있사옵니다.

 

또, 고리짝에 저장해 둔 양약으로 임금님의 원기를 돕고, 금석의 극약으로써 임금님의 몸에 있는 독(毒)을 제거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르기를 ‘비록 사마(絲摩)가 있어도 군자 된 자는 관괴라고 해서 버리는 일이 없고, 부족에 대비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도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백두옹이 화왕의 마음가짐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사마’는 명주실과 삼실을 이르니 아름답고 부드러운 것을 뜻하고 ‘관괴’는 띠풀과 왕골로 거친 것을 의미한다. ‘비록~없다’는 최선의 것이 있어도 차선의 것을 버리지 않음을 비유한 말로 유사시에 대비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좋은 것을 갖고 있어도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하찮게 여기고 멀리하려고 해서는 안 됨을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다.

 

화왕을 경계하는 백두옹

 

그러나 장미와 자신을 두고 화왕이 갈등하는 것을 본 백두옹은 임금의 어리석음에 정문일침(頂門一鍼)을 가하고 마침내 화왕은 자신을 뉘우치게 된다.

 

“제가 온 것은 임금님의 총명이 모든 사리를 잘 판단한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뵈오니 그렇지 않으십니다. 무릇 임금 된 자로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는 드뭅니다. 그래서 맹자는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낭관(廊官)으로 파묻혀 머리가 백발이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하오니 저인들 어찌하겠습니까?”

 

설총이 살았던 신라 시대에도 이 꽃은 할미꽃이었다. 할미꽃이 자색이 남다른 장미와 맞서는 충직한 신하로 그려지는 이유는 ‘할미’의 경륜과 지혜 덕분이다. 그것이 겉만 번지르르할 뿐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로 매겨지는 장미를 제압하는 힘이다.

천년도 훨씬 지난 지금, 사람들은 할미꽃 따위는 잊고 지낸다. 예전에 그리 지천이었던 꽃은 웬일인지 쉽게 만날 수 없는 귀한 꽃이 되었다. 전남 장흥에서 할미꽃 재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잠깐, 이 꽃을 만나는 일은 [관련 기사 :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여전히 어렵다.

 

버스 정류장에 들를 때마다 나는 수양버들 아래 다소곳이 핀 할미꽃을 바라보면서 지난 시절의 추억과 함께 지금 잃어버린 것들,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2017. 4.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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