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백담사, 만해 한용운과 독재자 전두환

by 낮달2018 2020. 4. 15.
728x90

백담사에 남은 독재자의 자취 -  자랑일까, 치욕일까

▲  백담사로 오르는 길섶의 진달래와 생강나무꽃
▲ 백담사의 기원은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아미타 삼존불을 조성 봉안하고 창건한 한계사다.

지난 주말에 설악산을 다녀왔다. 속초 인근의 한 콘도미니엄에서 열린 자형의 칠순 가족 모임에 참석한 친지들과 함께였다. 설악산은 고교 수학여행(1973)으로, 수학여행 인솔(1985·1997)에 이은 네 번째 방문이다. 그전에는 외설악의 관광코스를 돌았지만, 이번에는 내설악의 백담사를 들렀다.

 

백담사(百潭寺)의 기원은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아미타 삼존불을 조성 봉안하고 창건한 한계사(寒溪寺)다. 그 뒤 이 절집은 1752년(영조 51)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다가 1783년에 백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 만해 한용운 (1879~1944) 기념관 안 초상화

전설에 따르면 백담사라는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못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이때까지 7차에 걸친 실화(失火)가 있었으니 유독 이 절집은 화마와 가까웠던 셈이다. 불이 날 때마다 터전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었는데 백담사라는 이름엔 거듭되는 화재를 피해 보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이 분명하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가 수도하면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쓰고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한 곳이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만해의 자취와 함께 백담사를 그리고 있었던 듯하다. 이를테면 나는 눈에 파묻힌 적요한 산사, 수행과 일상의 경계조차 없어진, 형형한 눈빛의 선승을 그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토요일 오전, 백담사 용대리 주차장은 온갖 복색의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일행은 차를 대고, 백담사로 오르는 셔틀버스를 탔다. 고등학생 이하 1,000원, 일반 1,800원. 만만찮은 금액이다. 더구나 그건 편도 요금이니. 버스는 외설악 지역보다 한결 복잡하다는 내설악의 백담계곡을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내다뵈는 백담계곡의 물은 에메랄드빛이었다. 가끔 내려오는 차량과 교행(交行)할 수 있는 좀 넓은 부분을 빼면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좁고 위태로웠다. 반대편 산기슭에는 핏빛으로 핀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절집으로 오르는 그 포장길은 1988년 11월에 여론과 권력을 잃고 독재자 전두환이 백담사로 기어든 뒤에 생겼다.

 

버스는 거대한 일주문 옆을 지나 백담계곡 이편에 멎는다. 수심교(修心僑)라는 튼튼한 돌다리 건너편에 나타나는 백담사의 모습은 여느 절과 다르지 않았다. 이 수심교 다리도 전두환 처사의 입산 이후에 세워졌다. 그전에는 물이 지면 매년 떠내려가기를 반복하던 나무다리였다고 한다. 광주 학살을 딛고 권력을 장악한 이 철권 독재자는 말하자면 이 빈한한 절집에 행운이었을까, 불운이었을까.

▲ 극락보전(중앙)과 화엄실(왼쪽). 화엄실에는 만해가 머물렀고, 나중에 전두환이 머물렀다.

백담사의 전각들은 1915년 마지막 화재 이후에 중창된 것으로 듯 보인다. 주 법당은 대웅전 대신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이다. 법당도 그렇거니와 앞에 양쪽에 세워진 화엄실과 법화실의 규모도 옹색하다. 그러나 옹색한 것보다 더 안쓰러운 것은 화엄실이 은연중에 자랑하고 있는 듯한 역사다.

 

화엄실은 전두환이 1988년 11월부터 2년 동안 기거했던 곳이다. 그 방 한 칸에는 그가 쓰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백담사가 전시하고 있는 전두환의 자취는 자랑일까, 수치스러운 역사의 기록일까. 아마도 백담사는 그걸 은근히 자랑하면서 그의 음덕을 기리고 있는 느낌이다. 백담사 누리집에서는 화엄실을 그렇게 소개한다.

 

“전두환 대통령이 머물다 간 이후 백담사의 통행로이던 작은 오솔길은 차가 드나들도록 콘크리트 포장이 변했고, 개울을 가로지르는 수심교가 지난 89년에 착공해 90년 9월에 완공되었다.”(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지만 그대로 옮겼다.)

 

권력에서 밀려난 독재자 내외가 2년 동안 절치부심한 화엄실(당)은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한 곳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뜻밖의 장소에서 태어난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가 떠난 자리에 일해(日海) 전두환 처사가 들어 백담사의 중흥을 이끈 셈인가.

▲  만해기념관 앞의 만해 시비. 시 '나룻배와 행인'을 새겼다.
▲ 만해 흉상 아래에 새겨진 만해의 어록.
▲ 만해기념관 안에 걸린 만해의 유묵. "진리는 머무름 없이 변한다"는 뜻이다.

절집 오른편에 1995년 완공한 만해기념관이 있다. 뜰에는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을 새긴 시비와 그의 흉상이 섰고, 기념관 안에는 그의 친필 유묵과 저서,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람들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만해가 쉬 떠오를 것 같지는 않다.

 

만해의 본명은 정옥(貞玉)이고, 용운은 법명이다. 만해는 법호(일반인의 호와 비슷한 것)다. 충남 홍성 출신으로 14세 때 혼인한 만해는 16세 때 출가한다. 세상에 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가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오세암에서 선(禪)을 닦다가 세계에 관한 관심으로 러시아와 시베리아, 만주 등을 주유하였다. 스물일곱 살 때 재입산하여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 득도했으니 만해에게 설악산과 백담사는 각별한 인연의 땅인 셈이다.

 

만해는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1910)을 저술하기도 하였지만, 내게는 시인과 독립운동가로 훨씬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만해가 불교계를 대표하여 3·1독립선언에 참여한 때는 마흔한 살 때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에 대해 최남선과 의견이 달랐다. 그는 선언문에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그는 이 만세 사건의 주동자로 3년 동안 복역했다.

 

49세 때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60세 때는 손수 지도해 오던 불교 계통의 민족투쟁 비밀 결사 단체인 만당(卍黨)사건으로 후배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그는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지들이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모셨다.

▲ 서울 망우리 공원묘역에 있는 만해의 유택.

만해의 삶은 이러한 자취보다 신념과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태도에서 전설이 되었다. 일제가 호적 정리를 하려 하자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라고 단호히 입적을 거부하여, 식량 배급은 물론,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가 만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은 정처 없이 떠도는 그를 위해 동지들이 지어 준 집이다. 성북동 산비탈에 있는 이 집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북향이다. 그것은 ‘남향으로 하면 돌집(조선 총독부 건물)을 바라보게 될 터’라며 남향을 거부한 만해의 뜻을 좇은 까닭이다.

 

변절하여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옛 친구들이 찾아오면, “내가 알던 그 친구는 죽은 지 오래다.”라고 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얘기는 이 고집불통의 독립지사의 우직한 인간과 가치관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정인보, 홍명희 등 당대의 인물들이 그의 지기였던 까닭이 따로 있는 것이다.

 

안동 내앞마을 출신의 독립지사 김동삼(金東三) 열사가 서대문 감옥에서 죽어 그 유해를 찾아가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으나, 일제로부터 주목을 꺼려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이때, 심우장으로 열사의 유해를 옮겨, 대성통곡하며 정중히 장례를 치른 이도 만해였다.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이 된 시집 <님의 침묵>이 발간된 것은 만해가 마흔일곱 살 때인 1926년이다. 이 시집에 실린 88편의 주옥편은 만해가 민족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한 것이다.

 

‘임의 침묵’은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사랑의 노래이고,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며 고통과 슬픔 속에서 애타게 임을 기다리는 애절한 희망의 노래이다. “아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에 드러난 위대한 역설은 역사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시인의 문학적 증언처럼 여겨진다.

 

초파일이 가까워서인가, 경내 곳곳에 연등이 걸려 있었다. 극락보전 주변을 빼면 대체로 경내는 좁지 않건만,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곳곳에 걸려 시야를 막는 연등 탓이다. 한 전각 앞에서는 중년의 보살 한 분이 윤오월을 뇌며 호객하듯 시주를 권하고 있었다. 초파일 석가세존이 세상에 온 것과 절집마다 연등을 내걸고 불사 시주를 강권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넘치는 사람 탓인가, 심산유곡의 산사는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들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소란과 경내의 들뜬 분위기 때문에 나는 사진 찍기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절집 안에서 그나마 소슬한 고요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스님들의 수행처였다.

▲ 절집 안에서 그나마 소슬한 고요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스님들의 수행처였다. 만해는 이 도량에 든 퇴물 권력자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달린 사립 앞에서 나는 형형한 눈빛의 만해 선사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도량에 든 퇴물 권력자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절이 쫓기는 중생을 품는 것은 마땅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여론에 몰려 입산했다가 다시 하산한 독재자는 여전히 권력의 악취를 버리지 못하고 있고, 그 권력에 기대어 절집의 중흥을 도모한 이들도 여전하다.

 

백담사를 떠나면서 일제에 협력하던 31 본산의 주지들을 향한 만해의 서슬 푸른 일갈을 떠올리는 까닭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가장 더러운 것을 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똥보다 더러운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죽은 사람의 시체다. 사람들은 똥 앞에서는 밥을 먹지만 죽은 시체 앞에서는 밥을 먹지 못한다. 그러나 가장 더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네놈들이다.”

 

 

2009. 4. 15.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