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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한글 시대’로 가는가

by 낮달2018 2020.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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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기와 국회 배지 속 한자 ‘국(國)’자 사라진다

▲  국회 커뮤니케이션 마크 상하 조합  ⓒ  대한민국 국회 누리집

오는 16일에 본회의에서 개정안이 통과되어야 한다는 절차가 남긴 했다. 그러나 그간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국회기와 국회 배지(Badge) 속 한자 ‘국(國)’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가 열린 이래, 제5대와 8대 국회 때 각각 1년여 한글을 쓴 걸 제외해도 무려 64년 만이다.

‘금배지’에 한자 대신 ‘한글’을 새긴다!

지난 8일, 국회 운영위원회(위원장 최경환)는 노회찬, 박병석 의원과 위원장이 낸 ‘국회기 및 국회 배지 등에 관한 규칙’의 일부개정 규칙안을 심의하여 위원장 안을 위원회 대안으로 채택한 것이다. 일단 상임위를 통과한 안이니만큼 본회의 통과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원에 왼쪽 가슴에 다는, 이른바 ‘금배지’는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배경으로 가운데에 한자로 ‘나라 국(國)’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것이다. (배지는 은 95%에 금을 도금한 것이니 실제로 금배지는 아니다.) 이 ‘國’ 자가 한글로 반듯하게 ‘국회’로 바뀌는 것이다.

이 배지 도안에 쓰인 한자가 줄곧 논란의 불씨가 되었었다. 명색이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의 상징 문양을 ‘국자(國字)’인 한글이 아니라 ‘한자’를 써 온 데 대한 문제제기였다. 특히 도안 속의 한자는 온전히 ‘국‘자로 읽히기보다는 ’혹(或)‘자로 읽힐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  국회 배지 변경 전과 변경 후

그동안 국회 문양은 여러 번 바뀌어 왔다. 제헌 국회 이래 지금까지 총 9차례 문양이 바뀌었는데 지금 쓰고 있는 문양은 1993년부터 써 온 것이다. 한글 문양은 과거 제5대 국회(1960~1961) 때의 참의원과 제8대 국회(1971~1972년) 때의 잠깐이나마 배지 속 글자를 한글 ‘국’으로 사용한 바 있다.

이들 한글 도안이 다시 한자로 돌아온 것은 ‘국’이라는 글자를 거꾸로 보면 ‘논’이 된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자 회귀의 속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언문’을 쓰는 것보다 ‘품위 있는’ 한자를 쓰는 게 훨씬 권위적이라고 믿는 관습과 편견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상임위에 앞서 국회 사무처가 지난 2월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의원 232명 가운데 72.4%(168명)가 한자 대신 한글에 찬성했다. 또 찬성 의원의 75.0%(126명)가 한글 ‘국’ 보다는 ‘국회’라는 문양이 낫다고 답했다.

‘국’ 자만 넣을 것인가, 아니면 ‘국회’를 쓸 것인가, 국회를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논의 끝에 ‘국회’를 가로 쓰기로 넣기로 했다. ‘국’ 자만 쓸 때엔 논란이 재연될 우려도 있고, ‘국회’라는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한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글학회의, ‘한자와는 달리 다음절어인 한글은 두 글자를 다 써야’ 의미가 전달된다는 조언도 참고했다.

쫓겨나던 ‘한글’ 명패, 이제는 대세다

국회는 한 나라의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이다. 국회의원 개개인을 일러 ‘헌법기관’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리고 한글은 세계에 자랑하는 우리의 나라글자다. 이 자랑스러운 국자를 놔두고 국회 상징에다 한자를 써 온 게 60년 세월이다. 하긴 일제가 지어준 ‘국민학교’를 버리는 데 든 세월도 40년을 훌쩍 넘겼다.

▲ 드디어 ‘의장’ 명패도 바뀌었다 .

국회는 대의기관이고 그 대의의 출처는 ‘민’이다. 한글은 그 ‘민’의 글자다. 그런데 실제로는 민의와는 무관하게 운영되는 데가 국회라 하더라도 국회를 상징하는 문양에 반세기가 넘도록 한자를 써 올 수 있는가 말이다.  

누구는 형식의 문제라며 거기 목을 맬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지만, 때론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세계가 그 과학성과 합리성을 인정하는 문자요, 세계기록유산에 당당히 오른 훈민정음을 외면하고 이웃 나라의 문자를 빌려 그 민의의 전당을 표시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온당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글날에 한글 명패를 들고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려는 의원들이 국회 경위들의 제지를 받아야 했던 때도 있었다. 이유는 단지 그것이 ‘관행에 어긋난다’라는 것. 국회의원이 자기 부담으로 명패를 한글로 교체하는데 이를 막을 권한이 누구한테 있느냐며 항변한 이 만화 같은 장면이 벌어진 건 2003년이었다.

한자로 써야 권위가 선다고 믿은 비주체적이고 불합리한 관행 앞에서는 나라글자에 대한 선량들의 선택도 관행과 구습에 밀린 것이다. 그러나 역시 세월이 해결사다. 10년이 지난 지난해, 19대 국회 재적 의원 298명 가운데 현재 한글 명패를 쓰는 의원은 280명이고 한자 명패는 18명에 불과하다. 한자로 돼 있던 국회의장석 명패도 한글로 바뀌었다.

지방 의회도 ‘뒤따라야’

 

▲ 인천시 의회 로고

결국 국회기와 배지의 문양에서 한자를 빼고 한글을 써넣음으로써 한자 시대는 막을 내리는 듯하다. ‘국어’를 “한글과 한자로 표현되는 한국어”로 바꾸고, 공문서와 교과용 도서에 한자를 병기하자는 철 지난 주장을 고장 난 축음기처럼 되풀이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이제 남은 건 ‘지방 의회’의 배지다. 지방자치단체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지자체들은 역시 무궁화 안에 ‘의논할 의(議)’자를 넣은 배지를 쓴다. 단지 거기 쓰인 글꼴이 고딕인가, 명조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참에 지방 의회도 국회의 선례를 따르는 게 좋을 듯하다. ‘의’자 대신에 ‘의회’를 쓰면 아주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이니 말이다.

조만간 열여덟 명의 ‘한자 지킴이’ 의원들도 한글 명패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 지독한 ‘한자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인들도 우리 시대가 위대한 ‘한글 시대’라는 사실을 깨달을 날지 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순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2014. 4.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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