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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D 프린터’와 ‘스리디 업종’ 사이

by 낮달2018 2020.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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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디(3D)와 스리디(three D)’ 관련 소극 한편

▲ 3D 프린터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3D 프린터’를 ‘삼디 프린터’로 읽은 뒤에 이런저런 설이 난무하고 있다.

 

민주당에서 탈당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 김종인 후보는 ‘잠깐 실수로 잘못 읽었다고 하기엔 너무도 심각한 결함’이라며 ‘국정 책임자에게 무능은 죄악’이라고 공격했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전문가 사이에서 통용되는 단어가 있다. 누구나 ‘쓰리디 프린터’라고 읽는다”라고 밝혔다.

 

이에 당사자인 문재인 후보는 “우리가 무슨 홍길동이냐”며 “‘3’을 삼으로 읽지 못하고 ‘스리’라고 읽어야 하느냐”고 되받았다. 한글문화연대도 이에 대해 ‘공공 영역에서 외국어와 어려운 말을 남용하는 것은 병폐’라며 김종인, 안철수 후보를 싸잡아 비난했다.

 

3D 프린터 업체 ‘삼디 몰’은 뭐야?

 

한글문화연대는 “만일 그가 ‘입체 성형기’나 ‘삼차원 인쇄기’라고 부르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면 이는 전적으로 옳은 것이겠지만, ‘3’을 ‘쓰리’로 읽지 않는다고 ‘결함, 무능, 죄악’ 따위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말이야 백번 옳은 말이다.

 

한편 3D 프린터 업체인 ‘삼디몰’은 그렇게 읽는 이들도 많은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반문했다. 애당초 문 후보의 무식을 지적하는 소재로 쓰고자 했던 장본인만 스타일 구긴 셈이 되었다. 그는 당일 정작 국립현충원 방명록에 ‘-읍니다’를 써서 자신의 한글 밑천을 드러냈다고 한다.

 

쓴웃음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이 한편의 소극에 담긴 것은 역시 우월한 강대국의 언어로서의 ‘영어’에 대한 지식인들의 뒤틀린 인식일지도 모른다. ‘펀더멘탈’이니 ‘시그널’이니 ‘워딩’ 등과 같이 요즘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외래어가 오히려 문제이지 숫자를 우리말로 읽는 게 문제라고 볼 수 없는 거 아닌가 말이다.

 

우리말 낱말에 붙는 숫자나 로마자 숫자, 영어에 붙은 숫자를 읽는 방식은 정해진 게 없다. 학교에 있을 때 아이들이 쓰는 말을 듣고 이에 대한 글을 썼었다. 그때 내린 결론이 대체로 세대에 따라, 또는 교육 정도에 따라 읽기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관련 글 : 수투, 화투? 지 투에니?]

 

아이들은 우리가 ‘수학 일(수일), 수학 이(수이)’로 읽는 ‘수학Ⅰ, Ⅱ’를 ‘수원(one), 수투(two)’로 읽는다. 당연히 KBS 2TV를 ‘KBS 투(two)’로 읽는다. 우리 세대보다 요즘 아이들은 훨씬 더 영어나 영자에 익숙하고 편한 것이다.

 

그걸 읽는 ‘규정’은 따로 없다

 

아라비아 숫자를 읽는 방식도 제각기 다르다. 나는 ‘지 이십(G20)’이라고 읽었지만, 텔레비전에 나온 어떤 국회의원은 ‘지 투에니(G twenty)’로 읽었다. 방송에서도 ‘지 이십’ 정도로 통일해 읽었던 것 같다. 그러면 ‘G7’은 어떨까. 이걸 ‘지 세븐(G seven)’으로 읽는 건 별 저항이 없고 ‘지 칠’로 읽으면 오히려 어색하다.

 

대체로 우리는 10 이하의 숫자를 영자를 읽는 것은 아마 부담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11이 넘으면 달라진다. 일레븐(eleven), 투웰브(twelve)……, 역시 이는 아직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한 숫자가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 ‘이십’ 대신 ‘투에니’로 읽은 국회의원에게는 그게 훨씬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위 논란이 있을 때 어떤 매체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자동소총 M16을 ‘엠 십육’으로 즐겨 읽는다. 물론 이걸 ‘엠 식스틴’이라고 읽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기관총 ‘M60’을 ‘엠식스티(sixty)’로 읽는 이는 거의 없다.

 

항공기도 마찬가지다. 미국산 전투기 ‘F-15’나 ‘F22’기 따위는 모두 ‘에프 십오, 이십이’ 정도로 읽는다. 수송기도 ‘C-130(일삼공)’으로 읽는데 군 복무 중에 우리는 ‘C-123’는 ‘원투스리’로 읽었다. 그건 읽는 게 수월하니까 그랬을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고 말 일을 가지고 ‘무지와 무능’을 부르댄 이번 해프닝이 결국 쓴웃음으로 마감된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이다. ‘스리디’든 ‘삼디’든 그건 문제의 본질과는 무관한 읽기의 방식일 뿐이다. 뜻이야 다르지만 ‘3D 업종’이라고 했을 때 그걸 모두들 ‘삼디 업종’이라고 읽곤 했으니까 말이다.

 

‘사대적 언어관’을 넘어

 

살펴보았듯이 영자나 아라비아 숫자를 읽는 데 정해진 규정이나 규칙은 없다. 그건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편한 대로 읽고 쓰는 사람들을 나무랄 일은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 사소한 읽기 방식을 상식이나 유·무식을 다투는 지표로 쓰는 걸 서슴지 않는 자칭 ‘지식인’들의 ‘사대적 언어관’이다.

 

그건 ‘빼박캔트(can’t)’ 같은 말을 만들어 현실과 시대적 상황을 은유하고 풍자하는 우리 시대의 자유로운 언어 사용자들의 감각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열한 현실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관련 글 : ‘불여튼튼’에서 ‘빼박캔트’까지]

 

 

2017. 4.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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