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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과 ‘작렬’ 사이-우리말 발음 이야기

by 낮달2018 202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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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발음 - ‘작열’과 ‘작렬’

▲ '작렬'은 홈런, 풍미, 섹시 댄스, 눈웃음 등 전방위로 쓰이고 있다.

 

창피한 이야기다. 오래전에 온라인 서점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살육(殺戮)’을 ‘살륙’으로 쓴 적이 있다. 명색이 국어를 가르치는 처진데 그런 잘못을 저질러 놓고 틀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떤 이웃이 ‘초면에 미안’하다면서 ‘살육’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덕분에 잘못을 바로잡았다.

 

‘살육’과 ‘도륙’

 

‘사람을 마구 죽임’의 뜻으로 쓰는 ‘살육’에 쓰인 한자는 각각 ‘죽일 살’, ‘죽일 육’이다. 여기서 ‘戮(육)’은 원음이 ‘륙’이다. 살육에선 ‘육’으로 읽지만 ‘사람이나 짐승을 함부로 참혹하게 마구 죽임’의 뜻을 가진 ‘도륙(屠戮)’의 경우에는 ‘륙’으로 읽으니 잠깐 헷갈렸던 모양이다.

 

인터넷 지면에 흔히 쓰이는 낱말 중에 ‘작열(灼熱)’이 있다. ‘사를 작(灼)’에 ‘더울 열(熱)’ 자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①불 따위가 이글이글 뜨겁게 타오름 ②몹시 흥분하거나 하여 이글거리듯 들끓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작열(灼熱)[장녈]
「명사」
「1」 불 따위가 이글이글 뜨겁게 타오름.
폭음과 작열 사이사이에 던질낚시의 추가 바닷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듯한 소리가 났으며….≪안정효, 하얀 전쟁≫
「2」 몹시 흥분하거나 하여 이글거리듯 들끓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물리』 물체를 섭씨 700~1,000℃까지의 높은 온도로 가열하는 일. 또는 그런 조작.

 

작렬(炸裂)[장녈]
「명사」
「1」 포탄 따위가 터져서 쫙 퍼짐.
「2」 박수 소리나 운동 경기에서의 공격 따위가 포탄이 터지듯 극렬하게 터져 나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런데 발음은 같은 또 다른 ‘작렬[장녈]’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는 ‘포탄 따위가 터져서 쫙 퍼짐.’, ‘박수 소리나 운동 경기에서의 공격 따위가 포탄이 터지듯 극렬하게 터져 나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야구장에선 홈런이 ‘작렬’하고, 여자 아이돌이 추는 섹시 댄스도, 눈웃음도 ‘작렬’하는 것이다. 맥주 광고에서는 ‘풍미’가 ‘작렬’하고, 2007년도에 <서울방송(SBS)>의 주말 방영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이름도 ‘작렬! 정신통일’이었다.

▲ 2007년도에 방영된 〈서울방송(SBS)〉의 프로그램 이름도 '작렬'이다.
▲ '무릎팍'이 아니라 '무르팍'이 맞는데 어떻게 이 프로가 5년이나 시비가 없었던가.

우린 무심히 지나고 말지만, 공중파 방송의 프로그램 이름 가운데도 터무니없는 게 있다. <문화방송(MBC)>의 ‘무릎팍 도사’는 5년 가까이 방영되면서 높은 시청률을 유지한 프로그램이었지만, 맞춤법 시비에 휘말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왜 ‘무르팍’이 ‘무릎팍’이 되는지 의아해했는데 20대 집안 조카는 그게 ‘무릎을 팍 치는 도사’라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직도 내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두음법칙’에서 벗어나는 말들

 

사실 “두음법칙에서 벗어나는 말”은 꽤 골치를 아프게 한다. 여름이면 곧잘 쓰이는 ‘납량(納凉)’의 경우, 사람들을 이를 ‘납양’으로 알고 [나뱡]으로 발음하곤 한다. 그러나 ‘량(凉)’은 첫음절에선 ‘양’으로 읽히지만 제2음절 이하에 오면 ‘량’으로 읽어야 한다. 이게 두음법칙이다.

 

그러나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말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렬(列)’과 ‘률(率)’이다. 이들 한자말은 어두에 쓰일 때는 물론 두음법칙을 따르지만 제2음절 이하에 쓰일 때도 ‘렬, 률’의 ‘ㄹ’이 줄어지는(‘ㅇ’으로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는 두음법칙에서 벗어나는 경우라서 ‘한글 맞춤법’ 제11항 붙임 1에 따로 규정을 두고 있다. 곧 “모음이나 ㄴ 받침 다음에 오는 ‘렬, 률’은 ‘열, 율’로 적는다”는 것이다. [표 참조] 이는 실제 발음을 표준발음으로 인정한 것인데 ‘운율’이나 ‘전율’의 발음은 [운뉼], [전뉼]이 아니라 [우뉼], [저뉼]이다.

‘자음동화’ 규칙에서 벗어나는 말들

 

자음동화 규칙에 따르면, ‘ㄴ’은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ㄹ’로 소리 난다고 되어 있다. 곧 ‘신라’는 [신나]가 아니라 [실라]로, ‘칼날’은 [칼랄]로 소리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말들 가운데는 이러한 규칙에서 벗어나는 말들이 꽤 있다. 이를테면 ‘등산로’는 [등산노]이지 [등살로]가 아니다. ‘선릉’도 [선능]이고 ‘신문로’도 [신문노]인 것이다.

<표준 발음법>에서는 자음동화 규칙에서 벗어나는 말들을 묶어 그 예외성을 인정하고 있다. 위에 든 낱말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 용례다. ‘임진란’은 [임질란]이 아니라 [임진난]이고, ‘동원령’은 [동월령]이 아니라 [동:원녕]이다.

 

우리말 쓰기에 관한 규칙을 얘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손사래를 친다. “아이고, 왜 그렇게 어려워!” 그런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럼 영어 맞춤법은 쉬운가?”라고 말이다. 미국의 주 이름 중 ‘Kansas’는 ‘캔자스’라고 읽지만, 그 앞에 ‘ar’이 붙은 ‘Arkansas’는 ‘아칸소’라고 읽는다. 정말 한글 맞춤법만 어려운 것일까.

 

 

2012. 10. 13. 낮달

 

이 글은 맞춤법 사슬을 풀어주는 27개의 열쇠”(성기지한글학회 책임연구원중 표준 발음 이야기를 참고함.


2012년에 썼다가, 십 년 감수한 글이다. 어디에 꽂혔는지, ‘포탄이 터진다’는 뜻의 ‘작렬(炸裂)’은 ‘작열’로 써야 하는데 곳곳에서 ‘작렬’로 쓴다고 지적받을 짓(!)을 했다. 아마 둘 다 발음이 [장녈]로 나는 데서 헷갈렸던 것 같다.

 

다행히 어떤 이웃이 점잖게 지적해 주어서 바로잡을 수는 있었다. 위 글은 그렇게 바로잡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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