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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두 고교생의 죽음

by 낮달2018 2020.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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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생의 죽음을 생각한다

▲ 봄이 되어 교정에는 어김없이 벚꽃이 만개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 자연을 완상할 여유로 갖지 못한다.

지난달 25일 경북 지역의 한 자율형 사립고에서 ‘전교 1등도 했던’ 고교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1일에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고3 학생이 모의고사 성적표 뒤 첫 등굣길에 아파트 14층에서 몸을 던졌다.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정색하고 이 기사를 긴급히 타전한다. 마치 그것이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지난번 사고 보도 때 제시한 원인분석이 되풀이되고 ‘학교의 변화’를 새삼 촉구하지만 그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언론은 너무 잘 안다.

 

전교 1등 고교생의 “더 이상 못 버티겠다”

 

하긴 나도 그날,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과 그 이야기를 잠깐 했다. 아이들은 그 학교를 잘 알았다. 경상북도에서 명문대를 수십 명 단위로 보내는 데는 뻔하지 않은가. 아이의 마지막 남긴 메시지가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다”였다고 이야기했더니 저도 몰래 교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본의 아니게 심각해진 분위기를 다스려야 해서 다음 이야기로 아퀴를 지었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대로 살아간다, 에이(A)대학을 못 가고 비(B)대학을 갔다고 해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면 될 일이다. 흔히들 ‘행복은 성적순’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부모님께 여쭈어보라. 당신들의 삶이 실패한 삶이냐고. 좌절과 실패를 겪으며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갈무리하며 살아간다. 그것들은 모두 아쉬운 대로 성공적인 삶이 아닐까…….”

 

말을 마치면서도 정작 나 자신도 믿지 않은 이야기를 주절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아이들은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나 할까. 중학교 때 상위권의 성적으로 입시를 치러 입학한 아이들이어서 유독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큰 아이들이다. 내 말이 그나마 아이들에게 위안이라도 될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청소년 자살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15~24세 청소년의 경우, 2008년에서 2009년 사이 인구 10만 명당 13.5명에서 15.3명으로 크게 늘었다. 게다가 2008년까지 집계되지 않던 1세~14세 청소년의 자살이 사망원인 중 3위에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말을 잃는다.

 

한국 청소년 자살률은 이미 OECD 평균을 넘어서고 있다. 2003년부터 2010년까지 7년간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다. 이런 한국의 자살률은 OECD 평균 자살률의 3배에 가깝다. 그런데도 언론 보도 때 반짝, 사회적 관심이 쏠리는가 싶더니 다시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평성대’로 돌아간다.

 

사회와 어른의 책임을 통감한다며 비통해하던 사람들은 황망히 생업으로 돌아가고 입시경쟁 교육은 전쟁처럼 이어진다. 한동안 아이들의 죽음은 학교폭력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기실 학교폭력이라는 것도 결국은 살인적 입시경쟁 교육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아이들의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는 하나로 모인다.

▲ 1989년의 상황은 2013년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 박재동 <한겨레>

학교는 20년 전으로 퇴행, 모두가 답은 알고 있다

 

1980년대 말에, 아이들의 죽음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며 일어난 교사들의 조직과 활동이 ‘전교조’고 ‘참교육’ 운동이었다. 그 시절, 교사들의 구호는 ‘아이들이 죽어간다’, ‘아이들을 살려내자’였다. 비슷한 시기에 창간된 <한겨레신문>에서 박재동 화백은 학교와 교육을 주제로 한 풍자적 만평으로 이 활동을 격려·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이후 20년을 넘기면서 학교는 다시 89년 이전의 상태로 고스란히 되돌아갔다. 교장, 교감 등 학교 관리자는 물론이고 교사도 이 흐름에 무심히 몸을 맡기고 있는 상태다. 한때는 토론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교육의 본래 의미를 찾고자 했던 학교는 이제 바야흐로 ‘태평성대’다.

 

무엇보다 토론과 논의가 사라졌다. 예전처럼 교직원 회의 시간을 달구었던 쟁점도 없고, 그걸 두고 다투던 논쟁도 없어졌다. 쟁점이 없어진 게 아니라, 쟁점을 다투고자 하는 교사들의 마음이 사라진 거다. 이제 관리자는 드러내놓고 ‘공부 선수를 기르자’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지난 시기에는 설사 교장이 그런 마음이 있어도 그걸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자기 밑천을 드러내는 일이니 꺼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교사들의 반발과 항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무도 그런 발언에 토를 달지 않는다. 교사들은 침묵으로 그걸 받아들이고 말없이 교실로 들어간다.

 

비록 동창회나 운영위원회의 명의를 달긴 했지만, 대학 입학 성적을 대문짝만하게 인쇄한 현수막을 학교 담장에 스스럼없이 내걸 정도가 되었다. 그런 학교에 아이를 맡긴 학부모는 죄인이다. ‘집의 아이는 대학 안 가도 되나요?’ 같은 힐난에 엔간히 용감한 학부모도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아무런 성찰도 없이 경쟁 교육은 계속된다. 원인분석이야 차고 넘친다. 안개와 거품을 걷어내면 그 참모습이 드러나는 걸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원인을 무력화시키고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고양이 목의 방울 정도가 아니다. 누구나 자기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문제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내 아이는 어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의 정상화’와 ‘입시경쟁 교육 폐지’는 다른 나라의 일인 것이다.

 

‘학생’도 ‘교사’도 ‘즐겁지 않은 학교’

 

일주일을 전후해 일어난 두 고교생의 죽음은 한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부산에서 목숨을 끊은 아이는 우등생이었다. 기사에서 그를 ‘전교 1등도 했던’ 아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이 살인적 입시경쟁 교육 앞에서 우등생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넌지시 강조한 것이었다.

▲ 자살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 ⓒ 통계청  2010  사회조사

뒤이은 “별 탈 없이 학교 잘 다니던 대치동 ‘고3’”아이는 ‘오르지 않는 성적에 대한 고민’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부산 아이와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듯하지만 기실 두 죽음은 공통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갉아먹는 이 살인적 입시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못된 놈들. 죽을 용기로 공부를 해 보지.”
“저 혼자만 당하는 일인가. 그걸 못 참고서…….”

 

안타까움 끝에 하는 말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잊은 게 하나 있다. 아이들이 당면한 것은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선택을 피해갈 수 없을 정도의 고통과 좌절이었다는 걸. 그걸 이길 수 있었다면 왜 전교 1등의 성취와 활달한 학교생활을 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겠는가.

 

방송고 교무실 동료 중 어린아이 둘을 기르는 여교사가 있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 딸아이가 독감으로 쉴 때, 학교에 데려와서 교무실에서 오전을 지냈다. 방송고에는 언제 학교에 오느냐고 해 ‘한 달에 두 번만 온다’고 했더니, 아이는 눈을 빛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 좋겠다! 난 나중에 고등학교는 방송고등학교에 가야지!”

▲ 초등학교 저학년에게도 학교는 가기 싫은 곳이 되었다. 그것은 동서고금, 불변의 진리이기만 할까.

초등학교 2학년에게도 학교는 가기 싫은 곳인가. 동료들과 함께 웃음을 지으면서도 나는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저 시기에 나도 학교를 그렇게 느꼈을까.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불변의 진리이기만 할까.

 

0교시 수업 때마다 책에다 머리를 박고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수업을 하면서도 나는 가끔 막막해진다. 달마다 사설 모의고사를 치르면서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듯, 정규 수업 시간에도 EBS 교재로 문제 풀이를 하는 우리도 절대 행복하지 않다고 우정 중얼대곤 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부끄러움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걸 거듭 확인하면서.

 

 

2013. 4.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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